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4:28-60
제목: 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앞서 보았던 10-27절까지 정황에 대한 리바이벌 성격의 재구성된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엘리에셀로 추측되는 늙는 종이 가나안의 세겜을 떠나 멀고 먼 밧단아람까지의 여정 끝에 도착해서 주인이 요구한 조건에 부합한 처녀 리브가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간 뒤에 이어지는 후속 담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28-60절까지 무려 32절에 해당하는 긴 절의 내용은 엘리에셀의 성황 설명과 리브가 가족의 반응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엘리에셀이 리브가의 집으로 동선을 옮겼습니다.
리브가의 집에 도착을 하자 제일 먼저 반색하며 반긴 사람은 리브가의 오빠 라반이었습니다.
라반의 환대는 조금 깊이 들여다 볼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30-33절 전반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누이의 코걸이와 그 손의 손목 고리를 보고 또 그의 누이 리브가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하더라 함을 듣고 그 사람에게로 나아감이라 그 때에 그가 우물가 낙타 곁에 서 있더라 라반이 이르되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서 있나이까 내가 방과 낙타의 처소를 준비하였나이다 그 사람이 그 집으로 들어가매 라반이 낙타의 짐을 부리고 짚과 사료를 낙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발과 그의 동행자들의 발 씻을 물을 주고 그 앞에 음식을 베푸니”
리브가가 초청한 엘리에셀을 본 라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이렇게 극진히 종을 환대한 라반은 한 술 더 떠서 극진한 호의를 베풉니다.
당신이 묵을 방과 낙타들의 처소까지 준비하였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낙타들에게 짚과 사료를 주고, 엘리에셀과 동행한 자들에게 발 씻을 물과 음식을 제공하기까지 합니다.
왜 라반이 이토록 분에 지나는 호의를 베풀었을까요?
30절이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의 누이의 코걸이와 그 손의 손목 고리를 보고 또 그의 누이 리브가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하더라 함을 듣고 그 사람에게로 나아감이라 그 때에 그가 우물가 낙타 곁에 서 있더라”
라반이 그렇게 종의 일행을 환영한 이유는 리브가에게 걸어준 코걸이, 손목 고리 때문이었습니다.
송병현 교수의 해석을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서 라반의 행동을 잘 관찰하라. 그의 ‘재물 밝힘 증후군’이 드러난다. 진정한 자비와 섬김에서 비롯된 리브가의 친절과는 달리 라반의 호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여호와 찬양’을 진실함으로 보는 학자는 거의 없다. 재물에 어두운 사람이 재물을 많이 가진 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펼치는 가식에 불과하다.” (송병현, “엑스퍼지멘터리-창세기 주석”,p, 424.)
결국 라반의 호의는 불온한 목적을 기리고 있는 불순한 의도 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사정이야 어떻든 엘리에셀은 리브가의 가족들과 만나게 됩니다.
이후 엘리에셀이 자신이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와 도착한 이후 리브가를 만나게 된 것, 그리고 자신의 주인인 아브라함 그러니까 라반의 큰 아버지를 소개합니다.
이렇듯 자세한 앞의 사건들을 조금은 장황하지만 설명한 엘리에셀은 마지막으로 결론적인 협상을 벌입니다.
본문 48-49절을 읽겠습니다.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믿는 내 주인의 섭리에 따라 리브가를 만났는데 이제 리브가를 주인의 며느리로 데려가겠으니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오빠 라반과 아버지 브두엘에 반응한 내용이 본문 50-51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이 구절도 더 세밀한 해석이 요구되는 대목입니다.
라반과 브두엘이 엘리에셀의 말을 듣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이 구절을 접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리브가의 집안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었을까요?
답은 NO입니다.
왜 답이 NO이었을까요?
우리는 창세기 29-31장에 가면 야곱과 라반에 대한 미묘한 투쟁에 대한 메시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20년 만에 지긋지긋한 밧단아람의 라반의 집 탈출을 기록한 31장을 보면 라헬이 아버지의 집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수호신인 드라빔을 훔쳐 가지고 나온 장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라반의 집에서 믿었던 대상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라반의 집은 드라빔 우상을 숭배하는 집안이었습니다.
동시에 ‘라반’이라는 이름의 뜻이 ‘흰색’이라는 뜻인 것을 보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흰색은 종종 그들이 믿는 ‘달(月)’ 신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라반의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우상을 섬기고 있던 가정임을 증언합니다.
그런데도 라반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운운한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부, 그리고 그 부를 이어받을 유일한 상속자인 이삭이라는 사촌에게 리브가를 시집 보내는 것이 철저히 라반의 세속적인 욕망 때문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단서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오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면을 보입니다.
라반은 이런 세속적 타산에 눈이 멀어 여동생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보낼 것을 마음먹었지만, 정작 당사자가 이를 거부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기에 라반과 브두엘은 리브가를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합니다.
본문 58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당사자 리브가에게 가족들이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사랑하는 여동생아, 너는 이 낯선 사람들과 가나안으로 가서 결혼을 하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본문 53절에 의하면 리브가의 친정 식구들은 이미 결혼 지참금까지 받은 상태인 것을 보면 리브가의 가족들은 이미 리브가를 보내기로 마음먹고 세속적 욕심을 채운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여동생을 생면부지의 땅으로 보낸다는 것이 인지상정으로 너무 힘든 일이었기에 종에게 며칠 혹은 열흘을 머물면서 인간적인 정을 뗄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엘리에셀이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자 리브가의 결심과 반응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리브가의 의지는 친정 식구들의 기대와는 달리 단호했습니다.
리브가가 답합니다.
“가겠나이다.”
송병현 교수는 58절에 기록되어 있는 리브가의 답변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리브가의 ‘가겠나이다’라는 대답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강력한 의지가 서린 형태 즉 ‘desiderative imperfect’(바람직하지 않은 불완전함)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녀의 결단은 단호한 것이었으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날 때의 의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녀는 ‘여자 아브라함’이었다.” (위의 책, 430)
기가 막힌 표현의 설명입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전제로 수요 저녁에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찾아보겠습니다.
※ 신앙은 흔들림이 없이 뛰어야 하는 경주입니다.
바울이 양아들 디모데에게 준 목회적인 권면이 디모데후서 2:3-6절에서 세 가지로 나타나 있음을 알려줍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⓵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 ⓶ 법대로 경기하는 선수 ⓷ 수고하는 농부와 같은 마음으로 목회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군사가 상황이 흔들리면 백전백패합니다.
법에 따라 경기하는 자가 상황 때문에 흔들리면 반칙패를 당합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농사법대로 농사를 하지 않으면 수확할 수 없습니다.
흔들리면 안 되는 직업군입니다.
김기석 목사의 글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2’에 담긴 글을 인용한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영혼의 자서전’과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들려주는 한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그는 산길을 걷다가 올리브나무에 매달린 유충을 발견했다. 유충을 떼어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가만히 들여다보니 투명한 꺼풀 속에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생명이 깨어나는 비밀의 과정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다. 그는 아직 고치 속에 갇혀 있는 미래의 나비가 햇빛으로 뚫고 나올 성스러운 시간을 기다렸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기 원했지만 그 깨어남의 시간은 너무 더뎠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유충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유충의 등이 찢어지더니 연둣빛 나비가 나왔다. 나비는 힘겹게 날개를 펴려고 애썼지만 날개는 겨우 반쯤 펴지다가 멈췄다. 조바심이 났지만 나비는 영영 날개를 펴지 못했다. 영원한 법칙을 어기고 서둘렀기에 나비를 죽이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아주 오래도록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이 이야기 끝에 카잔차키스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인간은 서두르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작품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하지만, 신의 작품은 결점이 없고 확실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는 영원한 법칙을 다시는 어기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나무처럼 나는 바람에 시달리고, 태양과 비를 맞으며 마음 놓고 기다릴지니. 오랫동안 기다리던 꽃과 열매의 시간이 오리라.”(김기석,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꽃자리, 219)
서두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반칙한다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유충에게 인위적으로 즉 반칙이라는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어 결국 그 유충을 죽이는 해로운 행위가 상황에 흔들려 작위적으로 무언가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도 경우에 따라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족들의 애틋한 마음이 환경이요, 상황이었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리브가의 한 마디가 이 모든 것을 잠재웠습니다.
가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때론 환경을 뛰어넘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상황과 환경에 지지 마십시다.
이럴 때 되새기고 암송하며 소리 내어 읽어야 할 구절이 우리기 주일에 나누었던 히브리서 12:1-2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여호수아가 유언처럼 남겼던 말씀이 기억에 있으십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 24:14-15)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