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34번째 강해) 본문: 요한복음 5:1-9(1f) 제목: 찾아오신 주님 서론) 바울의 여정을 탐방했던 소아시아 성지 순례 때 튀르키에 차낙칼레 해협을 건너 입살라 국경 검문소까지 가는 배 안에서 보았던 광경이 있었습니다. 따라오는 갈매기들이었습니다. 갈매기들이 따라오는 이유는 관광객들이 던져 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서였습니다. 갈매기들의 과자 쟁탈전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갈매기들의 몸이 대단히 비대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갈매기들은 천근만근의 몸이었습니다. 갈매기들은 바다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사냥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쉬운 방법인 관광객들이 던져 주는 먹이 먹기를 선택했기에 덜 비행하고 움직이는 그들은 몸이 비대해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광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 신앙의 자화상이 혹시 갈매기들처럼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갈매기들이 본질을 상실하고 비본질적인 일에 천착하며 살았기에 몸이 비대해진 것처럼, 나 또한 신앙의 본질을 잃고, 비본질적인 일에 목을 걸어 영적으로 비정상적 상태로 변질되면 어떻게 하지? 생각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긴장했던 기회를 가져보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언제든지 나도 그대도 이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본론)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38년 된 베데스다의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그 병에서 고침을 받는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거의 갈릴리에서 생활하셨는데 오늘 본문은 드물게 활동하신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를 이렇게 1절이 밝혀줍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여기에 기록된 명절을 학자들은 유월절이나 혹은 초막절이라고 설왕설래하며 갑론을박합니다. 그러나 그 명절이 무슨 명절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차치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찾아가신 곳입니다. 2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양문’(羊門)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프로바티케’(προβατικῇ)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양이 다니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 「Living Bible」에서는 이 단어를 ‘Sheet Gate’로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느헤미야 총독이 대제사장 엘리아십에게 우선순위를 두고 재건하라고 명한 장소가 바로 이 양의 문이었습니다. 무너진 제사의 회복이 가장 시급한 영적 우선순위임을 제시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3:1절입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그만큼 양의 문은 유대 종교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렇게 재건된 양의 문이 있던 장소가 약 500년 지난 후에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를 본문 3절이 알려줍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베데스다’라고 명명된 연못이 양의 문 옆에 있었다고 보고합니다. ‘베데스다’라는 히브리어는 ‘벧’ 즉 ‘집’이라는 단어와 ‘데스다’ 즉 ‘자비’ 혹은 ‘은총’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인데 번역하면 ‘자비의 집’, 혹은 ‘은총의 집’이라는 뜻이 됩니다. 양의 문이 있었던 연못, 베데스다는 자비가 이루어지는 곳, 은총이 내려앉는 장소라는 소문으로 예루살렘은 물론, 이스라엘 전역임 잠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은총이 임하는 장소인 ‘베데스다’로 각 종의 병자들이 5개의 행각에 모여들었고 그곳에서 각기 자기에게 임한 병이 고침 받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지경이 되었음을 누가가 보고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4〜5절을 나눕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베데스다 연못가에 널리 퍼져 있는 설(說)은 그 못이 가끔 움직일 때가 있다는 설(說)이었습니다. 물이 움직이는 이유는 천사가 그 못에 내려올 때, 그렇게 된다는 설(說)이었습니다. 다만 난제는 물이 움직이는 그 못에 처음으로 내려가 물에 자기 몸을 담그는 자만이 고침을 받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이 설이라는 사실입니다. 팩트가 아니라 전해져 내려오는 픽션이라는 데에 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베데스다 연못의 다섯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바로 그 현장에 38년이나 고질적인 중병에 걸려 있던 환자가 있었습니다. 버렛은 이 환자를 마가복음 2장에 기록된 네 명의 친구들이 도움을 주어 고침을 받았던 중풍 병자로 대입하기도 하지만, 이런 적용은 취사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버렛,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 409쪽) 하지만, 본문은 이런 추측과 가설보다 더 중요한 성서적 증언을 남겨놓았다는 점에서 성경을 읽는 우리 후배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구절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설이 난무한 베데스다, 그래서 찾아온 병자들이 즐비한 인간 막장의 현장에 주님이 직접 그곳으로 찾아가셨다는 감동입니다. 베데스다를 찾아가신 주님은 그곳에서 38년이나 지난한 육체의 고통을 머금고 살아왔던 환자에게 다가가셔서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Would like to get well?) 이 질문에 관한 대답은 하나여야 합니다. “네, 낫고 싶습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이게 답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환자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반응을 내놓았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세 가지의 참담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① 내가 이렇게 고통을 끊임없이 당하는 이유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 태도가 아니라, 타인에게서 찾는 어처구니없음입니다. ② 본질이 아닌, 비본질의 설에 함몰당한 영적 재앙의 상태를 알려줍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떠도는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 설이었는데도 그 설에 함몰된 환자의 영적 기상도를 보여줍니다. ③ 문제 해결의 주체이신 주님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영적 패역함입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자화상을 본문 병자가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대단히 실망스러운 불신앙의 상대인데도 본문 8〜9(1f)절에서 예수님은 직접 일하심으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베데스다’의 본질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상대의 신앙적 정도나 유무에 상관이 없이 주님은 그에게 치유를 선포하셨고, 그 사람은 38년이나 자신을 갉아 먹은 육체, 영혼의 질병에서 해방되는 은총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본문이 알려줍니다. 말 그대로 38년 된 환자는 베데스다(자비의 집)에서 자비의 원천이신 예수님의 ‘데스다’ 즉 ‘자비’의 은총을 공급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35번째의 강해를 통해 얻게 되는 레마가 있습니다. ※ 나와 그대에게 일어난 최고의 베데스다 사건은 주께서 나를 찾아오셨다는 은혜입니다. 다시 정확하게 정의합니다. 나와 그대에게 일어난 최고의 은총은 자격 없는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만나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요한서신 강해를 나눌 때 이 구절로 인해 행복하게 감사했습니다. 요한일서 4:19절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바울도 이렇게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로마서 5:6〜8절을 살펴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영어 성경 Living Bible 로마서 5:6〜8절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무력하고 벗어날 방법이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적절한 때가 아닌 때에 오셔서 그분이 필요 없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죽어 주기를 기대하지는 않겠지만,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그분의 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When we were utterly helpless, with no way of escape, Christ came at just the right time and died for her sinners who had no use for him even if we were good we really wouldn't expect anyone to die for us though, of course, that might be a barely possible. but God showed that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감동과 감사의 메시지는 ‘주님이 먼저’라는 나를 찾아오셨다는 팩트입니다. 나중에 이런 감동의 메시지를 남긴 바울도 주님이 다메섹으로 먼저 찾아와 만나 주신 은총의 당사자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3〜6절을 아십니까?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알패오의 아들 레위, 마태가 주님을 찾아가 제자가 되겠다고 사정한 게 아닙니다. 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왕따를 당하며 손가락질을 당하며 살던 마태에게 주님이 먼저 찾아오신 겁니다. 마태복음 9:9절이 이를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나인 성에 살고 있었던 과부가 외아들을 잃게 되는 최악의 비극을 경험한 뒤에 아들의 시신을 메고 나가는 장례 행렬을 따라 눈물의 배웅을 할 때, 주님이 그 과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시신을 담은 관으로 가까이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7:13〜15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죽어있는 시체에 가까이 가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주님이 찾아가셨습니다. 디베랴에 낙향하여 고기 잡고 있던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신 것도 주님이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 중에 주님이 먼저 찾아가신 사건을 열거하라고 한다면 끝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목도(目睹)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받은 최고의 은총은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점입니다. 더 큰 은혜와 은총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몇몇 교우들에게 발송한 글은 사순절 29번째 날에 나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조명해 주신 은혜 나눔의 글입니다. 오늘 아침 묵상 텍스트는 누가복음 9:10〜17절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가셨으나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말씀을 묵상하고 난 뒤에 제게 주신 영적 조명을 이렇게 받들었습니다. “누가복음 9:1〜6절에는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신 주님의 사역이 기록되었고, 오늘 성서 일과는 제자들이 파송 받은 이후 사역을 감당한 예수께서 행하셨던 이적들을 보인 것을 시사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눅 9:6) 이윽고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친 제자들이 예수께로 돌아와서 선교 보고를 했다.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벳세다로 이동하신 뒤에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누가는9;12〜17절에서 보고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주목할 내용이 발견된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무리(無理)들은 제자들의 사역 승리와 그 제자들을 데리고 벳세다로 동선을 옮긴 예수의 이동 노선을 이미 빠삭하게 알고 그곳까지 따라왔다고 누가는 세밀하게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내가 성서 일과에 주목한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누가는 오늘 성서 일과에서 단어를 구별해 사용하고 있다. 선교 사역에 직접 참여하여 주님의 권능을 몸소 감당했던 이들을 ‘제자’ 즉 ‘마세타스’(μαθητὰς)에서 ‘사도’ 즉 ‘아포스톨로이’(ἀπόστολοι)로 이름을 변경해 지칭했다. 물론 ‘마쎄테스’나 ‘아포스톨로스’는 그 의미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지만, 그럼에도 증인(마쎄테스) 정도의 신분이었던 제자들이 이제는 ‘보냄을 받은 자’(아포스톨로스)로 상승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또 한 부류를 누가는 그대로 놔두었다. ‘무리’ 즉 오합지졸을 뜻하는 ‘오클로이’(ὄχλοι)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벳세다로 옮기는 동선에 대해 빠삭하게 꿰뚫고 있었다. 누가는 無理들이 이렇게 한 이유에 대해 예수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無理’라는 단어는 리(理)가 없는(無) 자들이다. ‘理’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도(道)를 믿는 거다. 理를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똑같지 않다. ‘제자’ 즉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믿는 이들이며 이런 이들에게 주님의 권능은 임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을 아는 자들은 따르기만 한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권능이 임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은 끝까지 無理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무리로 살 건가? 아니면 제자 즉 사도로 살 것인가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된다. 오늘 성서 일과는 내 신앙의 진면 교사로 삼을 울림 그 자체다. 오늘 아침, 오래전에 읽었던 이 문장이 오롯이 나를 타격한다. “팬(무리)은 귀에 즐거운 싸구려 복음에 혹한다. 반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전부를 잃을 수 있다. 그래도 따르겠는가?” (카일 아이들먼, 『NOT A FAN』, 84〜85쪽) 나는 이 묵상을 마치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나는 무리인가? 제자인가?” 저는 오늘도 여전히 먼저 나를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에 흠뻑 빠져 감사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곧잘 부르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라는 찬양입니다. 가사를 음미해 보면 그저 감동입니다.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내 모든 정성 내 모든 정성 주만 위해 바칩니다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이 몸 바쳐서 이 몸 바쳐서 주만 따라 가렵니다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소리 높여서 소리 높여서 주만 찬양 하렵니다 후렴) 주님 주님 나의 기도를 들으사/영원토록 주님만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도가 감사해야 할 최고의 복은 주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셨다는 은혜입니다. 먼저 오셔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먼저 오셔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먼저 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더 큰 감사는 이렇게 ‘먼저’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 엄청난 은혜를 앞으로 계속해 주실 것이라는 감동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내 모든 정성 내 모든 정성 주만 위해 바칩니다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이 몸 바쳐서 이 몸 바쳐서 주만 따라가렵니다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소리 높여서 소리 높여서 주만 찬양하렵니다 후렴) 주님 주님 나의 기도를 들으사/영원토록 주님만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