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6일 수요일 셋째 날 설교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본문: 사도행전 3:1〜1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성취하시고 약속대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40일간을 함께 계셨습니다. 이후에 승천하시기 전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시고 그 말씀 그대로 오순절 다락방에서 열두 제자와 약 120명 정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직후 이른바 사도들의 성령행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실수투성이었던 베드로와 요한 역시 이제 완전히 성령에 사로잡힌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을 경험하고 드디어 초대교회의 결정적인 사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한 뒤에 철저히 예수께 사로잡힌 종으로서 예루살렘의 주변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맹세하면서까지 부인했던 베드로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에 이런 힘 있는 설교를 선포하기까지 합니다. 사도행전 2:36-38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완전히 변화된 사도 베드로는 그의 동료인 요한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때에 선천적으로 앉은뱅이가 된 사람들이 그 당시 여인들과 이방인 중에서 개종자들만이 들어가는 성전 구석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는데 성전으로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을 걸인 앉은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3:3절입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보고’라고 번역한 헬라어 ‘이돈’(ἰδὼν)은 그냥 ‘목적이 없이 보는 것’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구걸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을 본 것입니다. 걸인이 가지고 있던 것은 구걸하는 방법, 습관, 구태 등등이었습니다. 참 비극입니다. 사도행전 4:22절은 앉은뱅이의 나이를 보고합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무려 40년 동안 무목적, 무의미, 무방향을 갖고 살아온 비극적인 인생이 이 사람이었습니다. 김준곤 목사께서 현대인이 갖고 있는 육무주의(六無主義)를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무목적, 무감각, 무감각, 무책임, 무주의, 무도덕이 바로 그것입니다. 걸인은 이 여섯 가지 중에서도 무목적의 인생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목적으로 구걸하고 있는 현장에서 분명한 목적을 갖고 성전으로 올라가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베드로가 본문 4절에서 아주 의미 있는 선포를 합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여기에서 ‘보라’라는 단어는 헬라어 ‘블레폰’(Βλέψον)은 ‘뚫어지게 응시하다.’라는 뜻입니다. 걸인인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습관적으로 보며 구걸했습니다. 주면 고맙고 안 주면 할 수 없고의 구걸이었습니다. 목적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분명한 목적으로 걸인에게 말한 것입니다. 분명히 줄 것이 있는 목적을 갖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 걸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본문 5절을 눈여겨 보겠습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여기에 번역된 ‘바라보거늘’의 원문은 ‘에페이켄’ (ἐπεῖχεν)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인 의미가 ‘굳게 붙잡는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 걸인의 시각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목적 없이 베드로를 보았던 ‘이돈’의 인생이 반드시 무언가를 붙들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갖게 된 ‘에페이켄’의 삶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걸인을 통해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고난주간 셋째 날에 주시는 첫째 은혜를 만나게 됩니다. 걸인이 일어난 근본적 이유입니다. ※ 보는 시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각의 변화를 영적 삶의 태도가 변화된 삶이라고 해석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패배적 인생에서 승리의 인생으로 바뀌는 결정적 요소는 영적 시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무목적인 삶이 무언가의 변화를 기대하는 삶으로 영적 질이 바뀌는 것, 바로 그것이 기적을 만들어 내는 요소입니다. 누가복음 19:3〜4절을 나눕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메시지』 번역은 아주 의미 있는 단어를 첨부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무리 때문에 시야가 가렸다. 키가 작아서 사람들 너머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예수께서 지나가실 때 보려고 먼저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갔다.” 간절함이라는 단어는 내 삶의 목적 중에 분명한 게 생겼다는 방증입니다. 영적으로 보는 시각이 바뀌는 것부터 치유는 시작됩니다. 벌써 그런 마음을 품은 자는 요한복음 5:24절의 인생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바로 이 영적인 간절함을 가졌다는 것이 치유의 초입으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걸인에게 베드로는 결정타를 던집니다. 본문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우리는 이 말씀으로 집회 세 번째 날의 은혜를 깊이 공급받아야 합니다. ※ 치유를 일으키는 결정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접목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목적 없이 살았던 앉은뱅이가 보는 시각이 바뀐 것을 직시하고, 그에게 결정적인 은혜의 밧줄을 던져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은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강력한 은혜는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을 체감하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김준곤 목사가 쓴 『예수 칼럼1』에서 이런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의 주장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생명수다. 나는 너의 빛이다. 나는 네 선한 목자여 너희는 내 양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를 믿으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난다. 나는 생명이고 부활이다.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고 영생을 준다. 나는 하나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구속의 길이며 하나님을 아는 유일의 진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원천이다. 나와 하나님은 하나다. 이 말은 태양의 존재만큼 확실한 사실이다.” (김준곤, 『예수 칼럼 1』, 순출판사, 13쪽) 이것을 알았던 누가는 사도행전 4:12절에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놀라운 능력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베드로와 요한은 걸인에게 준 것입니다. 어떤 일이 걸인에게 벌어졌습니까? 사도행전 3:7-8절을 보고합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사람들이 걸어서 성전으로 들어가던 그 부럽고 부러웠던 일을 걸인도 이제는 맛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사건을 종합하여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리를 들고 일어나는 육체적 치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할 수 있는 영적 치유를 받은 주인공이 바로 이 사람, 걸인이었다고 말입니다. 부산에서 목회할 때 평생 잊을 수가 없는 말을 당시 청년회를 인도하면서 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같이 근무하는 직원이 전도되어 나왔습니다. 청년회 예배 시간에 환영하고 소감을 들었습니다. “같이 근무하는 아무개 자매가 제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나는 예수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그녀가 직장에서 매일 웃고 상냥하고 겸손한 이유가 바로 그녀가 갖고 있는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나도 그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교회에 나왔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역동입니다. 실패의 길로 가는 자들을 승리의 길로 인도하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아무리 크나큰 문제가 있는 존재도 예수의 이름을 믿게 되면 그 문제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이런 믿음으로 무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현장에 초청하여 함께 걷는 사람은 이 찬양을 마음으로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원수가 날 방해해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영과 육이 치유 받는 간증이 여러 교우들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원수가 날 방해해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지존하신 이름 앞에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모두 무릎 꿇고 다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엎드려 절하세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하나님의 영으로 경배드리리 기도 제목)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듦으로 전인적 치유를 맛보게 하소서.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작금 내 삶의 가장 어려운 일에서 일어서게 하옵소서.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삶과 내 가정의 문제가 치료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