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8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마흔 네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11:10-26 제목: 왜 셈만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그리고 다윗에서 예수님까지의 족보를 열거하고 있는 마태복음 1장이 재미없는 것처럼 창세기 11장도 재미가 있을 리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책이 족보일 것입니다. 저의 족보인 조선 성종의 9번째 아들인 전주 이씨 익양군 파의 족보를 언젠가 한 번 보다가 제가 익양군의 몇 대 손인가 만을 확인하고 책을 닫았습니다. 재미가 없다, 없다 족보만큼 재미없는 책은 정말로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오늘 본문의 이름들은 발음을 하기조차 힘든 이름들이니 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기자인 P기자가 굳이 셈의 족보를 10:21-31절에서 소개된 족보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재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복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무언가를 두 번씩이나 중복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나 의미가 있다는 말로 해석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면서 오늘 본문 연구를 시작하십시다. 원역사의 마지막 장인 본문 10-26절에 셈의 족보만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야벳과 함의 족보는 배제되고 셈의 족보만 기록되었을까요? 그 답은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1) 셈의 족보만 다시 남긴 이유는 이스라엘을 택한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25-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본문의 편집자인 P기자가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시기 위해 선택한 존재임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P 기자는 아브람의 출생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 메시지를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아브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가 어느 족보에서 기원했는가를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익숙히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람을 택하셨습니다. 이렇게 택한 아브람이 이스라엘의 조상이었음을 대단히 의도적으로 창세기 P기자는 알리고 싶었습니다. 어떻게요? 우리는 이미 10장 텍스트에서 이 내용을 공부했습니다. 10:21절을 복기합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 본문 15-16절을 읽겠습니다.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에벨은 셈의 4대손입니다. 이후 에벨이라는 족보의 6대손으로 탄생하는 자가 아브람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P기자는 셈의 4대 후손인 에벨을 소개했고, 에벨의 6대 후손인 아브람을 강력하게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에벨’을 이토록 중요하게 거론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미 이전 설교를 통해 보았던 이희학 교수의 해석으로 한 번 더 에벨의 이해를 돕겠습니다. “에벨이라는 이름을 직역하면 ‘걸어가는 사람’으로 히브리어 ‘이브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고유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셈의 후손에게서 이스라엘이 탄생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희학,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창세기 1-11장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p,276)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이 바로 셈의 계보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왜 이토록 아브람에게 목을 매는 것일까요? 너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이스라엘(아브람)이 선택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셈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에벨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아브람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셈을 택하셔서 그의 족보를 통해 에벨이 탄생하게 하셨고, 이후에는 아브람도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그렇게 선택되어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그리신 인류 구원의 통로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선택된 것입니다. 이렇게 적용해 보십시다. 오늘 이강덕 목사와 세인 교회 지체들이 구원사의 한 획을 긋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사의 한 획을 긋겠다고 하나님께 선언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길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택하신 것도 주님의 전적인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사의 도구로 나를 택하셔서 철저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나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것도 주권적인 은혜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이 찬양의 가사는 정답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이 땅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 은혜 노파심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찾아오셨습니다. 노아의 아들 세 명 중에 셈을 택하셨습니다. 그 셈의 계보로 탄생할 에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보로 또 탄생할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람의 계보로 훗날 탄생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이 계획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십니다. 왜 셈입니까? 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나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대강절을 보내고 있는 어간, 우리는 또 하나의 찬양을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2)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행하셨음을 알려줍니다. 창세기 9:1절을 먼저 읽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한 구절 더 봅니다. 창세기 9:7절입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언약을 주시며 축복하셨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노아의 연수를 950세까지 향유하도록 하셨습니다. 창세기 9:28-29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노아는 홍수 이후 350년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정립합시다. 오늘 본문 10-26절까지의 걸린 연수가 320년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도식이 성립됩니다. 홍수 이후 노아가 350년을 더 살았고 셈에서 데라까지 걸린 연수가 320년이라면 노아가 살아 있었을 때 아브람이 탄생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P기자의 어떤 의도가 보입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내용을 눈으로 보게 하셨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셈의 계보를 통해 당신이 약속하신 언약을 이행하시며 성취하심은 물론, 그 약속의 대상인 노아에게 그의 생명이 있을 동안 성취시키신 주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민수기 23:19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셈의 족보를 여기에 두 번째로 열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선언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언약하심과 말씀은 신실합니다. 본문은 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언약만 그런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언의 모든 말씀은 하나도 치우침이 없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감흡(感吸) 할 따름입니다. 시편 22편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은 숙연함과 은혜 등등의 복합적입니다. 7-8절을 읽습니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우리는 시인의 탄원을 신약에서 만납니다. 마태복음 27:39-42절을 소개합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입술로 전하는 선포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를 숙연하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분의 삶의 전 영역을 통해서 실천되고 행해집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후대에 기억될 만한 선배가 되라는 격려를 발견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셈에서 데라까지 10대입니다. 동시에 10대의 연수는 불과 320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셈의 족보 관찰을 통해 해석하고 싶은 내용이 보여 교우들에게 전합니다. 셈의 족보에서 눈 여겨 볼 이름이 있습니다. 셈, 에벨, 데라, 아브라함입니다. “셈의 5대손인 벨렉은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팔리가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벨렉의 아들 르우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단지 이곳에만 나오는 이름인데 아마도 앗수르 비문에 나오는 루우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루우의 아들 수룩은 하란의 서부 지역에 있는 사루기이며, 스룩의 아들 나홀은 역시 하란 근처의 틸 나히리를 가리깁니다.”(이희학의 위의 책, p,294.) 똑같은 셈의 후손들인데 이들의 정보는 허접하기 짝이 없습니다. 별로 역사의 흐름 속에 선한 영향력을 제시한 내용이 없습니다. 이들의 정보는 단지 어느 지역에 살았더라가 전부입니다. 반면, 셈은 달랐습니다. 셈은 에벨 온 족속의 조상이라고 창세기 기자가 적시합니다. 이스라엘의 뿌리라는 의미입니다. 그 중간 매개가 에벨이었습니다. 그러니 에벨도 의미 있는 자로 기록된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을 드렸지만 아브람은 구속사의 도구가 되는 주인공으로 발탁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은혜 중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났다면 후손들에게 선한 영향력과 이름을 남기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행전 1:17-18절을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12명의 제자 중에 탈락된 유다를 정의한 역사의 기록입니다. 이렇게 비극적인 이름으로 남아서야 되겠습니까? 마가복음 14: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 그 집에 들어와 예수께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주님께 부은 여인의 행위를 보시고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후배들에게 이런 선한 이름을 남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셈뿐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임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후배들에게 선한 선배의 흔적을 남기라고 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두가 이런 승리의 삶을 살아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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