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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월 19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33번째 강해): 익숙함과 결별하라2025-03-19 12:59
작성자 Level 10

319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33번째 강해)

 

본문: 요한복음 4:4345

제목: 익숙함과 결별하라

 

서론)

 

설교 준비를 할 때, 제가 흔히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상투적으로 너무 익숙해 있는 말씀 해석은 가급적이면 피하고, 성경 본문을 거꾸로 보려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하나의 실례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살핀 요한복음 4장에 국한해 설명하자면, 사마리아 수가성으로 물을 뜨러 온 여인에 대한 해석 같은 경우입니다.

주지했다시피 전통적으로 굳어져 있는 해석은 여인은 품행이 방정하지 않아 남성 편력이 강해 수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고 바꿔치기 하는 정숙하지 못한 여인으로 정의하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꾸로 접근하는 해석이 사마리아라는 지역적, 문화적, 사회적 관습에 기초할 때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라고 하는 남성 가부장적 문화가 강했던 곳에 살고 있었던 이 여인은 여성의 인권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남자들에 의해 5번이나 버려짐을 당했지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6번째 남성과 살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설교는 해석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얼토당토않은 비본문적 해석이 아닌 것을 전제할 때, 저는 상투적 해석을 선택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제 설교 준비의 방법입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드는 것을 양해해 주기를 바라며 또 하나의 실례를 들겠습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글을 쓰려면 삶의 경험이 풍부해야 합니다.

삶의 경험이라고 할 때, 우리가 갖는 전제는 누구에게나 삶의 경험이 있다는 점을 인지한다는 것입니다.

오십 평생, 혹은 육십 평생을 산 이가 삶의 경험이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다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한 삶을 해석하는 데 상투적이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작가들은 이 점에 있어서 글을 쓰지 않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글 쓰는 이들은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을 해석함에 있어서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합니다.

김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김훈, 연필로 쓰기, 문학동네, 11)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 세상에는 슬픈 노래가 많다.” (위의 책, 31)

일찍이 시인 휘민이 이런 시어를 자기 시에 담았습니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두운 바닷속에/후득후득 차가운 눈발이 들이친다/우리가 넘기려 했던 책장에도 시린 눈꽃이 떨어진다/우리 생가슴을 열어 소금 결정이 된 너희들을 뿌린다/쉼표조차 함부로 쓸 수 없는 시/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시/그것이 너희들이기에” (휘민,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습니다.” 중에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시, 189)

세월호에 갇혀 수장된 아이를 가리켜 쉼표조차 함부로 쓸 수 없는 시,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시, 그것이 너희들이기에

시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아픔의 절정이라는 해석을 이 시에서 이렇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의 해석을 감동으로 나누려면 저와 여러분이 경계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상투성에 길들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상투성이라는 단어를 또 다른 단어로 오늘 설교 시간에 대체하려고 합니다.

상투성은 곧 익숙함입니다.

익숙함에 물드는 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익숙함에 물들면 상투적인 것에 함몰됩니다.

상투적인 것에 함몰되면 삶을 해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타성에 젖어 조금도 성장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결국 익숙함에 길들어지면 도태되고 맙니다.

그래서 프레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네가 닿지 않는 것에 선의를 갖고 대하면 언젠가 그것이 네 것이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心碑에 새겨야 할 교훈입니다.

 

본론)

 

사마리아 사람들이 요청해서 그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던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복음을 선포하신 뒤,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셨습니다.

이틀이 지나고 주님은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이동하셨습니다.

동선을 옮긴 주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445절 본문입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특히 44절은 공관복음서와 연관하여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6:16절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본문입니다.

마가복음 6장 텍스트를 전제할 때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으로 동선을 옮기시기 이전에 사역하셨던 일은 마가복음 5장에 소개한 이적들을 행하신 이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12년 동안 자궁내막염으로 버려진 인생을 살았던 한 여인을 치료해 주심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음을 배웠습니다.

또한 가버나움의 유지요 종교적인 지도자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도 베푸셨습니다.

그런 뒤에 가버나움을 떠나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당시 나사렛은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산악지대였습니다.

고향에 도착한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의 회당으로 안식일에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신 주님의 그 가르침 내용에 대해 마가는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사렛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반응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가복음 6:2절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두 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지혜 때문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권능 때문에 놀랐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갖고 계셨던 지혜와 권능을 느꼈지만 유감스럽게 믿지 못했습니다.

왜 믿지 못했을까요?

이어지는 마가복음 6:3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이 사람은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이 사람의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이 세 가지는 나사렛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상투적 이해, 익숙한 그의 과거 경력에 함몰되어 있었기에 던진 내용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라나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따라 목수의 일을 했던 평범한 예수로만 이해했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6:3절 맨 마지막에 기록한 예수를 배척한지라가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내용의 결과물을 누가복음 저자는 조금은 더 세밀하게 고발합니다.

누가복음 4:29절입니다.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이런 도발적 배척을 당한 주님은 이후 이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마가복음 6: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의 동선을 사마리아에서 갈릴리로 옮기셨음을 보고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갈릴리로 사역의 장소를 옮긴 주께서 앞에서 전술했듯이 마가복음 6장과 누가복음 4장에 기록한 나사렛의 아픈 일을 경험하면서 선언하셨던 그 상용어를 다시 끄집어냈다는 점입니다.

본문 4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요한복음 저자가 전언해 주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가복음, 누가복음 저자가 소개한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문 요한복음 저자가 일갈한 배경이 나사렛에서 경험했던 예수님의 트라우마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것임을 시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부연하겠습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은 배척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갈릴리에서는 도리어 환영받으셨습니다.

정반대의 경우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갈릴리에서 갈릴리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셨지만, 이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환영해 주는 이들에게 주님은 왜 이렇게 분위기가 서늘한 느낌을 주는 발언을 하신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본문 마지막 45절이 해줍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그렇습니다.

영접하다로 번역한 헬라어 에데칸토’(ἐδέξαντο)는 문자적으로 손을 잡다라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문화에 따르면 손을 잡는 대상은 같은 편이라고 인정할 때 잡는 것을 감안하면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같은 편이라고 인정한 게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손을 잡은 이유를 이면에 들어가 살펴보면 불편해집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의 손을 잡은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셨던 여타 기적과 사역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셨던 일 중에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의 손을 직접 잡게 만든 일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대표적인 일이 요한복음 2장에 기록한 성전 청결 사건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동의합니다.

갈릴리는 오랫동안 이방인들이 점유하고 있어서 이방인의 땅으로 명명되었고, 유대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예루살렘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소외된 땅이었다. 동시에 토지에 있어서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었던 까닭에 로마의 통치 권력이 지방 관리와 왕족들에게 많은 땅을 강탈해 주어 갈릴리에 거주하는 빈민들은 그 땅을 소작해야 했고, 각종 세금을 내야 하는 이중고를 당해야 했다.” (안병무, 민중과 한국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82)

이렇게 예루살렘 중심 정책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던 장소가 갈릴리였고, 갈릴리 사람들이었기에 말 그대로 예루살렘의 정신적 지주요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께서 뒤집어엎으신 일에 대해 갈릴리 사람들은 대리만족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언제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 열등감,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고, 그런 분위기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것이 분명한데, 바로 그 예루살렘의 심장부였던 성전을 뒤집어 놓은 주님이 갈릴리에 들어왔다는 건, 그들이 충분히 예수를 정치역학적으로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일이었고, 이로 인해 예수님을 환영한 일은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인위적인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환영이지만, 본질적 환영이 아닌 상투적 환영, 그리고 본인들이 살고 있는 갈릴리의 사회 풍토에 아주 익숙한 정황에 따른 환영을 받으신 주님은 나사렛에서 받으셨던 홀대와 배척의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판단하셨기에 씁쓸한 마음을 표하신 것입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4)

주님은 상투적인 익숙함에 대해 매우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 33번째 강해를 통해 2025년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오늘의 상투적 익숙함이 무엇인지를 민감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의 매너리즘 즉 습관화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수가 성에서 예수를 만난 여인의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해서 말씀 듣기를 강청했습니다.

이미 살핀 대로 주님은 그들의 청대로 이틀을 더 사마리아에 머물기로 마음을 먹고 그들과 함께 기거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일로 사마리아 주민 상당수가 주님을 믿는 백성으로 변화되었음을 우리는 지난 32번째 강해로 살폈습니다.

주님은 이런 감동적 사역을 마치고 갈릴리로 옮기셨습니다.

갈릴리로 들어가신 주님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일은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켜야 했던 명절 축제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주님이 행하셨던 성전 청결 사건이라는 혁명적인 일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갈릴리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한 이유는 예수께서 행하실 또 다른 혁명적 일을 기대했기 때문임이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 세인 지체들이 경성해야 할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결정하신 일이 아니라, 내가 생각해 낸 일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의 상태를 경계해야 합니다.

조금 더 심하게 이야기한다면, 그런 것과는 결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건 내 식이지 주님의 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종교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종교적 내용이 그 종교의 주체자이고 믿음의 대상이 배제된 경우를 허다하게 봅니다.

기독교적인 표현으로 다시 빌려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더불어 그분의 아들 예수께서 다시 올 때까지 대신 보내 주신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있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의 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의도는 완전히 무시하고 내 뜻이 이러니 삼위의 하나님은 당연히 내 뜻을 윤허하고 허락해서 내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사인해 주는 로봇 정도로 압박하고 있는 가당치 않은 이들이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더 정직하게 나도 그렇게 하나님을 윽박지르고 있는 당사자인 공범입니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버젓이 대낮 백주에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종교적 매너리즘 즉 습관주의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양평 용문사에 갔을 때 은행나무 대제라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은행나무 앞에는 기도 제목을 달아놓은 수많은 노란 리본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의식이 발동해 불교 신자들이 달아놓은 각양의 제목이 궁금해져서 기도 글귀들을 살피다가 기겁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닥치고 복이여 임하라

보는 순간, 무서워서 부처님이 실신하겠다 싶었습니다.

듣자 하니 그 리본에 기도 제목을 붙이는데 상응하는 물질을 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기도 제목을 쓴 사람은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처여, 복채를 내니 입 닥치고 복을 내려라!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 후안무치의 무례함입니다.

종교적 무감각은 대단히 무례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릴레이 기도를 통해 영적 피정에 들어가 있습니다.

혹시 이런 지체가 있습니까?

하나님, 내가 사십일을 기도할 테니 내가 원하는 이 일을 반드시 이루어주십시오.”

반드시라는 부사를 동원하여 기도하는 것은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40일 사순절 절기 중에 기도의 퍼레이드에 참여한 교우들이라면 이런 신앙의 모습을 갖추고 또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번 사순절 40일 기간, 나를 기도할 수 있는 은혜의 자리로 초청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40일 주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하시고, 그 일로 인해 찬양하게 하시고, 기도의 삶을 통하여 주님께 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하게 하옵소서.”

신앙생활은 종교적 상투성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숨결로 호흡하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습관화된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훈련은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 사람의 기분은 바뀌게 마련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자기가 교만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가진 모든 기능, 즉 생각하는 능력이나, 순간순간 팔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23224)

루이스가 말한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훈련이 모두 상투적 익숙함과의 투쟁이라는 사실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신명기 1:68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야훼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나온 지 4011개월이 되는 해에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머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일어나서 방향을 돌려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고 약속한 땅으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하라.”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습관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익숙한 것에 머무르려는 상투적인 것과 결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요구했던 갈렙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영적 신선함에 도전하십시오.

갈릴리 사람들처럼 인간의 이익에 부합한 일에 열광하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열광하고 간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익숙한 것, 상투적인 것과 결별하십시오.

산지가 바로 저 앞에 있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주신 땅으로/한 걸음씩 나아갈 때에/수많은 적들과 견고한 성이/나를 두렵게 하지만

주님을 신뢰함으로/주님을 의지함으로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큰소리 외치며 나아가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그 땅을 취하리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그 땅을 취하리니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린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우리 함께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