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3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마흔 한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9:28-29 제목: 홍수 후에 오늘 본문은 단 두 구절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교훈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이 구절을 논하면서 도대체 무슨 은혜가 있을까 싶으실 것입니다. 이제 궁금해 하시는 은혜를 추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을 끝으로 창세기 5장에서 시작된 아담으로부터 노아로 이어지는 계보의 스토리가 끝이 납니다. 기억이 날지 모르겠지만 아담의 계보를 열거하고 있는 ‘톨레도트’ 즉 계보의 형식이 대체로 이러했습니다.셋의 계보를 예로 보겠습니다. 창세기 5:6-8절입니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그렇습니다. 아무개(셋)가 자녀(에노스)를 낳은 후 몇 년(807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912세)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르는 계보는 이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끝이었던 노아의 계보는 이 형식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대단히 의미 있는 형식으로 막을 내립니다. 다른 형식은 거의 비슷한데 중요한 문구가 하나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홍수 후에” 그렇습니다. 노아의 인생 이력에 있어서 홍수는 그에게 있어서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엔카운터(encount)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게 된 대 변혁의 만남이었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것을 알았기에 본문에서 ‘홍수 후에’라는 문구를 삽입한 것입니다. 노아의 계보를 끝맺는 현장에 이것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오늘 창세기 강해 41번째 강해 시간에 이 해석을 기초로 첫 번째 레마를 받겠습니다. 1) 당신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던 엔카운터의 시간이 있었습니까? 후에 살피겠지만 미리 야곱의 스토리를 여기서 한 컷만 다루어보겠습니다. 장자권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외삼촌이 살고 있는 하란에 있는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가기 위해 브엘세바에서 출발해서 벧엘에 도착을 합니다. 브엘세바에서 벧엘까지는 100km 그러니까 약 2-3일이 걸려 이동을 한 셈입니다. 벧엘에서 하란까지는 900km 약 한 달 정도가 걸리는 장거리이기에 피곤한 상태였던 야곱은 벧엘에서 유숙하기로 하고 돌베개를 베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꿈을 꾸게 된 야곱은 꿈에서 사닥다리가 하늘에서부터 땅에 닿아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닥다리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너무 신비로운 광경에 빠져 있었던 야곱은 사닥다리 맨 위를 쳐다보게 됩니다. 바로 그때 야곱은 그의 인생 처음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엔카운터를 경험한 것입니다. 창세기 28:13-14절입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그는 꿈에서 이 놀라운 신 현현의 은혜를 맛본 뒤에 꿈에서 깨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28:16-17절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던 야곱, 그에게 있어서 벧엘은 신앙의 눈을 뜨게 해준 엔카운터의 현장이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피신하여 살고 있었던 80세가 되는 즈음 양떼를 치다가 우연히 호렙 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모세가 호렙으로 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서 모세는 시각적인 하나님과의 엔카운터를 경험합니다. 출애굽기 3:2절을 소개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모세는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놓은 너무 신비로운 현상을 시각적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엔카운터는 단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출애굽기 3:4-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제는 청각적인 엔카운터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 사건을 통하여 430년이나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는 민족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노아는 600세부터 601세까지 테바 안에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테바 안에서의 삶은 기적의 현장이었고, 동물과도 함께 하는 삶이 힘들고 지치는 현장이었지만 분명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되새김질하는 은혜의 현장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1년 17일 동안 이런 엔카운터의 은혜를 경험 하였기에 테바 안에서 나온 그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8:20절을 복기하십시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엔카운터는 내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미 있는 삶으로 승화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2) 노아가 죽었음을 창세기 기자는 독자들에게 알립니다. 홍수 사건이라는 가장 드라마틱한 엔카운터를 경험한 노아는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은 전형적인 P문서입니다. P문서는 주전 550-450 년경에 살았던 아론 제사장 그룹에 속했던 여러 명에 의해서 편집된 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P문서가 편집된 이후 약 500-600년 후에 살았던 믿음의 후배인 히브리서 저자의 술회가 돋보입니다. 히브리서 11:7절을 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그렇습니다. 훨씬 후대에 살았던 믿음의 후배 히브리서 저자도 노아를 이렇게 인정했습니다.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보다 더 큰 극찬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노아는 신앙적 가치에 있어서 후대에 의해 높이 평가를 받은 믿음의 선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극찬을 받았던 노아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홍수 이후 350년을 더 살았다고 밝힙니다. 분명히 홍수 이후 350년을 더 살았다고 표현한 P기자는 노아의 인생이 긍정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기자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역사에 기록했습니다.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그도 죽었습니다. 이번 주간에 바티칸 대법원인 로타 로마나(Rota Romana)의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인 최초의 변호사로 사역하고 있는 한동일 변호사가 쓴 ‘라틴어 수업’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너무 의미 있게 동의한 책이기에 기록된 한 내용을 교우들에게 소개하겠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 번역하면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입니다. 저자는 이 글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부연했습니다.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의 문구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영원으로부터 와서 유한한 삶을 살다 다시 영원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숨이 한 번 끊어지면 그만인데도 영원에서 와서 인지 인간은 영원을 사는 것처럼 오늘을 삽니다.” (한동일, “라틴어 수업”, 흐름 출판, pp,151-152.) 글감을 내 것으로 만들어보니 숙연해졌습니다. 지난 주일 주보에 실었던 목양터 이야기 마당의 글을 기억하십니까? 복기해 보겠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잊혀진 계절’은 제가 신학교에 편입을 한 1982년에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습니다. 이제 너무 오래 시간이 지나서 가뭇가뭇하기는 하지만 어렴풋한 기억으로 공영방송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이 노래가 흘러나왔던 것이 제 뇌리에 있는 걸 보면 분명 그렇습니다. 당시는 신군부 독재의 공포가 서늘했던 때라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던 우울한 시대였기에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서정적인 노래에 위로를 받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잊혀진 계절’은 참 좋은 멜로디와 가사로 대중들의 인기를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때를 잘 만난 노래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가 때이니 수십 년이 지난 노래이지만 꼭 이 맘 때가 되면 다시 듣고 싶은 노래 등등의 타이틀로 ‘잊혀진 계절’이 부활합니다. 금년에도 여전히. 지난 주간, 우연히 유튜브에서 첼로로 연주하는 이 곡을 듣게 되었습니다. 첼로의 선율로 연주되는 곡에서 젊은 시절의 추억도 있고 해서 아름다운 곡에 흠뻑 빠져 보았습니다. 하지만 곡과 더불어 제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어떤 이의 댓글이었습니다. 그의 댓글을 이러했습니다. “이제 몇 번의 10월의 마지막 밤이 남아있을까요? 열심히 살아가야겠습니다. 가을이 많이 깊어 갑니다.” 이 댓글은 또 읽는 이들의 댓글로 이어졌는데 또 하나의 글에 저 역시 멈췄습니다. “그러게요. 몇 번 남았을까요? 잊을 수 없는 10월의 마지막 밤이”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에 흠뻑 빠져보려고 들어간 유튜브 채널에서 갑자기 진지해진 저를 보았습니다. 금년에 환갑을 지내고 보니 이런 글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댓글러들이 말한 그대로 진짜로 시월의 마지막 밤이 내게 몇 번이나 남았다고 정확하게 예측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나 역시 할 수 있는 말의 최선은 나 또한 이것뿐이겠지요.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죽음을 알리는 일체의 메시지를 훑어보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진지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전도서 3:1-3절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야고보 기자도 말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야고보서 4:14) 어떤 의미에서 정말로 미련한 자가 누구입니까? 가장 유한한 짧은 이 땅에서의 삶을 사는 게 인간의 운명인데도 마치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살아가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창세기 P기자가 노아도 죽었다는 것을 적시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노아가 죽은 것처럼 너도 죽는 존재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소개한 책에서 라틴적인 격언을 연이어 소개합니다. “Si vis vitam, para mortem”(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 (위의 책,p,157.)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의 홍수 완결을 알리는 에필로그입니다. 아주 짧은 구절이 시사하는 은혜를 교우들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마무리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노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연수를 향유하다가 열조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두 사람을 비교한 뒤에 설교를 맺겠습니다. 창세기 5:25-27절입니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므두셀라의 전 인생은 아들을 낳고 최고로 오래 살았다가 전부인 이력을 남겼습니다. 또 한 사람, 아무런 의미 있는 이력을 남기지 못한 므두셀라의 손자의 이력을 다시 곱씹겠습니다. 본문입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비슷한 이력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노아의 보고입니다. 노아는 홍수라는 구속사의 한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남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도구였습니다. 므두셀라도 죽고, 노아도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죽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다면 우리도 ‘홍수 후에’라는 엔카운팅의 이력을 남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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