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3일 수요기도회 설교 (요한복음 36번째 강해) 본문: 요한복음 5:16〜18 제목: 아버지가 일하시는데 서론)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 너의 영혼 우리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몇 번을 불러도 참 귀한 찬양이며 영혼을 행복하게 해 주는 찬양인지 모릅니다. 이 찬양을 교우들에게 전염시킨 가수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송정미 사모입니다, 언젠가 송정미 사모가 기독교 텔레비전에 나와 간증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회자가 질문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은혜로운 찬양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지요?” 그러자 송정미 사모께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제 마음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 노래를 들으면서 그분이 기뻐하신다는 확신도 가집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최고의 분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노래합니다. 이것이 제가 노래하는 이유이며 노래하는 철학입니다.” 송정미 사모의 인터뷰 답을 듣다가 너무 귀하고 귀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오롯합니다. “최선의 것을 최고의 분께 드린다.” 기실,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송정미 사모의 이 고백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이 말이 멋있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렇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적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까? 그 이유는 너무 명확합니다. 내 믿음의 주군이신 야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을 주목하십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본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강해에서 베데스다 연못 근처에서 38년이나 기숙하면서 행여나 모를 자기 질병 치유를 위해 요행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참 무능했던 주인공을 만나 보았습니다. 이미 살핀 대로 38년이나 누워지내야 했던 무능력한 이 사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또 전적인 은혜로 그 지긋지긋한 병마에서 치유 받는 놀라운 은혜의 주인공이 되었음도 살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치유된 과정을 통해 우리 독자들이 인지한 은혜는 인간이 무슨 자격이 있어 구원을 받은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구언 받음은 그냥 은혜였는데, 그 은혜에 대해 감사와 감동의 시선이 아니라, 비딱한 마음을 갖고 못마땅한 태도를 보인 괴물들이 있음을 요한복음 5:10절에서 만났습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여전한 소회입니다.
김기석 목사의 글에서 이 문장을 만났습니다.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김기석, 『당신은 바다에 많은 길을 내시어도』, 꽃자리, 106쪽)
정말로 그런 것이 분명합니다. 38년이나 병마에 시달리던 환자가 베데스다 연못 즉 자비의 집이라고 호칭하는 곳에서 말 그대로 자비의 은총으로 치유를 받았는데, 그 은총 받음에 대해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류들(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은 물론, 그 병을 고친 사람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반응했다고 요한복음 기자는 보고합니다. 왜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일어난 것에 대해 박수를 쳐 주지는 못할망정 그를 비난하며 야단쳤을까? 12절입니다.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노골적으로 38년 된 병자를 일어나게 한 장본인이 누구인가를 따져 물으며 병 고침을 받는 자와 병을 고쳐준 자를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유대인들이 보였음을 본문에 고발합니다. 왜 유대인들이 반발했습니까? 답을 위해 주석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 불평은 미쉬나 율법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Shabbath 7:2절을 보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일의 종류는 어떤 물건을 한곳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까지 포함하여 40여 가지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을 자리에 눕혀 운반한다면 그는 그 자리 때문에 책망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리는 부차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리 위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을 운반하는 사람은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예수 자신이 안식일 법을 위반했다고 고발당하지 않았다. 예수가 지적당한 이유는 그는 단지 다른 사람을 범법으로 이끌었다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C.K 바레트,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 410〜411쪽) 듣고 보니 어떻습니까? 미쉬나 율법은 사람을 위한 율법이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의 근간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율법을 위한 율법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게 하는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엿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책잡은 이유이자, 심지어는 병 고침을 받은 이까지 함께 엮어 비난한 이유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조직을 지탱하기 위한 법, 기득권 종교의 테두리를 강화하기 위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종교의 존재 이유인데도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본말전도의 왜곡된 법이 하나님으로 둔갑 된 어처구니없는 유대인들의 폭력을 본문이 고발합니다. 이런 살벌한 기득권의 폭력으로 압박하는 정황에 주님이 마주쳤습니다. 16절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이 구절에서 ‘박해하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디오콘’의 문자적인 의미는 어느 한 곳에 물리적인 압박을 가함으로써 그곳에 있는 누군가를 떨어져 나가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폭력적 수단으로 그룹에서 어떤 이를 왕따를 시킨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유대 사회 공동체에서 매장하겠다는 일념으로 핍박한 것입니다. 사정이 이 정도 되면 굴복하는 게 일반적인 상례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물리적 폭력에 대해서 더 과감하게 저항하셨습니다. 본문 17절을 눈여겨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이 선언하신 이 메시지는 대단히 엄숙하고 장엄한 선언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생략한 단어를 『메시지』 번역은 첨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스스로 변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신다. 그러니 나도 일한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위한 안식일로 제정한 유대 율법적 기존 제도에 항거하시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임을 분명히 선포하시면서 조금도 그들의 위협에 물러서지 않고 17절에서 사자후를 발하셨던 것입니다. 17절은 두 가지 의미에서 강력한 신학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동등하심 ② 하나님의 권위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곧 ‘나’라는 예수님의 엄위하신 선언이 17절에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용인할 리 없습니다. 선교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발언에 대해 극도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의 발언은 구약 성경의 핵심적 단언인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시니’ 따라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명령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 앞에 두지 말지라’는 율법에 대해 정면 공격이다. 한 인간이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 됨으로 삼은 것은 궁극적으로 신성모독이고 이 문제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레슬리 뉴비긴, 『요한복음 강해 』, 96쪽) 이런 유대적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유대인들은 본인들의 율례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예수에 대하여 극도의 경계심을 갖고 그를 죽이고자 결의하였음을 18절에서 보고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상 본문에서 제시한 예수님과 유대인 간의 갈등 및 긴장 관계에서 특히 좁혀지지 않는 이견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이 일하시는 나도 일한다고 선포한 예수님의 그 발언, 즉 하나님의 일하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를 오늘 강해를 통해 살펴보는 일은 매주 중요한 공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찾아오셔서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를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붙잡기 위해 바디매오처럼 소리를 질렀습니까? 아니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귀신 들린 딸아이를 고침 받기 위해서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시험을 이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몸부림을 쳤습니까?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공허함 때문에 주님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는 심정으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와 같이 주님을 사모했습니까? 아니요,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12년 동안이나 하혈이 멈추지 않는 지긋지긋한 병마 속에서 주님의 옷 자국이라도 만지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 나왔습니까? 아니요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38년 된 병자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가셨습니다. 전혀 자격도 없고 상응하는 믿음도 없는 그에게 가신 주님이 그 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을 던진 주님에게 병을 치료해 주겠다는 영적 감동이나 고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전혀 하지 않았던 그에게 주님은 전적인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9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은혜를 장로교회 신학의 기초를 마련한 존 캘빈이 말한 용어를 굳이 빌린다면 이것이야말로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itible grace)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하심은 자격 없는 내게 주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신 일하심입니다. 이 일하심은 여전히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어떻게요? 이제는 성결교회 신학적 조망으로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매일 찾아오셔서 나를 독려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히브리서 3:12〜14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찾아오신 주님의 일하심 때문임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스스로 잘났고, 명예가 있고, 돈이 많고, 신앙적인 경력이 오래되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여전히 찾아오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역이고 일하심이었습니다. 마태를 찾아오셨고,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귀신 들린 자를 찾아오셨으며, 나환자를 찾아오셨고, 앉은뱅이를 찾아오신 주님은 오늘은 죄 많은 나를 찾아오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2. 주님은 주님의 로드십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위해 일하십니다. 17〜18절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서슬이 시퍼런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 유대 종교의 기득권에 굴복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무소불위의 유대 종교 권력의 거대한 폭력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존재할 수 없었던 무시무시한 시대였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저들의 폭력과 폭거에 주눅 들지 않고 물러서지 않은 이유는 주님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를 포기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주님의 주님 되심 즉 로드십에서 물러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게 주님의 일하심이었습니다. 저 역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고 고백하는 이유 중에 가장 뚜렷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혹은 하나님이 아들이 상황에 따라 마음이 바뀌거나 굴복하는 존재라면 그분을 어떻게 내 구주라고 고백하며 따를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애굽의 바로에게로 가라고 명령하는 하나님께 질문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너를 보낸 자가 누구인가?”라고 바로가 질문하면 뭐라 대답해야 합니까? 야훼 하나님께서 이렇게 질문한 모세에게 답하신 말씀이 출애굽기 3:13〜14절을 소개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메시지』로 읽겠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면, 그들이 제게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너는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여라.” 공동 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라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이 구절들이 시사하는 신학적 함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간 그 어떤 존재에게도 휘둘림을 당하지 않는 자존자이심을 천명한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위치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주님 되심은 우리에게 절대적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심은 나를 위해 일하심에 있어서 무섭도록 강직한 신뢰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한 번도 신실하지 않으신 적이 없어 나를 돕고 계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나는 변덕이 죽 끓는 것처럼 신실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이 베데스다 연못에 있었던 38년 된 병자를 위해 일하셨던 것처럼 나를 위해 오늘도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언젠가 책에서 본 고전 같은 조크가 하나 있습니다. 서울에 가면 탑골공원이 있습니다. 노인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 나이가 훨씬 더 많아 보이는 노인이 옆에 있는 나이가 어린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어디 초등학교를 졸업했나?” 그러자 노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데 교가는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그래. 그러면 자네 그 교가 한번 불러보지.” 그러자 나이가 적은 노인이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노래를 듣고 있던 나이가 많은 노인이 무릎을 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맞다. 이 친구야, 맞아 그 노래가 우리 학교 교가였지. 그러고 보니 우리가 동문이구먼.” 인간은 나이가 들면 정체성이 흔들릴 때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정체성을 결코 잃어버리시거나 잊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나와 그대를 위해 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 주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어리석은 변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의 일하심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심같이 주님도 일하셨사오니 주님, 나도 주님처럼 주의 사역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이후로도 영원토록/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기도 제목) 1) 주님,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나도 주님을 위해 일하게 하옵소서. 2) 주님,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빛과 소금의 사명 감당하게 하옵소서. 3) 주님, 주님을 향한 믿음이 외부적 환경으로 인해 변하지 않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