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창세기 백스물 세번 째 강해)
본문: 창세기 38:1-11 제목: 무엇 때문일까?
서론)
11월 한 달도 교우들의 범사에 주의 은총이 여전히 머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창세기 37:36절을 읽겠습니다.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이제 창세기 39:1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글의 문맥으로 볼 때 창세기 37:36절 뒤에 39:1절이 등장해야 맞습니다. 사건과 상황이 아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혼란스러운 것은 창세기 38장이 이 두 구절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38장이 37장과 39장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이 곤혹스럽습니다. 더군다나 38장은 도덕적으로나 인륜적으로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불미스러운 성적 결합에 대해 논하고 있기에 설교 본문으로 삼기에도 대단히 불편한 텍스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라리 없으면 좋을 뻔 한 스토리가 버젓이 38장 안에 담겨 있어 해석하기가 불편합니다. 그렇다고 구약성경 정경 안에 들어 있는 담론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삭제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오늘 수요예배 설교 텍스트가 바로 난처하기 짝이 없는 부분이라 어떤 교훈을 찾아야 할지 나름 힘이 드는 작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보려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본문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본론)
요셉을 애굽으로 내려가는 미디안 상인에게 팔자고 제안한 유다가 본문 38장의 주인공입니다. 본문 1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창세기 저자가 표현한 ‘그 후’는 언제일까요? 잠시 주석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이전에 살핀 대로 유다는 야곱이 첫 번째 아내였던 레아에게서 얻은 네 번째 아들입니다. 추적헤 보면 야곱은 밧단아람에 거한 지 7년이 되어서야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레아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후 야곱은 르우벤, 스블론, 레위라는 아들을 그녀를 통해 얻었습니다. 그리고 레아를 통해 네 번째로 얻은 아들이 유다입니다. 이들의 나이를 추론하자면 이런 내증을 참고해야 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외삼촌 라반과 함께 했던 총 햇수가 20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첫 아들을 얻은 후 1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을 전제할 때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얻은 아들들의 터울은 아무리 큰 나이 차이를 감안해도 13살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이 야곱의 11번째 아들이니까 무리한 추론이 아니라 이 정도 선에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셉이 넷째 형인 유다와 터울은 10살 미만일 것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정보를 나누어 보십시다. 창세기 37:2절에 의하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갈 때 나이가 17세 소년이었음을 보고해 줍니다. 이것을 기초로 할 때 넷째 형인 유다의 나이는 어림잡아 27세를 넘기지 않은 청년이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결국, 본문 1절에서 ‘그 후에’라고 적시한 시간이 요셉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렸을 바로 그 후를 의미한다고 전제할 때, 유다는 결혼 적령기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유다의 결혼 행적입니다. 다시 1-2절입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지금 야곱의 일가는 가나안 땅 헤브론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아버지와 형제들이 살고 있었던 땅에서 이탈합니다. 이윽고 유다가 정착한 곳이 아둘람이었음을 밝힙니다. 이 대목을 설명하는 1절 본문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을 들게 하는 동사를 만납니다. 사사기 14: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삼손이 나실인으로 태어난 장소인 ‘소라’를 떠나 ‘딤나’로 이탈했을 때, 그리고 거기서 한 여자를 보고 여색을 탐하는 굴곡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보고하는 구절에서 사사기 기자는 이 단어를 썼습니다. ‘야라드’ 즉 ‘내려갔다.’고 기록합니다. 오늘 유다가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제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던 가나안 땅 헤브론을 떠나 아둘람으로 갔음을 표현하는 단어를 삼손이 딤나로 내려갔다고 표현한 바로 이 단어 ‘야라드’를 썼습니다. 분명히 유다에게 뭔가 적절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고한 셈입니다. 왜 이렇게 짐작할 수 있습니까? 야곱가의 전례를 무시한 사례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증조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들인 이삭의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친족에게서 며느리를 찾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먼 거리인 밧단아람으로 종 엘리에셀을 파견하지 않았습니까? 유다의 고조 할아버지였던 이삭은 유다의 큰 아버지 에서가 부모에게 항의하는 마음으로 자기 멋대로 이방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낙담하였음을 창세기 28:6-9절이 이렇게 보고했지 않습니까?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 야곱이 친족이었던 리브가에게서 낳은 아들이 유다였는데 막상 그렇게 얻은 유다는 아버지 야곱의 뜻과는 거리가 먼 실망스러운 결혼 행보를 보인 것입니다. 헤브론이 아닌 아둘람에서 만난 수아의 딸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세 명의 아들들을 얻었음을 본문 3-5절이 보고하는데 장남이 엘, 차남이 오난, 삼남이 셀라였습니다. 유다는 자기의 첫 아들을 위해 며느리를 얻게 되는데 그 여인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다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해석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7절에 도착했습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하나님은 유다의 장자인 엘을 죽이셨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엘을 왜 죽이셨지? 답은 엘이 야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엘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악을 행했는지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어 그 죄의 내용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살핀 일반적인 설교에서는 엘이 다말과 동침하지 않으려 했기에 그렇게 되면 유다 지파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악으로 보고 엘을 하나님이 죽이셨다고 해제합니다.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말도 안 되는 비약입니다. 굳이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면 이게 훨씬 신학적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이탈한 유다를 보고 자란 엘의 영적 상태가 엉망이었을 가능성으로 추측해 보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은 맥락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엘을 죽이신 이유에 대한 답변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입니다. 이렇게 장자 엘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유다가 택한 방법을 8-10절이 보고합니다.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고대 근동의 법이었던 형사취수법(兄死取嫂法)에 근거한 유다의 조치였습니다. 이 형사취수법은 고대 근동의 문화권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법률입니다. 결혼한 형제가 대를 이을 자녀가 없이 죽었을 때, 형제는 형수/제수와 결혼을 해서 대를 잇게 해주는 법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히타이트 족속의 법률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가족관계법입니다. 유다가 오난에게 형수를 취하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법에 의거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명령을 받은 오난이 거절했다는 점입니다. 주석 하나를 읽겠습니다. “오난은 형수와 동침을 해서 낳게 될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형의 아들이 될 것에 불만을 품고 관계를 가질 때마다 정자를 흘려 보냈다. 오난의 생각은 이러했다, 형제가 셋이었다가 둘로 줄었으니 자신이 이어 받을 유산이 그만큼 많아졌을 뿐 아니라, 형이 죽었으니 둘째인 자기가 맏이가 되었다. 맏이는 다른 형제에 비해 두 배의 유산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 재산의 2/3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죽은 형의 아들이 태어난다면 자신이 받게 될 유산이 1/4로 줄게 된다. 그러므로 더 많은 재산을 받기 위해 이런 짓을 한 것이다.”(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창세기 주석”, 682쪽) 송 교수의 주석도 약간의 비약이 있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간과할 수는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마도 이런 오난의 계산하는 행위를 하나님이 괘씸하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가설은 가능한 추론이기에 하나의 주장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오난을 치셨다면 그것도 일견 동의할 수 있는 주장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유다 가정에 임한 재앙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겠습니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이제 셋째가 남았습니다. 셀라였습니다. 법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다말은 셋째와 결혼을 해서 씨를 남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유다가 이것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막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가 장성할 때까지 친정에 가서 기다리라는 명령을 며느리 다말이 받았는데,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유다의 생각에는 셋째 마저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말을 내친 것입니다. 다말 역시, 시아버지의 의도를 나름 눈치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녀는 시댁을 떠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다음 주 수요일에 보겠지만, 가나안에서 수절해야 하는 다말은 시아버지가 딤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녀로 변장하여 그와 동침함으로 쌍태아를 잉태해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결국 다말은 이렇게 해서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유다 가문의 톨레도트를 형성하게 되었음을 창세기 저자가 보고합니다. 오늘 예배에서는 1-11절까지 단락을 구분해 여러 교우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오늘 단락에서 우리들에게 주신 본문을 통해 얻어야 할 교훈을 찾아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앞 주해를 통해 설명했듯이 엘이 죽었습니다. 오난도 죽었습니다. 막내 셀라가 죽을 것을 예상하고 셋째를 며느리에게 주지 않고 끊으려고 했던 유다의 계산적인 행태도 살폈습니다. 살피면서 풀어야 할 숙제가 생각났습니다. 엘은 왜 죽었고, 오난은 왜 죽어야만 했을까? 성경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 답을 말하기가 녹록하지 않지만 오늘 강해 설교를 통해 그래도 가늠하고 교훈 삼아야 할 내용이기에 어느 정도 본문에 맞는 신학적 성찰을 토대로 그림자는 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찾아내야 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이 내 생각과 다르다는 성찰입니다.
이 레마를 다루려면 야곱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반추해야 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아들 요셉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러 내려간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 바로가 이렇게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나 되는가? 그러자 야곱이 바로에게 답합니다. 창세기 47:9절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그러니까 야곱이 세상을 떠나기 17년 전에 애굽에 도착하여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복기한 것입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낸 130년이었다고. 왜 아니겠습니까?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경험한 야곱이었기에 가능했던 술회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야곱의 인생을 한 선(線)으로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삶은 자기 마음대로 산 인생의 롤러코스트를 타다가 벧엘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의 궤도 안으로 들어선 삶이었다.” 결국, 야곱은 나름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궤적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마감한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하나님 안에서 살고자 노력했고 치열했던 삶을 살았던 세 번째 족장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네 번째 아들,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의 계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헌데 주목할 것은 이렇게 엄청난 축복의 통로로 사용된 유다 계보는 과연 이 복을 받을만한 계보인가에 대해 여러 차례 고개를 젓게 하는 별 볼 일이 없는 계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냥 그렇고 그런 게보가 아니라 결코 하나님이 보시기에 쓰임받을 만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뒤집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계보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자세히 살폈고, 다음 주 수요일에는 더 경악할 만한 죄인들의 구조가 보이는 것이 유다의 행보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추잡하고 더러운 행보를 통해 만들어진 계보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셨을까? 그러니까 오늘 레마는 또 다시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은 내 생각의 방식과 같지 않다는 것 말입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 내 이론의 방식과 같다면 나는 도리어 매우 실망할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이론과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면 하나님과 나나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식에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성 너머에도 계십니다. 나는 아주 가끔 이런 소회 때문에 울컥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관점과 이해와 사고 안에서 해석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은데 나는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그럴 때 조용히 다가와 손내미시면서 내게 주시는 은혜는 이것입니다. 너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이니까 나는 네 하나님이다.
결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강해 설교 준비를 하면서 죄인들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문장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지를 재삼 깨달았습니다. 유다의 계보를 통해 오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기적인지도 다시금 정리했습니다. 그러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들이 오늘 말씀을 전하는 저와 듣는 여러분들입니다. 유다의 이탈, 그리고 그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들들에게 임한 재앙,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놓치지 않기 위해 편법이라도 붙잡으려고 했던 다말, 이 모든 것들이 인간 군의 적나라한 모습인데 이 아름답지 못한 인간의 계보를 통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은 그저 감사의 조건이자 내용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를 위해 오신 주님
나를 위해 오신 주님 나의 죄를 위하여서/유대 민족들에게 잡히시던 그날 밤에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에게 사랑을/보여 주신 주님 예수 십자가를 지셨네 그러나 언젠가 주님을 부인하며 원망하고 있을 때에 나에게 오셔서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셨네 거절할 수 없어 외면할 수 없어 주님의 두 손을 잡았었네 주님의 사랑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