2024년 5월 1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창세기 백 마흔다섯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50:15-21 제목: 대신하지 않겠습니다. 서론) 누가복음 9:51〜56절을 읽으면서 오늘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예수께서 마지막 고난의 일주일을 맞으시기 위해 갈릴리 사역을 접으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결심합니다. 이어 제자들과 함께 이동하는 중에 예루살렘으로 빠르게 들어가야 하는 길이 사마리아를 거치는 길이었기에 사마리아로 들어가기에 앞서 사자들을 먼저 보내기로 합니다. ‘사자’로 번역된 ‘앙겔로스’는 대체로 ‘전령’을 의미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주님은 제자 중에 전령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자를 선택하셔서 보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다 보면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게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그냥 들어가면 될 것이지, 굳이 전령까지 뽑아 보낼 정도로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에 대한 질문입니다. 고전 주석학자인 메튜 헨리는 이렇게 이 구절을 주해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얼마나 예의를 지켰는가. 예수께서는 쉴 곳을 정하고 그곳에서 자기와 제자들이 쉴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서 제자들 중 몇 사람을 앞서 사자로 보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무례히 행하기를 원치 않으셨고, 그들이 제자들에 대해서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위해 준비하도록 몇몇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신분 때문이 아니라 편리를 위해서요, 그의 오심에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매튜헨리 주석, 누가복음 9장 중에서) 예의를 지키신 예수님과는 반대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 대단히 무례했습니다. 예수를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런 반응을 만난 야고보와 요한이 분개합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그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주님, 우리가 하늘에서 번갯불을 내려오게 해서 저들을 태워 버릴까요?” 이렇게 강하게 말한 제자들에게 주님이 보이신 반응이 의미심장합니다. 누가복음 9:5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제자들을 향해 주님이 호되게 꾸짖었다고 누가복음 저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왜 주께서 제자들에게 역정을 내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봅니다. ⓵ 주님의 의도를 전혀 모르는 제자들에 대한 섭섭함입니다. ⓶ 월권하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노여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 사람이 악하든 선하든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만에 하나, 사람의 생명을 또 다른 사람이 헤치거나 상해를 입힌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넘본 행위라는 말입니다. 이 일은 대단히 질 나쁜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사역을 인간이 좌지우지하는 일은 분명히 말하거니와 월권하는 행위입니다. 본론) 야곱의 장례가 끝났습니다. 막벨라 굴에 아버지의 시신을 매장한 요셉은 고센에 정착한 형들과 동생 베냐민 그리고 친척들과 다시 애굽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요셉의 형들은 무거운 마음을 갖고 애굽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동생에게 범했던 치명적 죄에 대한 죄책과 두려움의 끈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쳇말로 도둑이 제 발을 저려 하는 꼴이 된 것입니다. 자기들의 최후 방어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 야곱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형들의 불안감은 더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형들이 먼저 요셉에게 애원하는 청을 던집니다. 15〜18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종합하자면 이런 애원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했던 말을 잊지 말라는 애원이었습니다. 17절 전반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창세기 내증 안에 진짜로 야곱이 이런 유언을 남겼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애원을 들으면서 한 가지 느끼는 소회가 있습니다. 죄를 지은 자들은 그 죗값을 이렇게 받는다는 소회 말입니다. 죄책은 참 고통스러운 심판입니다. 형들에게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형들이 갖고 있는 죄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18절은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이 구절을 접하고 보니 창세기 37장에서 만났던 말씀을 회상하게 됩니다. 창세기 37:6〜7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스스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형들의 애절한 소원을 들었던 요셉의 반응을 이제 살피려고 합니다. 1) 울었습니다. 17절 하반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울었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바카’는 의미가 대성통곡한다는 단어입니다. 형들이 애원하는 내용을 들었던 요셉은 대성통곡하며 울었다고 창세기 저자는 보고합니다. 왜 요셉이 울었을까요? 송병현 교수의 주석을 답을 제시하겠습니다. “형들의 전갈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뜩이나 슬프고 공허했던 요셉을 또 한 번 울렸다. 그는 아버지 때문에 울었고, 이번에는 형들 때문에 울었다. 이번에 흘린 눈물은 아마도 요셉의 일생에서 가장 쓸쓸한 고독에서 비롯된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요셉은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서 비롯된 눈물을 흘렸다. 억울함과 원통함에서 비롯된 눈물을 흘렸다. 재회의 기쁨에서 비롯된 눈물도 흘렸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의 눈물도 흘렸다. 그런데 이 모든 눈물은 이 순간, 요셉이 흘렸던 눈물보다 더 슬프지는 않았다. 이 순간, 요셉은 비참함을 느꼈다. 그렇게 여러 차례 형들에게 용서했다고 말했으며,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설명했지만, 그의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829쪽) 송 교수의 해제를 읽다가 감정이 이입되었습니다. 저 역시 이런 경우를 경험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의 여정 중에 가장 힘든 것은 고독입니다. 동시에 진정성을 갖고 다가서도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는 지체를 볼 때 다가오는 고독과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목회는 정으로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선배들과 신학교 교수님들을 통해 수없이 듣고 배웠지만 어디 현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까? 그게 이론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진정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처럼 슬프고 아픈 것은 없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애원하는 요청을 들으면서 참담한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송병현 교수는 연이어 요셉의 고통을 주석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되지 않는 형제들과의 골을 어찌하라는 말입니까? 저는 저들에게 애굽을 다스리는 통치자 이전에 먼저 소중한 동생으로 여겨지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나도 형들에게 응석을 부리는 동생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이, 제가 요구하는 것이 너무 큰 것이었습니까? 하나님, 왜 이 기도만큼은 들어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 저는 이제 평생 외로움으로 얼룩진 내 인생이 지겹다 못해 두렵습니다. 저는 이 순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외롭습니다. 내 가족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나는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 외로움을 달래야 합니까?” (위의 책, 830쪽) 성서 신학자가 쓴 주석이나 단행본을 읽으면서 감동이나 은혜를 받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인용하고 있는 송병현 교수의 창세기 막바지 주석을 읽다가 은혜의 강물에서 헤엄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눈물은 처절하리만큼 아픈 고독함과 외로움과 쓸쓸함에서 온 눈물이었습니다. 이런 교훈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세인 교회는 주의 종과 교우들이 서로의 진정성을 무시하지 말고 아픈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월권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9〜20절을 읽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참 고통스러운 전언을 형들에게서 받은 요셉은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잘 추슬렀습니다. 그리고 복받쳐 오른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형들에게 선 요셉이 형들에게 마지막처럼 보이는 선언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구절은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영어 성경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KJV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And Joseph said unto them, Fear not: for am I in the place of God?”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자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 안에’ 저는 이 번역이 참 좋습니다. 요셉의 선언이 어떤 선언이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리 안에 있는 자라고 고백한 선언이 참 전율하는 감동을 줍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자리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 자리 밖에 있기에 하나님의 자리를 마음대로 찬탈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리 안에 있기에 하나님이 나를 움직이시는 대로 행동하고 순종할 뿐이라는 고백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 기록을 우리나라 성경은 이렇게 멋지게 의역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나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침범하는 교만한 자가 되지 않겠다는 고백이자 선언을 요셉이 행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블레셋의 공격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 믹마스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길갈에 머무르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나갈 요량으로 사무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도착하기로 한 날이 7일이 남아 있는 터라, 사울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사울의 마음에 교만함이 싹터 있었고, 결국 그는 사무엘이 행할 일을 본인이 진행하기에 이릅니다. 사울이 번제와 화목제를 야훼 하나님께 드리고 맙니다. (삼상 13:9) 사울이 제사를 드리고 났는데 바로 그때 사무엘이 길갈에 도착합니다. 번제의 흔적을 본 사무엘이 사울에게 묻습니다.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러자 당황한 사울이 이렇게 답합니다. 사무엘상 13:11〜12절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사울의 무모함은 월권을 행한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사울은 왕조의 조기 종식을 선언 받는 비극의 시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13:13〜14절을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월권의 결말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이 아름다운 결말을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십시다. 창세기 2:15-17절을 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을 묵상하는 사람 중에 성경 구절을 아주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렇게 까다로운 나무를 애초에 만들지 말거나, 아니면 에덴에 두지 않으면 될 것을 그곳에 둠으로써 인간에게 사달이 나게 했다는 항의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함의를 주는 책이라고 믿는 대다수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은 선악과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던 선악과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피조물임을 확연하게 구별하는 상징물이었다.”(이재철, 『새신자반』, 273쪽) 정말, 중요한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이 바로 선악과였다는 말입니다. 월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똑같아지려는 욕망입니다. 사탄이 결국 아담과 하와를 무너뜨렸던 계략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3:4〜5절은 보고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이” 표준 새 번역 성경은 창세기 3:5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월권하는 가장 두드러진 원인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함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도전이요 죄악입니다. 창세기 11:3〜4절을 마지막으로 살피겠습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인간의 월권은 자기들의 바벨탑을 ‘하늘에 닿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 세인 교회 지체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경성의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43:1절을 명심하십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피조물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금도 조각되고 있는 존재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넘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월권입니다. 월권은 요셉의 고백 그대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여 꿰차는 일입니다. 저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임종을 보지 못한 불효자입니다. 그래서 효도에 대해서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입관 예배 시간에 어머니의 얼굴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엄마, 엄마의 아들로 태어나게 해 주셨고, 엄마의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의 막내아들이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근본적 사랑을 알고 고백하는 것은 인간으로써 가져야 할 마땅한 기본 윤리입니다. 하물며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꿰차는 불효자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세인 지체들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월권의 죄를 범하는 자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피조 된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는 토기장이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