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9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서른여덟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9:1-7 제목: 책임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목회를 해온 지난 날 동안 부분적으로 창세기를 본문으로 택해 설교를 한 경우는 많지만 지금 하는 사역처럼 창세기를 통째로 강해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부분적으로 창세기를 택하여 제목 설교를 했던 본문은 대체적으로 유명한 본문들 즉 이미 많은 목회자들에게 단골 메뉴로 선택된 본문들이었기에 창세기의 나무는 볼 수 있었지만 유감스럽게 그 나무들이 이루고 있는 큰 숲을 보지 못해 항상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들어서서 교우들과 창세기 전체를 강해하며 섬기게 된 것은 제게는 대단히 유익하게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사의 조건 중에 제일 큰 것은 창세기를 통전적으로 해석하며 읽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표현한 문장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볼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점이 제게는 가장 큰 감사의 이유이자 행운이기도 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들이 나누는 9장 같은 경우가 제게는 큰 그림으로 창세기를 보게 해 준 너무 좋은 실례입니다. 오늘 본문은 홍수 심판을 끝내신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노아에게 내리신 복과 언약을 아주 소상히 소개해 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본문 1절은 전혀 낯설지 않은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왜 이 구절이 낯설지 않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1장에서 천지창조 사역의 압권이었던 6일째 사역을 행하시면서 선포하셨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6-30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만드시면서 가지셨던 프로젝트입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 만들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만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씨 가진 식물들을 먹을거리로 주신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가장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인간에게 주신 복의 내용이 이렇게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보기 좋게 배신했습니다. 배신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체의 악을 자행했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은 인간의 죄악을 묵과할 수 없어 노아를 선택하셔서 테바를 만들게 하셨고, 노아와 식솔들을 그 테바 안에 승선하게 하신 뒤에 그들만은 구원하셨고, 당신이 만드신 일체의 피조물들을 멸하시는 홍수 심판을 감행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천지창조 시에 일구셨던 일체의 것을 멸하신 뒤에 홍수 심판을 끝내셨습니다. 이후 제 2의 창조라고 할 수 있는 메시지를 노아에게 재천명하시는 장면이 본문 1절입니다. 그래서 본문 1절은 전혀 낯설지 않는 문장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2-3절에 제 1의 창조 때와는 조금 상황이 다른 내용을 선포하십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제 1의 창조 시기에는 인간은 동물들을 보호하고 공존하는 주체였습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경계의 관계요,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될 것임을 시사 하셨습니다. 동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하지만, 동시의 위협하는 대상이 될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혁명과도 메시지를 노아에게 남기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인간에게 동물들을 먹을거리로 주시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홍수 이전, 인간의 먹을거리는 식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이후에는 육식이 허용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사정이 이러니 인간과 동물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며 공존을 하지만 서로 긴장해야 하는 약육강식의 구도로 바뀌었음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은 홍수 이전처럼 보호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살해하여 먹을 수 있는 대상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동물을 먹을거리로 주는 대신 한 가지의 제한 사항 즉 금기 명령을 노아에게 하달하신 내용입니다. 본문 4-5절이 이것을 밝힙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피는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동물들을 육식의 먹을거리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이 왜 이런 엄격한 제한 사항을 두었을까요? 동물들을 살해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지만 그 동물의 고기만 먹고 피를 먹지 말라는 메시지에 담긴 신학적인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동물들에 대한 생명의 소유권은 주님의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명제를 각인 시킨 것입니다. 이 전제는 동물들은 인간의 식용거리로만 이용해야지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든지, 동물들의 유전자를 바꾼다든지,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한다든지 등등의 도구로 악용하는 것을 절대로 금지한다는 제한 명령인 셈입니다. 동물들의 피를 먹지 말라고 제한하신 하나님은 또 하나의 마지노선을 발표하는데 본문 6절입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문장을 직역하여 설명한다면 인간 살해 금지입니다. 이 역시 인간의 생명 역시 주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형법적인 죄악이 아닌 그 이상의 죄악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4-6절에 대한 해석을 장로교신학대학교 하경택 교수의 글로 부연하며 설명하겠습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일어날 살육과 피 흘림의 현실을 보시고 하나님은 한 가지 제한사항을 두신다. 그것은 생명이 있는 피와 함께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신 것이다. (중략) 홍수 이후에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양보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간은 홍수심판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일은 하나님의 형상을 침해 하는 일이며 하나님에 대한 도전 행위인 것이다.”(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1(1-12장)”,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pp,146-147.)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창세기 기자가 우리 독자들에게 주려로 했던 신학적 교훈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 인간과 동물의 소유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기에 인간은 책임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라는 명령입니다. 저는 ‘책임적 반응’이라는 문구를 대단히 좋아합니다. 적어도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인간이 해야 할 책임적 반응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비롯하여 여타 종교에서 주장하는 메시지 중에 상당수 공통적인 분모가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기에 누구도 터치하지 못하게 하고 나의 인생에 대해서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게 하라” 지금은 무대에서 탈락되었지만 한 때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승려 혜민의 발언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내 인생의 결정권을 주지 마십시오. 내가 내 삶의 주인입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그 어떤 성스런 스승이라도 ‘나 자신’부터 있었기 때문에 그 분들의 성스러움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십시오.”(혜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쌤앤파커스, p,121)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책의 인쇄본이 729쇄의 책입니다. 얼마나 이 책이 많이 팔려나갔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또 한 권의 책에서 비슷한 종류의 발언을 했습니다. “한정판으로 나온 최고급 명품도 똑같은 것이 수십 개씩 만들어져 나옵니다. 그러나 ‘나’라고 하는 명품은 세상 하나 밖에 없어요. 하나뿐인 개성 있는 ‘나’라는 명품을 아껴주세요.”(혜민, “완벽하지 않을 것들에 대한 사랑”, 수오서재, p,43.) 흠잡을 데 없는 혜민의 충고입니다. 자기에 대하여 우울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오늘 이 글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지 안 보아도 비디오입니다. 자존감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지게 만드는 작금에 혜민의 말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져 한 때, 그의 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이 책의 제본은 43쇄였으니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얼마나 그의 말에 사람들이 열광했는지 족히 짐작이 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도 혜민의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니 다른 말이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세상의 단 하나뿐인 ‘나’라는 존재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혜민의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한 것은 또 다른 한 부분에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동의하지 않는 면이 무엇일까요? 나는 나를 존중하고 아껴야 하지만 그래도 내 인생의 결정권 즉 내 인생의 소유권은 내게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주시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배제된 나는 언제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내 삶의 절대적 소유자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내가 얼마나 헛헛한 존재인지 저는 100%가 아니라 1,000%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에 도착합니다. 그것은 적어도 내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할 때 최선을 다하는 책임적 반응의 의식을 갖고 살아낸다는 점입니다. 왜 제가 장로교회 신학을 거부하고 성결교회의 목사로 살아갈까? 바로 책임적 반응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믿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가 타락하면 하나님이 회개를 시켜 다시 구원의 자리로 잡아 끌어들여 반드시 구원시킨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성도는 타락하면 다시 자유의지를 통해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본인 스스로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하게 해 주신다는 것에 속지 마십시오. 내가 죄인이었을 때 주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셔서 나를 회개케 하심으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내가 자연인일 때에 국한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은 자인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살면 결론은 멸망입니다. 내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책임적 반응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야 회복되는 것입니다. 책임적인 반응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내 삶의 소유권이 주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1-13절에 보면 두 기사가 등장합니다. 1-4절에는 산상수훈의 사역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주님께 한 명의 한센 병 환자가 찾아와 자신의 질병을 고쳐달라는 기사가 등장하고, 5-13절에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가버나움에 살고 있던 백부장의 기사입니다. 그는 자신의 병든 하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음을 호소하고 주께 치유를 호소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헌데 이 두 기사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그 공통점을 알게 해주는 두 구절을 소개합니다. 먼저 8:2절입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주님은 환자의 이 고백을 들으시고 그에게 손을 대고 안수하심으로 그를 고쳐주셨습니다.두 번째 소개할 구절은 8:8절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이 고백을 들으신 주께서 많니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간구처럼 하인의 병을 고치셨다고 마태는 증언합니다.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두 명 다 주님께 질병을 고침 받기 위해 최선의 책임적 반응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들이 병을 고침 받게 된 이유가 믿음 때문이라고 정리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설교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책임적 반응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홍수로 인해 모든 피조물이 멸망당하는 시기에 유일하게 구원 받은 노아에게 이렇게 하명하셨습니다. 다시 4-6절 본문입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그렇습니다. 홍수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말은 인간의 생명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심을 명심하라는 말입니다. 막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방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종의 삶이 아닌 책임적 반응을 하며 사는 인간에게 주님은 첫 창조에 주셨던 복을 유지하십니다. 어떻게? 본문 마지막 7절입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적어도 성도로써 책임적 반응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이 주시는 복을 지속해서 주십니다. 홍수 이전에 약속하셨고 당부하셨던 복은 이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28절을 다시 읽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약속은 홍수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창 9:7) 저와 여러분의 소유권은 주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적인 반응을 하며 살아갑니다. 예언자 제 2 이사야는 이렇게 주의 신탁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