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2025년 4월 9일 수요 기도회 설교: (요한복음 35번째 강해)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2025-04-09 12:59
작성자 Level 10

202549일 수요 기도회 설교 (요한복음 35번째 강해)

 

본문: 요한복음 5:9(2f)-18

제목: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서론)

 

지난 주간에 친구 목사 부친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소천하셔서 화장 예식이 진행되는 용인의 모처에 있는 화장장에 방문해서 친구를 위로했습니다.

친구 아버님의 시신을 소각로에 입실시킬 때 친구는 그동안의 회한으로 인해 애절하게 울었습니다.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기에 장수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의 육신적 이별은 아프고 또 아프기에 친구의 울음에 위로를 허락해 달라고 화살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윽고 화장이 완전히 끝나려면 1시간 30분 남짓 시간이 요구되기에 점심 식사 후에 잠시 자리를 같이 한 친구 목사들과 환담하는 데 저쪽에서 흐느끼며 들어오는 또 한 그룹의 조객들이 보였습니다.

화장장으로 들어오는 그 그룹이 유난히 곡()을 많이 하기에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왜 그 그룹이 그토록 애절하게 곡()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장례 그룹이 들고 있었던 영정 안에는 앳되고 앳된 중학생 학생의 얼굴이 들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팀을 보며 말했습니다.

살면서 이런 일은 절대로 당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인생이라는 삶의 항로에서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는 우리 인간이 항해하는 과정을 가리켜 고해(苦海)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인생이라는 삶의 길이 고된 삶의 연속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생로병사가 바로 고해의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38년이라는 긴 세월, ()의 과정에 있었던 한 사람을 극적으로 치료해 주신 예수님의 치유 사건 그 이후를 보고한 요한복음 저자의 후일담입니다.

이제부터 살필 후일담은 오늘 성경을 읽는 저와 여러분에게 아주 의미 있는 영적 성찰을 하게 해 주는 좋은 텍스트입니다.

본문 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본론)

 

예수께서는 조금도 신앙적이지 않은 38년 된 병자를 전적 은혜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신앙적이지 않았던 이 사람에 임한 치료는 말 그대로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이 은혜가 일어난 본문에 왠지 모를 염려를 하게 만드는 뉘앙스의 구절을 요한복음 기자가 9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안식일이라는 표현이 왠지 불길한 예감을 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1012절에서 그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알려줍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베데스다 못에서 극적으로 고침을 받은 그 사람에게 너를 안식일에 치료해 준 사람이 누구냐고 유대인들이 공격적으로 질문합니다.

이 본문에서 보고한 유대인들은 유대교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유대교 신자들은 유대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지키는 율법의 대강령이 있습니다.

이 강령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마태복음 22:3540절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과 율법사가 나눈 토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제시한 두 가지 계명의 출처가 구약 성경 어디를 근거하고 있습니까?

첫째 계명은 신명기 6:5절에 기록된 수직적 계명을 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둘째 계명은 레위기 19:18절이 제시하고 있는 수평적 계명에 근거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목숨처럼 지키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38년 동안이나 고질적 질병에 허덕였기에 인생이라는 고해 바다에서 항해할 수밖에 없었던 환자가 일어나 걷게 되었는데, 그 치유를 기쁜 마음으로 박수 쳐 주지는 못할망정, 해괴하고 기괴한 망동을 그 환자에게 보이며 윽박지르고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네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걷는 게 옳지 않다. 너를 이렇게 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냐?”

그들이 신봉하고 따른다고 떠벌이는 하나님이 제시한 둘째 계명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이율배반을 본문 1012절이 고발하고 있는 셈입니다.

둘째 계명의 무시는 곧바로 첫째 계명도 무시하는 처사임을 모를 리 없는 저들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병을 낫게 해 준 작자가 누군지에 대해 캐묻고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은 이런 괴물로 변질되었을까요?

답을 잠시 유보하고 또 한 사람을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유대적 신앙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기적을 베푸는 예수가 아주 못마땅했습니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38년 된 환자를 고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악다구니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감정적 불만을 쏟아내도 괜찮은 대상으로 병에서 고침을 받은 이를 택했습니다.

너를 고친 자가 누구인지 이실직고하라는 집단적 압박에 겁을 먹은 이 환자는 나는 나를 고친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항변했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저는 이 구절에 대한 진정성을 이해합니다.

놀랍기는 한 일이었지만, 예수가 자기를 고쳤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병에서 고침을 받은 환자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어진 1415절은 본문을 해석하고 있는 저를 적지 않게 실망시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병에서 나음을 얻은 이 사람이 성전에 올라갔다가 병으로 인해 누워 있던 시절에 자기를 찾아와 자기의 고질적 중병을 고쳐준 바로 그 사람,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만난 뒤에 이렇게 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였던 주후 1세기에는 육체적인 질병의 시작이 영적인 범죄로 인해 출발했다고 여겨지던 시기였기에 예수께서도 환자였던 그에게 이렇게 충고하신 것입니다.

더 심한 중병에 걸리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충분히 이해되는 주님의 권면입니다.

그렇다면 병 고침을 받은 이 사람은 주님의 권면에 아멘하고 이제부터 그렇게 성결한 삶을 살아내면 그의 인생은 아름다운 후반전을 살아낼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권면이자 경고성 충고를 받은 이 사람의 행보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반응이었습니다.

15절입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자격이 없지만 전적으로 은혜를 받은 이 사람의 행태는 배은망덕한 행태였습니다.

자기를 고쳐준 사람을 유대인들에게 알려주는 만행이었으니 말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고 할 정도로 배은망덕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물리적 핍박과 심리적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핍박에 굴하지 않으시고 자기가 해야 할 하나님 아들로서의 행보를 이어가셨음을 오늘 본문이 제시합니다.

마지막 1618절을 나누겠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의 고자질로 인해 주님이 당하신 고통은 살해 위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아버지가 일하니 나도 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하시며 당신의 사역을 이어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천명하신 주님의 말씀은 다음 강해 시간에 자세히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두 종류의 부류를 소개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이고, 또 한 사람은 중병에서 고침을 받은 환자입니다.

하지만 두 종류의 부류들에게서 공이 나타나는 분모가 있습니다.

괴물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자라는 공통 분모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반율법적 행태를 보인 괴물들이었고, 병 고침을 받은 환자는 은혜를 무시하고 도리어 자기를 위해 예수를 고발한 배은망덕한 괴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런 괴물들로 변질되었을까요?

왜 이들은 이런 괴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내 삶을 해석할 수 없는 불 신앙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불 신앙자들의 삶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삶을 삽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해 자기들의 세속적 이권을 챙기는 아주 질 나쁜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소양으로 취사 선택되는 모양을 취합니다.

그러니 이들은 하나님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쉬운 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뜻대로 살지 않으니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도 철저히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사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해석할 수 없는 쓸모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사기 12:8-15절을 읽겠습니다.

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이 본문에서 소위 소 사사라고 지칭되는 세 명의 사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입산, 엘론, 압돈이라는 사사입니다.

이들은 8번째 사사였던 입다의 끔찍했던 시대를 지나 그가 죽고 난 뒤에 사사의 직을 이어받았던 9, 10, 11대 사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세 명의 사사들의 공적 보고는 불과 8절에 불과합니다.

입산 사사의 이력은 아들 30, 30명을 두었는데 딸들은 밖으로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해서 밖에 있는 여자 30명을 데려왔으며, 그렇게 사사로 7년이라고 세월을 보냈다고 사사기 기자는 보고했습니다.

엘론 사사의 이력은 그가 스불론 출신이었고, 10년 동안 사사의 직을 감당하다가 죽어 아얄론에서 장사 되어 묻혔다고 보고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등장한 압돈 사사는 아들 30명과 손자 30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린 나귀 70마리를 탈 정도로 부유한 삶을 살았고, 이스라엘의 사사로 8년 동안 있다가 비라돈에 장사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사들이 남긴 행적에 대해서 제 졸저에서 이렇게 혹평했습니다.

입산은 입다가 죽은 후, 혼란스러웠던 이스라엘을 위해 아들딸을 정략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혼인을 시켜 정국 안정을 도모했다.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엘론이 사사의 직을 이어받았는데 1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그가 죽자 압돈이 직을 이었는데 그는 아들, 손자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다가 역시 죽었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Ⅰ』, 351)

제가 쓴 글에 담은 세 사사들의 흔적은 그들이 보여준 부끄러운 이력이지, 하나님이 해석한 해석적 삶의 내용이 아닙니다.

훗날, 삶의 이력을 그럴듯하게 써서 하나님께 제출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까 정말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

그날이 왔을 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 예수가 38년 된 환자를 안식일에 고쳤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오늘 본문에 등장한 병에서 고침을 받은 환자에게 그날에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를 고친 사람이 내 아들 예수, 그가 너에게는 어떤 존재냐?”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맺고 살지 않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그날에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내 아들 예수와 너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느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해석 내용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아주 가끔, 대단히 아쉽고 슬퍼지게 하는 구절을 발견합니다.

실례 하나를 들겠습니다.

사무엘상 8:13절입니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성경의 내적 보고입니다.

사무엘의 아들 두 명의 이름이 거론되었습니다.

장자는 요엘 (야훼는 하나님이시다.)이고, 차자는 아비엘 (나의 아버지는 야훼이시다.)입니다.

이런 귀한 이름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무엘은 자기 아들들이 이렇게 이름답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들의 이름을 작명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8:12절입니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하지만 아버지 사무엘의 간절한 소망과는 전혀 다른 비신앙적인 삶을 살아냈던 비극의 아들들이 요엘과 아비엘이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바로 3절이 요엘과 아비엘이 보여준 하나님께 해석된 삶의 내용입니다.

아버지 사무엘이 갖고 있었던 야훼 하나님 신앙과 그의 아들들이 보여준 조금도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았던 불신앙인 요엘과 아비엘의 행보가 의미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신앙이 얼마나 철저하게 개인의 삶에서 어우러지는 인격적 반응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삶의 해석 내용은 오늘도 내가 쓰는 것이지, 부모가 써주는 것도 아니요, 그 누군가가 대신 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대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지지는 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전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여 자기들의 삶을 하나님이 해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중보 하는 일뿐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설교를 마치며 마지막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온 삶의 해석을 긍정적으로 하는 이는 과연 누구일끼요?

이재철 목사께서 내린 지침의 글 하나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교회는 버리기 위해 오는 곳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자, 자신을 포기할 줄 아는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접붙일 수 있는 자, 그 사람만이 영원한 사람, 영원한 영의 사람, 영원한 진리의 사람, 사람을 살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이 목사께서 제시한 이 사람들을 그날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이 살아온 나날에 대해 긍정적으로 해석하시고 그들을 환영해 주실 것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하나님이 내 삶을 해석할 수 있는 신앙의 삶을 오늘 살아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D-KEY)

 

신실하게 진실하게

 

신실하게 진실하게/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 주소서/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목마른 사슴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금보다 귀한 나의 주님 내게 만족 주신 주/당신만이 나의 기쁨 또한 나의 참 보배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