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나온 후에2024-03-08 17:10
작성자 Level 10

2021년 9월 22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서른일곱 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8:20-22

제목나온 후에

 

교회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난 뒤에 사택 베란다에서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새의 분비물을 치우는 일입니다.

올라가서 확인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새로 만든 사택 베란다 지붕 쪽 새 집이 만들어졌든지 아니면 중간 휴식처가 만들어졌는지 둘 중에 하나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은 인내하고 있지만 상황이 조금 더 심해지면 지붕으로 올라가 그 근원지를 제거해 버릴 생각으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들이 우지 짖는 소리가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분비물을 치우는 일은 제게는 유쾌하지 않은 일임에 분명합니다.

제가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1년 17일간 테바 안에 동물들과 함께 있었던 노아와 그의 식솔들은 추측 건대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동물과 인간이 한 공간에서 거한다는 것은 여하튼 대단히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를 키우고고양이를 키우는 것을 낙으로 삼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파충류까지 집에서 사육한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는데 그건 제 상식으로는 정신세계가 다른 특별한 케이스라고 생각하고 다름을 인정하지만 제 입장에서 동물과 인간이 서로의 지역에서 상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삶을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노아가 1년 17일 간 한 공간에서 각종 동물들과 상존해야 했다는 것은 정말로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었을 것으로 思慮됩니다.

그렇게 1년 17일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지옥과도 같은 테바 안에서의 삶이었을 텐데 드디어 8:15-19절에서 노아는 큰 은혜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보고해 줍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노아가 동물들과 함께 상존했던 그 좁은 공간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펴 보십시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를 빗대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도 목욕이었을 것입니다.

깨끗한 물을 찾아 목욕을 제일 먼저 했을 것 같습니다.

1년 17일 동안 목욕을 하지 못했다고 상상해 보니까 생각하는 것조차도 하기 싫다는 생각이 저며 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노아의 첫 행동은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합니다.

무엇이었습니까?


※ 제단 쌓기였습니다.

 

본문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두 개의 단어를 소개하겠습니다.

단을 쌓았다.’ (Noah builded an altar.)로 번역한 히브리어 미즈베아흐라는 단어가 바로 이곳에서 처음 성경에 등장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피조 된 인간이 형식을 갖추어 드린 제사(예배)의 효시라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 제단에서 노아가 드린 제사가 바로 번제’(올라)입니다.

번제는 희생 제물의 가죽만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드리는 완전제입니다.

레위기 1:6-13절을 참고해 보십시다.

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그가 단 북편에서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그 머리와 그 기름을 베어 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다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송병현 교수는 이 제사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독자들에게 이렇게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아가 왜 정결한 짐승을 7쌍씩 방주에 태웠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그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정결한 짐승을 부정한 짐승보다 7배나 많이 실었다아울러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후 당장 먹을 채소와 곡식을 구할 수 없는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짐승을 먹이로 주셨다정결한 짐승을 7쌍식 방주에 태우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상한 인자함이요 보살피는 은혜였다.”(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주석-창세기“, 국제제자훈련원,p,195.)

이 은혜를 알았던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에 제일 먼저 자기와 가족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께서는 사명자반에서 이 구절에 대해 대단히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겼는데 소개하겠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 즉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노아 가족이 방주에서 나올 때 방주 속에 있던 모든 생물도 함께 나왔다새들이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날개 퍼덕여 창공으로 날아오르고짐승들은 괴성을 지르며 대지를 질주하고곤충들은 이리저리 뛰며 마음껏 재주를 뽐낸다그 가운데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만 하나님께 예배부터 드렸다방주에서 나온 노아 가족이 어떤 행위든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를 먼저 하였더라면그 순간 그들은 짐승이나 새들과 구별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재철, “사명자반”, 홍성사,p,250.)

저는 이 해석을 읽으면서 전율했습니다.

이재철 목사께서는 이렇게 노아가 제일의 우선순위로 행한 제단 쌓기에 대하여 적시한 뒤에 소름을 끼치게 하는 교훈을 이어갑니다.

창세기 2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짐승 그리고 공중의 새를 모두 흙으로 만드셨다하지만 그 가운데 흙으로 지으신 사람에게만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을 생령이 되게 하셨다그러므로 겉으로 아무리 그럴 듯하게 보여도 생령으로 살지 않는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짐승과 생령인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는 예배에 있다.” (위의 책같은 페이지.)


오늘 창세기 37번째 강해를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레마를 받겠습니다.

 

※ 성도가 이수해야 하는 예배는 교양 선택 과목이 아니라 전공 필수 과목임을 명심하십시다.

 

이희학 교수는 노아의 제단 쌓기에는 두 가지의 신학적인 의미가 있음을 소개합니다.(이희학,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창세기 1-11장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239.)

① 노아의 제사는 홍수 심판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 표현이다.

② 이 제사는 노아가 새롭게 시작하는 자신의 미래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겠다는 신뢰의 표현이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교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영적 레벨에 있었던 노아였기에 구원도 받았겠지만동시에 구원 그 이후의 삶을 이렇게 아름답게 연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수가성에 물을 길으러 왔던 여인에게 얻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우연히 예수님 만나서 구원을 확인하고 메시아를 만났다는 감격으로 인해 사마리아로 들어가서 전도했다는 사실만이 그녀에게서 찾을 수 있는 감격입니까?

물론 빼놓을 수 없는 감격이며 교훈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이 여인에게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도전이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4:19-20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여인이 아무리 삶에 찌들려 있었고남성들에 의해 잔인하게 버림을 당하는 아픔을 갖고 살았다할지라도 그녀에게는 예배에 대한 사모함을 놓지 않고 있었다는 점에서 짜릿한 감동과 동시에 나를 부끄럽게 하는 신앙의 면면을 발견하게 합니다.

예수께 그녀가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과 후손들은 그리심이라는 산이 성산이라고 생각하여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당신들의 조상과 후손들은 시온산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옳습니까?

그녀가 예수님께 공간적 예배 장소에 대한 민감함을 호소했다는 것은 수가성 여인이 아무리 굴곡진 운명을 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예배에 대한 정신만큼은 흐트러짐 없이 갖고 있었다는 점을 방증해 줍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여인에게 주군께서는 공간적인 예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태도와 정신에 대해서 올바른 지도를 해 주신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요한복음 4:21-24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4:21-24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펜데믹이 시작된 지 이제 1년 9개월을 지나고 있습니다.

펜데믹이 가져다 준 신앙적 폐해가 너무 많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지만 그래도 가장 심각한 타격을 하나만 추출하라고 하면 예배 무시입니다.

예배를 무시하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예배가 상실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리더반과 구원 그 이후 반에서 집요하게 탐독하며 씨름했던 책이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께서 쓰신 구원 그 이후‘ 라는 기독교문서의 장기 베스트셀러입니다.

이 책 1장에서 저자는 구원 받았다고 설레발치면서도 더 이상 구원 받은 자로서 성장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서슬이 시퍼런 비수를 날립니다.

그래서 이 책을 사람들이 읽기 싫어합니다.

박 목사께서 이렇게 카운터펀치를 날립니다.

신앙인의 최고의 약점은 성숙에 대한 갈등 속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우리는 해낼 수 없는 상황 속에 있고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한 약속을 해 놓았다는 그 꿰어 맞출 수 없는 출발선과 결승선을 갖고 있는 갈등이 없는 것입니다.” (박영선, “구원 그 이후”, 새순출판사, p,28.)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극복하지 못할 신앙의 내용이 없다는 것을 동시에 알려준 교훈입니다. 

문제는 그런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고도 더 이상 나에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라는 영적인 요구에 전혀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는 무감각이 우리들로 휘감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로 인해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 전혀 갈등하지 않는 미성숙의 주인공으로 서 있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는 점입니다.

박영선 목사의 갈파를 이재철 목사의 지론대로 적용하자면 이렇게 영적으로 치열하게 갈등하며 몸부림치지 않는 자들은 생령이 없는 동물과 똑같이 본능에 충실하며 사는 반수반인이 된 괴물로 살고 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자위하며 만족하는 어처구니없는 명목적 신자로 버티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예배드리기 과목을 교양 선택과목으로 수강신청 했는데 너무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고 만족해합니다.

이런 자들의 공통분모를 박영선 목사는 소개한 책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제가 예배는 봐 드리겠습니다물론 십일조도 바쳐드리겠습니다그 대신 제게 말도 안 되는 요구는 하지 마십시오저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는다든가영광 존귀로 관을 씌워준다던가 하는 것으로 저를 골치 아프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다만 내가 죽으면 천국이나 보내주시고 그걸로 그냥 때웁시다그 대신 제가 이 정도는 해드리겠습니다.” (박영선의 위의 책, p,29)

성도가 왜 예배를 무시합니까?

예배를 통해 주어지는 감동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내 먹고 사는 문제에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예배 없이도 충분히 이 땅에서 만족하며 사는 데 뭐가 문제냐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예배가 교양 선택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본문 21-22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몇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 내가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될 때까지)

Ⓑ 이제부터는 공동체의 죄를 묻지 않고 개별적인 죄에 대해 심판 할 것이다.

Ⓒ 사계절에 구분을 주어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땅을 만들어 줄 것이다.

너무 평범한 주님의 제시함으로 보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가 살아가야 할 땅에 대해 하나님은 최적화를 보장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제 정말로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하는 교훈을 마지막으로 교우들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세 가지의 약속은 노아가 드린 예배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과 교제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인간과 교제하며 말씀하시는 통로를 교양 선택과목으로 이수하려는 자들이여예배를 무시하지 마십시다.

예배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의 공통점을 류호준 박사가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 두란노,p,17)

ⓐ 예배를 공연화해주기를 바란다.

ⓑ 예배가 무거운 예배가 아닌 가벼운 예배가 되기를 바란다.

ⓒ 예배를 통해 값싼 은혜가 마구 쏟아지기를 고대한다.

ⓓ 예배를 통해 구원의 개인화와 믿음의 공로 사상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한다.

ⓔ 예배를 통해 시대적 정신에 야합하는 것에 눈감아 주기를 바란다.

ⓕ 예배에서 사라진 제자도를 다그치지 말고편의주의를 말해 주기 바란다.

 

류 박사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교회 안에 있는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라고 정의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본문 20-21절 전반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예배는 나 좋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펜데믹 이후 나 좋은 예배를 드리는 교회 안의 무신론자들이 수두룩하고그것에 눈감아 주며 예배 드려주는 것만도 감사하다고 눈치 보는 목회자들도 비일비재한 아픈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배는 드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내 죄악 된 껍질을 다 벗겨내고나의 죗성을 성령의 불로 다 태우며 새롭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번제입니다.

이런 예배만이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예배이며우리는 그렇게 예배를 드릴 때 노아에게 주셨던 복의 대상자들이 되는 것임을 명심하고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이 아닌 신실한 예배자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