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6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서른아홉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9:8-17 제목: 케쉐트 찬양 한곡을 드리고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만에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신실하심을 보여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겠습니까? 말라기 3: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하여 말라기 시대에 유다 공동체는 극도로 하나님을 불신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스룹바벨 성전 재건 이후에 학개가 말했던 성전 건축의 복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전언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답을 찾기 위해 학개 2:21-23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예언자 학개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신탁하신 말씀의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직역하여 해석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스룹바벨 제 2성전을 완공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지금의 국제 정세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것임을 약속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권력들을 향하여 그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라고 하셨고, 그들의 군사력과 물리적인 힘을 초토화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약속의 압권은 이후 스룹바벨을 세워서 인장을 주어 내 뜻을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2:24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다윗의 계보를 잇는 사역자로 고니야(여호야긴)를 지정하여 나의 약속의 인장 반지를 키우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계획이 변경되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야긴이 아니라 스룹바벨로 다시 낙점하여 다윗의 혈통을 통한 회복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약속을 학개에게 재확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제 2성전 재건이 이루어지면 다윗의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제 2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 주전 515년에 완공되었는데 말라기 예언자가 활동했던 주전 400년대 전 후반까지 학개를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반감으로 말라기 시대에 유다 백성은 물론 제사장 그룹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영적 흑암의 궤도로 진입했음을 말라기 예언서는 물론 학자들이 보고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헛 약속이었을까요? 이렇게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 하나님께 무슨 신뢰를 보낼 수 있는가 마땅히 항변하게 됩니다. 이제 담임목사의 성서 해석을 펼치겠습니다. 미시적 성서해석이 아닌 거시적 성서해석이 이럴 때 필요하다는 생각에 젖습니다. 분명히 말라기 시대까지 학개에게 신탁하신 유다 공동체를 향한 복이 이루어지 않았습니다. 유다 공동체는 제 2성전 건축이 이루어지면 유다는 다시 다윗 공동체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선민 공동체로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런 해석이 바로 미시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라기 시대의 상황을 이렇게 거시적으로 해석하기를 동의합니다. 학개 2:22절의 여러 왕국은 단지 지금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바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바사의 뒤를 이을 헬라, 헬라의 뒤를 이을 로마, 로마의 뒤를 이을 세속 국가 전체를 의미한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유다 공동체를 압박하고 짓누를 세속 국가들 전체를 묶어 그들을 무력화시킬 것을 성전 재건의 복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스룹바벨은 단지 제 1차 포로귀환시의 지도자인 스룹바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니온 신학대학교 교수인 엘리자베스 악트마이어 교수는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 가운데 오시기 시작했을 때, 다윗의 가문과 혈통에서 나신 바로 그분은 스룹바벨의 후손으로 오셔서, 예언자 학개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다. 그분은 무궁하며, 온갖 통치와 권력과 권위를 전복시키며 진동하거나 사라지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다. 예언자 학개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서 성취되기 시작했다. 주께서 자신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엘리자베스 악트마이어, “나훔-말라기, 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164-165.)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테바에서 나온 노아와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 9-11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인간과 동물들 모두에게 분명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다시는 홍수로 인간을 멸하지 않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아마도 초토화되어 있는 이 땅을 보면서 참담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던 노아와 그리고 같이 살아가야 할 동물들의 두려움을 생각하시고 위로한 언약이었을 것입니다. 언약을 세운다고 말씀하신 단어 ‘언약’은 히브리어 ‘베리트’의 번역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단어의 원 의미는 동물을 죽여 그 사체를 반으로 쪼갠 뒤에 양쪽에 놓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언약의 중대함은 언약을 파기할 때 파기자는 마치 사체가 될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서늘한 뜻입니다. 그만큼 언약의 중대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하신 하나님은 언약의 증표를 노아와 그의 식솔들에게 주십니다. 본문 12-17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언약의 증표는 ‘케쉐트’ 즉 무지개였습니다. ‘케쉐트’가 하나님이 홍수 이후 세우신 언약의 증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케쉐트를 노아와 동물들에게 약속의 증표로 주셨을까요? 두 가지 답을 제시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도 이제부터는 당신의 만드신 자연을 다시는 훼손하지 않으시겠다는 의지 표명이었습니다. 본문 15절만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면서 당신도 인간과 생물들에게 행하셨던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자카르) 천명하셨습니다. 이 말은 내가 창조한 일체의 피조 상태를 존중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심판을 시행할 수밖에 없는 아픔을 하나님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이후부터는 다시는 당신이 걸작으로 만든 피조의 세계에 피해를 주지 않고 존중할 것임을 약속하신 셈입니다. 왜 우리가 이 땅을 존중하고 아껴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신학적 근거입니다. 주목할 것은 15절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 땅을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의 대상을 생물까지 확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생물들을 하나님께서 파트너로 인정하신다는 선언입니다.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까지 살아 있는 일체의 피조물을 파트너로 삼으셨다는 점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생물’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every living creature(RSV,KJV)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의 세계가 다시는 훼손당하지 않게 하시겠다고 언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이후 시대에도 계속해서 죄가 만연할 것이며, 노아 시대 이전보다 그 강도는 더욱 세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고 계셨던 그 상황에 대한 공범자들입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작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의 세계를 얼마나 마음대로 막 사용하며 훼손했는지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 훼손의 결과이자 증거가 지금 우리들이 1년 10개월 동안 착용하고 있는 마스크입니다. 앞으로 파괴된 자연으로 인해 어떤 일이 우리 생애에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코비드 19로 사망한 숫자가 5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금년 노벨상 평화상 후보로 스웨덴 출신의 17살 소녀인 자연환경운동가 크레타 툰베리가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 보도도 접했습니다. 전 세계의 정상들에게 지구 기후에 대하여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변명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성토한 툰베리가 이번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는 것은 그래야 하나님이 보내신 무지개 즉 케쉐트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는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존중하겠다는 천명한 이 땅을 훼손하는 것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입니다 곧 신앙적 범죄행위임을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2) 케쉐트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려줍니다. 크로스웨이 성경공부 교재를 보면 성경에 등장하는 언약이 두 가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①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체결하신 종적 언약입니다. 이런 언약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앞으로 살피게 될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맺으신 노아와의 언약,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비느하스와 맺은 언약, 그리고 사무엘하 7장에서 맺으신 다윗과의 언약입니다. ② 인간 편에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횡적 언약입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모세와 시내 산에서 맺으신 언약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언약은 두 가지 다 의미가 있는 언약입니다. 다만 전자의 언약이 의미하는 신학적 교훈은 ‘전적인 은혜’라는 것을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자격됨을 보고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당신의 공의에 맞기에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은혜를 받을만한 무슨 행위를 했기에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동물, 식물과 파트너십을 맺으신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기에 파트너십을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호세아 1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여기에 기록한 어렸다는 단어는 히브리어 ‘나아르’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아직 젖 냄새를 풍긴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성숙하지 못한 상태, 불완전 존재 등등의 의미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자랑스러워 부른 것이 아닙니다. 완벽해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부르셔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정의합니까?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다음 주 강해의 스토리가 그 유명한 술취 해 발가벗은 노아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언약을 주신 메시지의 그 다음 절인 9:18절 이하의 스토리입니다. 사정이 이 지경이면 정말로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상황을 뻔히 아신 하나님은 그 당사자에게 케쉐트를 주셨습니다. 은혜 아니고서는 다른 것으로 대치할 언어가 없습니다. 노아만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요. 저와 당신도 이 은혜에 빚진 자입니다. 오늘 우리 세인 교우들이 케쉐트의 은혜를 심비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본문 17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