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0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마흔 두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10:1-32 제목: 노아의 후손들 오늘 본문은 어느 한 단락에서 끊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조금 길지만 전체를 텍스트로 삼아 읽었습니다. 창세기 10장의 내용은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톨레도트)입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우리가 주지하듯이 노아의 아들들은 홍수 이전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가졌지만 그때는 자녀들을 낳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세 아들들이 생육하고 번성한 시기는 홍수 이후임을 본문이 암시합니다. ① 2-5절: 야벳의 족보입니다. ② 6-20절: 함의 족보입니다. ③ 21-31절: 셈의 족보입니다. 창세기 9:1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이 홍수로 인해 중단된 것이 아니라 홍수 이후에 노아와 그의 후손들로부터 다시 유효함을 재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32절은 바로 하나님의 이 약속에 대한 성취를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그렇다면 조금 구체적으로 노아의 후손들로 이어진 톨레도트 즉 계보, 족보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십시다. 2-5절까지 야벳의 계보가 소개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제 1세대인 야벳의 아들들이 2절에 명기되어 있고, 제 2세대인 고멜, 야완의 아들들이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벳의 계보는 14명이 열거되어 있고, 단지 2세대에 대한 보고만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두 번째로 소개되는 함의 톨레도트입니다. 무려 6-20절까지의 가장 긴 절수를 차지하며 창세기 기자를 통해 소개된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통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함에 대한 담론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발가벗은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체의 부끄러움을 가리지 않고 다른 두 명의 형제에게 고발한 당사자로 지목되어 저주를 받아 불행한 역사를 맞게 되어 그의 후손들의 앞날이 녹록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입니다. 심지어 근본주의적인 자들은 함에게 내려진 저주로 인해 그의 후손들에게도 저주가 임해 그들은 지금의 흑인종이 되었다고 서슴지 않고 막말을 쏟아내는 어처구니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망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흔히 노아의 아들들 가운데 셈은 황인종, 야벳은 백인종, 함은 흑인종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또는 성경 외 문헌에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당장 함의 후손 가운데 가나안은 아프리카와 무관하게 가나안 땅에 살고, 구스의 자손 가운데 니므롯 같은 이 역시 바벨론과 앗수르 지역에서 사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김근주, “교양인을 위한 성경 창세기, 세상의 모든 처음”, 봄이다 프로젝트‘, p,48.) 이제 함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본문 안에서 추적해 보십시다. 6절에는 제 1세대인 함의 아들들이 소개되고 있고, 7-12절까지는 제 2세대인 구스의 아들들과 미스라임의 아들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긴 절수가 할애된 것은 가나안의 아들들입니다. 특히 가나안의 아들들은 여타 다른 족보처럼 이름만 열거된 것이 아니라 18(b) -19절에 보면 그들이 살고 있는 영토 즉 지역까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가나안의 최북단 경계는 시돈이고, 가나안의 최남단은 그랄이다. 가나안의 서쪽 경계는 지중해이고, 가나안의 동쪽 경계는 사해와 요르단 계곡이다. 가사는 가나안의 남쪽 해안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도시이고,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은 평지 도시들인데 사해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이희학,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창세기 1-11장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p,273.) 하나의 정보만 더 들추어 보겠습니다. 함의 아들인 구스의 톨레도트와 정보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10:8-14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더라)” 통상 J 문서라고 여겨지는 10:8절에서 창세기 기자는 함의 제 2세대에 해당하는 니므롯을 영걸이라고 소개합니다. 히브리어 ‘기보르’의 번역인 ‘영걸’은 개역판 성경의 번역이고,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은 더 쉬운 용어인 ‘용사’라고 번역했습니다. J 기자의 의도는 니므롯이 차지한 땅의 권세는 단순히 한 지역을 차지한 정도가 아니라 부족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엄청난 영토를 차지했음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희학 교수의 주석을 다시 보십시다. “니므롯은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 악갓, 갈레를 다스렸으며,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큰 성 레센을 건축했다. 이 모든 성읍들은 앗수르와 바벨론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니므롯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유능한 정치 지도자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위의 책, pp,271-272) 학자들의 이 정보를 통해 우리는 그동안 전혀 성서적이지 않았던 내용을 무조건적으로 쓸어 담았던 함의 톨레도트는 흑인종의 시초라는 말도 안 되는 해석을 말소해야 합니다. 더 주목할 것은 함의 자손들이 살고 있었던 곳은 성서의 가장 노른자 역할을 했던 가나안을 비롯하여 주변 근동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셈의 톨레도트를 보십시다. 21-29절입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우리는 이 구절에서 J기자의 대단히 의도적인 기록을 찾아내야 합니다. 셈⟶아람⟶셀라⟶에벨⟶욕단 앞에서 보았던 야벳과 함의 톨레도트는 기껏해야 2세대(함) 내지는 3세대(야벳)의 기록으로 끝냈습니다. 하지만 셈의 세대는 무려 5대에 걸쳐 소개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26명의 사람이 소개되고 열방의 계보에 등장한 인물은 70명이나 됩니다. 대단히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창세기 기자의 기법입니다.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의 정보를 추적하겠습니다. Ⓐ 먼저 21절의 정보입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 다른 족보의 형식과는 무관하게 이 문구가 들어갔습니다. 에벨이라는 의미 때문입니다. 창세기 11:15-32절을 보면 에벨이라는 족보의 6대손으로 탄생하는 자가 아브람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기자는 셈의 후손인 에벨 그리고 에벨의 후손인 아브람을 강력하게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 에벨이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는 이름임을 알리고 싶었다는 정보입니다. 이 해석은 이희학 교수의 해석으로 한 번 더 접근해 보겠습니다. “에벨이라는 이름을 직역하면 ‘걸어가는 사람’으로 히브리어 ‘이브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고유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셈의 후손에게서 이스라엘이 탄생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희학, 위의 책, p,276) 본문 해석을 위해 마지막 한 부분을 더 접근해 보겠습니다. 셈의 톨레도트가 이렇게 후손들에 대한 의도적인 정보만 기록으로 남긴 것이 아니라 30-31절을 보면 그 영토까지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메사와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은 아라비아 남부 지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더불어 셈족의 일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아카드 제국과 고대 바벨론 제국을 건설하기도 합니다. 이상의 해석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대단히 예민한 성경의 맥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승자 독식구조의 성서 해석을 바꾸어야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흔히 역사를 기록된 산물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승자들이 기록한 내용물을 역사라고 하고 실패한 역사의 산물을 야사라고 폄훼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은 철저한 승자독식구조에 따른 역사 해석입니다. 성경의 역사도 이런 면에서 해석의 여백을 남겨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로, 그리고 신앙인으로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상징적인 땅을 하나님 주셔서 이스라엘이 들어갔다는 의미에 대하여 부인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이것을 부인한다면 신앙적인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차준희 교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 질문의 요지는 이런 것입니다. 오늘 노아의 후손들의 톨레도트를 감안할 때 가나안은 원래가 함의 자손들이 차지하며 살았던 땅으로 보는 게 적어도 창세기 10장의 성서텍스트를 전제할 때 올바른 해석이다. 이런 측면에서 함의 자손들을 내쫓고 후에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한 셈의 후손들은 도리어 점령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와 살았던 함의 족속들을 내쫓고 점령군으로 가나안에 정착한 셈의 정착 역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가? 이런 경우를 역사의 승자를 중심으로 역사가 기록되었다는 승자독식의 기술(記述)로 보아야 되지 않을까를 질문했습니다. 친구가 제 질문에 대해 아주 중요한 인사이트를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착한 것에 대한 종교학자가 아닌 신학자의 변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가나안이라는 하나님의 주신 땅에서 살던 백성들 그러니까 창세기 10장의 내용으로 접근할 때 함의 후손들일 것입니다. 이 땅에 살던 백성들이 부르던 신의 이름은 ‘엘’이었다는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엘’은 고대근동의 일체의 종교들에서 흔히 호칭되던 일반적 신의 명칭이었는데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을 정복하여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에게서부터 비로소 성경이 말하는 야웨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결국 야웨 신앙의 시작은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야웨 하나님의 신앙을 계승하는 기독교 신앙인의 자세는 가나안은 하나님이 미리 약속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신앙적 태도라고 친구는 충고해 주었습니다. 친구의 해석을 듣고 약간은 혼란스러웠습니다. 혹시나 너무 안전한 해석이 아닐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친구의 해석은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신앙의 근간을 모티브로 한 해석입니다. 그러기에 저 또한 복음주의권의 목사로 이 부분에 대해 수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또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복음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원고를 작성하면서 많은 고민이 제게 임했습니다. 만에 하나, 셈의 후손이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함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던 가나안 땅을 빼앗았다고 해석하면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일하심이 흔들리게 되는 것일까를 되새기며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목사입니다. 그러기에 가나안이라는 땅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수용하며 공감하는 목사입니다. 다만 오늘 창세기 10장을 통해 함께 교우들과 나누고 싶은 영적인 교훈은 가나안에 미리 정착하여 살았던 함의 후손들도 노아의 계보에서 나온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해석을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창세기 9:24-27절을 복기해 보겠습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우리는 이 구절을 그냥 문자적으로 아주 편안하게 이해하는 방식을 택해왔습니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지 않았던 가나안(함)이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었던 그의 형제(셈과 야벳)들의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문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마땅히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던 함의 후손들이 셈의 후손들에게 쫓겨 나간 것은 시의적절한 노아의 예언에 대한 성취라고 이해하는 방식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로 문자주의적인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저는 송병현 교수의 해석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의 조상이 이미 오래 전에 저주를 받았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가나안 정복에 나서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함인 듯하다.” (송병현, “엑스포지맨터리 주석-창세기, 국제제자훈련원,p,203.) 송 교수의 해석을 전제한다면 오늘 설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레마를 쓸어 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의 실수로 인해 함의 자손이 저주를 받았다는 해석은 시도 자체가 틀렸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셈의 계보를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셈을 사용했다는 해석 말입니다. 하나님의 가나안 정복의 메시지는 함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창세기 9:26절을 놓치면 안 됩니다.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우리들이 승자독식구조로 성경을 해석하면 언제든지 함몰되는 위험이 셈을 찬양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찬양해야 하는 대상은 셈이 아니라 셈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0장을 통해 보는 노아 후손들의 톨레도트의 결론은 어느 한 아들이 특별히 잘 해서 복을 받았고, 어느 한 아들은 못해서 저주를 받았다는 편향적인 해석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며, 결코 승자독식의 구조적 해석으로 성경을 몰고 가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민족은 노아의 아들들의 흩어짐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누구 한 계보를 통한 흩어짐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