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38:12-30
제목: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론)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두 가지 보고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명기 역사서인데 여호수아서로부터 시작하여 열왕기하에 이르는 장대한 역사 보고입니다.
이 역사서들은 말 그대로 신명기라는 토라에 근거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망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토라에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불순종하면 징벌을 받게 된다는 공식과 틀 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순종과 불순종의 내용들을 숨김없이 보고합니다.
반면, 역대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서를 지칭합니다.
이 역사의 기록들은 연대기적인 역사관을 가진 사가들의 보고로 설명하는데, 선민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패망하여 약 70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방 땅에서 치욕의 삶을 경험한 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도자들이 두 가지를 질문하며 선조들의 역사를 찾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석했습니다.
⓵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⓶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혈통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그것에 대한 답을 제시한 역사의 보고가 바로 역대기 역사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뿌리에 대한 회복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선조들의 죄에 대한 비판보다는 격려와 응원이 먼저였습니다.
역대기 역사는 불필요한 선조들의 죄에 대해 가능하면 덮으려고 하는 역사 보고를 전제합니다.
이 두 가지 역사의 흐름은 이스라엘을 설명합니다.
다만 이 두 개의 역사 보고를 통해 독자들은 양방향의 견제와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신명기 역사가들의 보고에 대해 조금은 더 정서적인 부침을 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길을 걷는 나에게도 신명기 역사관은 진면 혹은 반면교사의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역사서는 아닌 모세 오경 안에 들어 있는 창세기입니다.
창세기 기자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는 족보의 한 계열인 유다 족보를 잇게 위한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이 시도를 통해 창세기 기자는 마치 신명기 역사가들의 보고처럼 유다 계보 자체가 전혀 의로운 계보이거나 완벽한 혈통이 아니었음을 여지없이 고발합니다.
오히려 인간들의 군상 자체가 얼마나 허점투성이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의인들을 위함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함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조명해 주는 참 좋은 정보이자 자료임을 알게 해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본론)
아둘람에 거주하던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그녀의 친정으로 돌려보냅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셋째 셀라가 장성할 때가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강해에서 살폈듯이 유다는 큰아들, 둘째 아들을 잃고 난 뒤에 막내까지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사취수법에 의해 며느리 다말을 셀라에게 주어야 했지만 그것을 피하기 위해 유다는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입장 정리를 한 뒤, 시간이 흘렀습니다.
본문 12절을 읽겠습니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우리나라 성경에 ‘얼마 후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바이루브 하야밈’은 직역하면 ‘많은 날이 지난 후에’라고 번역됩니다.
그렇다면 ‘많은 지난 후’라는 문구가 주는 의미는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낸 뒤에 유다에게 일어난 이들을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유다는 아내인 수아의 딸이 사망했고, 이에 따라 막내 셀라도 장성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아내를 잃고 상처한 유다는 친구와 함께 자기의 거주지인 아둘람에서 북동쪽으로 7km 정도 떨어져 있는 딤나로 이동합니다.
이유는 양털을 깎으로 간 것입니다.
이 소식이 며느리 다말에게 들렸습니다.
그러자 다말은 즉흥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장고(長考)한 것으로 보이는 행동에 나섭니다.
본문 14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과부의 의복은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일까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통상 고대 근동에서 과부들은 자신이 남편을 잃은 여자라는 것을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서 얼굴을 가리는 너울을 쓰지 않았습니다.
“과부들은 분명히 너울을 쓰고 다니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처녀들과 기혼녀들은 외출할 때 너울을 썼다.”(게르하르트 폰 라드, “국제성서주석-창세기”, 404쪽)
이런 풍습 안에 있었던 다말은 자신이 과부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딤나로 가면서 너울을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불어 가장 평범한 여자의 복장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변장한 다말은 딤나 곁에 있는 에나임 문에 앉았습니다.
에나임이라는 장소가 정확하게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딤나 성읍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자기 시아버지가 이 길을 경유할 것을 알았던 다말은 그곳에서 일반 여인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시아버지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제 15-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에나임 길로 시아버지가 지나가다가 만반의 준비를 한 변장하고 있는 다말을 보자 본능적인 욕망이 일어난 유다는 며느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녀가 창녀인 줄만 알고 그녀의 육체를 탐하여 물질을 주고 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자행합니다.
이 일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말은 그녀가 계획한 대로 말을 이어갑니다.
몸을 허락하는 대가로 무엇을 주겠느냐고 묻자 염소 새끼를 주겠다고 유다가 답합니다.
염소 새끼는 당시에 상당한 가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가 낯선 땅에 왔기에 지금 당장 염소 새끼를 줄 수 없기에 대신 그것을 주기까지 약속하는 담보물을 주겠다고 말한 뒤에 그 담보물로 다말에게 준 것이 도장, 그리고 끈, 지팡이였습니다.
부연 설명이 필요한데 이 당시 유다가 갖고 있었던 도장은 반지 형태로 되어 있는 도장이 아니라 목에 달고 다니는 실린더 형태의 인장이다 보니 목에 달고 다닐 끈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이것을 약조로 준 것입니다.
다말은 이 약조물을 받고 자기의 몸을 허락합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 일이 있은 후에 나타난 결과물을 창세기 기자가 이렇게 보고한 내용입니다.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다. 돌아가 다시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입었다.” (18,19절)
창세기 기자의 목적이 있는 표현법입니다.
너무 추잡하고 모욕적인 반윤리적이며, 반도덕적인 일을 주저 없이 보고하고 있는 이유는 유다의 계보 때문입니다.
이른바 유다의 계보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조명하기 위함입니다.
셋째 아들 셀라를 통한 다말의 임신이 아니라, 시아버지의 씨로 말미암은 임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유다는 며칠 후에 친구에게 염소 새끼를 보내 약조물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에나임에는 유다가 동침한 창녀가 없다는 전갈을 받고 보낸 염소 새끼를 친구 히라에게 맡겨둡니다.
혹시나 자신이 약속을 어긴 비겁한 자가 될 것을 알고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한 유다의 행보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로부터 3개월 후에 유다에게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며느리 다말의 임신 소식이었습니다.
당시 문화적, 사회적 관습은 정조를 지키지 않은 여인은 화형이 대가였기에 며느리의 임신 소식은 당연히 화형에 처할 중 범죄인 것을 알았던 분노한 유다는 며느리를 소환하여 화형에 처할 것을 명합니다.
극한 위기에 처한 다말은 바로 그때, 본인 스스로가 장고한 결과물을 시아버지에게 내놓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이 선언을 들은 유다의 충격은 곧바로 이렇게 묘사되었습니다.
26절입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주전 13-14세기 헷 족속과 아시리아 법률에 이런 조항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죽고 계대결혼을 한 시동생도 죽으면 죽은 남편의 아버지가 며느리를 취할 것이요, 이런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는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창세기 주석”, 687쪽)
아마도 유다와 다말에 대한 담론 역시 이런 시대적 상황과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유다는 며느리가 행한 일을 의로운 일로 평가합니다.
반윤리적인 행태로 정죄한 것이 아니라, 막내를 주지 않으려는 시아버지의 의도를 알고 계대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며느리의 행동을 옳은 것으로 수용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해서 이 땅에 태어난 유다의 아들이 바로 쌍태아 베레스와 세라였는데, 베레스가 예수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감으로써 예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이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극복될 수 있었음을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우리는 지난 수요일과 오늘에 걸쳐 창세기 38장의 내용을 살폈고 해석했습니다.
지난주 수요일 교훈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은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전적인 방식으로 진행됨을 역설했습니다.
오늘은 전혀 다른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할 거룩한 계보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세속적인 다말과 유다 스토리를 통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교훈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심으로 종결된다는 교훈입니다.
송병현 교수의 주석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38장에 기록된 사건은 야곱의 아들 유다가 하나님의 약속을 위기에 빠뜨리는 모습을 묘사한다. 야곱에게까지 전수되어 온 축복이 유다를 통해 계승되어야 하는데, 유다는 그 약속을 전수할 자손을 탄생시키는 일에 전혀 무관심했다. 결국 그의 맏며느리 다말의 용감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다음 세대로 계승될 수 있었다.” (송병현, 위의 책, 693쪽)
유다는 이렇게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선언하셨던 약속을 무위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사탄의 상징인 뱀에게 전하셨던 원시복음을 이루기 위한 사역의 한 장면이 오늘 유다와 다말 담론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이 다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다시 본문 18절 하반절입니다.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단 한 번의 성관계를 통해 즉각적으로 임신한 다말의 사건은 하나님이 일하심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또 다른 구절 하나는 결정적입니다.
본문 26절을 다시 읽습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이미 우리는 이런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에 반윤리적, 반도적인 일탈이 일어났다고.
그렇습니다.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또 다른 반전의 은혜를 줍니다.
유다는 며느리가 자기로 말미암아 임신한 사실을 알고서 다시는 다말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대목입니다.
법적으로는 다말이 생산할 아이의 아버지는 유다입니다.
어머니는 다말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는 이후 다말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을까요?
유다는 적어더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설명은 다말에 대한 격려 때문입니다.
“다말의 ‘탈선’은 그녀가 단순히 남자의 품이 그리워 저지른 일이 아니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시아버지에게 책임이 있다. 그녀는 시아버지를 통해서라도 남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 일을 행했다는 사실을 인정받았다. 당시 정서를 고려하면 남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죽은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義이자 선이었다. 이것을 인정한 유다는 큰아들의 일을 방관하던 자신보다 죽은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한 다말에게 ‘네가 나보다 더 의롭구나’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송병현, 위의 책, 690쪽)
이렇게 본문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신 일의 책임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교훈입니다.
단지 그 계획의 현장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이해와 레마까지 받았습니다.
마무리를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유다의 계보에서 중단될 뻔했습니다.
아주 단순히 유다가 갖고 있었던 세속적인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위기에 눈감고 계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좌초될 수 있는 인간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이제부터 당신이 직접 개입하시기로 했습니다.
그 개입하심의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내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런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의 시작도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일의 마무리도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그 결과물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이사야 37:31-32절입니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유다의 사고방식은 오늘 세속적 사고방식과 빼닮은 것처럼 보입니다.
불리한 것은 행하지 말라는 얍삽한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결국 세속적 사고의 방식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로 계획하신 일을 성취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실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지하고 물러서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음 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음 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 내게 먼저 오사 내 맘을 만지고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날 먼저 안으시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하시는
내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모든 걸 덮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안아주시는
내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라 부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