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2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32번째 강해) 본문: 요한복음 4:39〜42 제목: 궤적이 바뀌는 삶 서론) 목회 여정 중에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교회의 교(敎)자도 꺼내지 마라. 교회 다니는 누구를 떠올리면 아주 진저리가 난다. 만에 하나, 그 인간이 천국에 간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에 간다. 그 인간이 갈 정도의 수준이 천국이라면 그 천국은 갈 만한 의미가 없다.” 이런 말은 저만 들은 게 아니라. 우리 교우들 사이에도 적지 않게 들었을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아프고 또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었던 책이 몇 권인지 계수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세보지도 않았지만, 셀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읽었던 그 많은 책 중에서 저를 가장 가슴 아프게 했고, 비수가 되어 제 심장에 꽂힌 문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부처 믿고 사람 되세요.”(김선주,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2010, 한겨레 출판사, 34쪽) 이 문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은 매우 무례한 기독교적인 일이 배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목사라는 직으로 이 땅을 살고 있는 저는 이 문장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꿈을 꿀 때가 많습니다. 위에 첨언(添言)한 경우와 정반대되는 일을 경험하는 꿈입니다. “나는 기독교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이지만, 예수 믿는 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게 분명한 것 같아서 교회를 나갈까 갈등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김기석 목사께서 ‘잘잘법’에서 『나이가 들수록 빛이 살아나는 방법』이라는 제하로 강연한 영상을 정말 은혜롭게 시청했습니다. 이 영상에 달린 댓글 중에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목사님, 좋은 말씀 정말 잘 들었습니다. 전 불교 신자이지만, 목사님의 빛이 나는 미소에 저마저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음성, 무엇보다 삶을 살아가는데 지표가 되어줄 귀한 말씀 자주 듣겠습니다.” 저도 은혜 충만했지만, 이 댓글을 읽으면서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이게 기독교가 주는 선한 영향력이며 본질이고, 기독교의 존재 목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너무 감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내 삶의 전부가 되었을까? 나는 왜 예수에게 내 생명 걸고 내 삶의 궤적을 예수께 걸었을까? 목사가 된 이후에도 수도 없이 행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답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죄인 그 자체인 나를 찾아와 만나 주신 엄청난 현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엄청난 팩트 앞에서 나는 내 인생을 예수께 걸겠다고 선언했고, 그 선언을 이행하였고, 지금도 그 길을 분연히 가고 있습니다. 저는 설교 제목처럼 내 삶의 궤적을 예수께 맞추며 이전의 그릇된 궤적에서 이탈해 오늘도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수요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본론)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39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여인은 자신에게 쓰라린 상처를 준 그 본거지인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으로 들어간 여인은 그동안, 숨기고 싶었기에 숨겼던 자신의 트라우마를 자신 있게 수면 위로 올린 뒤 이렇게 선언했음을 요한복음 4:29절에서 이미 살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여인이 이렇게 용기를 갖고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선언하자, 사마리아 성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이어지는 4:30절이 곧바로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전술했듯이 사마리아는 유대 출신 사람들과는 서로 상종하지 않는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던 장소임을 감안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께로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단히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음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39절은 예수께로 나온 자들의 그다음을 주저 없이 보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합니다. 3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이제는 예수께 나온 것뿐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었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믿음의 진보를 나타냈다는 말입니다. 본문은 예수를 믿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40절에서 또 그다음 걸음을 걸었음을 계속 독자들에게 보고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제 예수께 심방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유대인들과 상종하기를 거절했던 이들이 유대인인 예수와 48시간을 함께 하는 놀라운 기적을 만들었음을 알려 줍니다. 여기까지도 감동이고, 은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 텍스트의 가장 큰 압권이자 감동의 클라이맥스는 41〜42절입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이 보고는 실로 놀라운 보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인의 이야기에 주목해서 예수께 나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48시간 예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니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을 믿게 되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친히 듣고 나니 그분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참 구주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간증은 마치 신앙생활의 승리를 위한 교과서적인 모범적 사례임을 알게 해주는 소중한 정보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고정적으로 지니고 있던 삶의 궤적을 통째로 바꾸게 된 결정적 원인을 요한복음 기자가 밝히고 있는데, 이 원인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물론, 2025년 3월 12일이라는 크로노스의 현장 안에 있는 나까지 포함하여 우리 모두에게 옛 구습에 함몰된 내 삶의 궤적을 결정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 해주고 있는 결정적인 원인이 있음을 본문이 알려줍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고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예수를 소개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직접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난 그들은 예수께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마리아에 조금 더 머물러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그분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48시간이라는 말미를 얻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소개했던 간접적인 증언이 아니라, 주인공인 예수의 말을 직접 듣기를 원했고,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져 예수의 말을 현장에서 들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42절에 기록된 한 단어가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친히 듣고” 새 한글 성경 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말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더는 당신의 말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 들어보았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도 살핍시다. “사람들이 여자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의 말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확실히 알게 되었소. 그분은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저는 42절에 기록된 구절의 은혜를 100%가 아니라, 1,000% 믿으며 지난 세월 목회 현장에서 치열하게 이 은혜를 전하기 위해 온몸을 다하며 달려왔습니다. 적어도 종교를 이용해 자신의 세속적 야망을 성취하려는 정신병자 목사가 아닌 이상, 정상적인 신학을 공부하고, 정상적인 목회 신학을 근거하여 달리는 목사라면 섬기는 교회 현장에서 하나님이 위임하신 양들을 천로역정의 길이 끝날 때까지 쓰러지지 않게 하고 보듬어 달려가려는 목회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을 전제하여 여러분의 담임목사도 ‘코람데오’의 신학적 명제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며 투쟁하고 싸워왔던 영적 본질은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 순위를 더 높이려는 것들의 일체와 맞서려고 했고, 또 지금도 여전히 맞서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집요하게 싸웠을까요? 오늘 본문 42절에 전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잔인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께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가히 혁명적인 소문이 예루살렘을 뒤덮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묻히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있어야 할 예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입소문이 삽시간에 예루살렘을 강타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소속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조작해 낸 일이라고 말하면 이 놀라운 일이 확산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놀라운 보고는 일파만파로 이스라엘 전 지역으로 퍼졌습니다. 예수의 부활 소식은 단지 산헤드린 소속 유대인 지도자에게만 충격적인 일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제자 1군, 2군, 3군까지 놀라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중에 아마도 제2 제자군, 혹은 제3 제자군에 속했던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들도 이 충격의 소용돌이를 목격했는데, 여하튼 이들은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글로바의 고향인 예루살렘에서 11.1km 떨어진 엠마오로 낙향하기로 마음먹고 길을 떠났습니다. 누가복음 24:15〜24절은 그 낙향의 길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동행하셨고, 그들의 눈이 가려져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 즉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해 상세히 질문하셨지만, 마치 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부활 사건을 제삼자적 관점으로 답변하는 그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며 이렇게 그들의 아둔함을 깨우쳐 주신 감동을 그대로 보고합니다. 누가복음 24:25〜27절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 보고는 대단히 주목해야 할 보고입니다. Living Bible 버전으로 누가복음 24:25〜27절을 소개합니다. You are such foolish, foolish people! You find it so hard to believe all that the prophets wrote in scriptures! wasn’t it clear predicted by the prophets that the Messiah would have to suffer all these things before entering his time of glory? (그대들은 너무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대들은 선지자들이 성경에 기록한 모든 것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메시아가 영광의 시대에 들어가기 전에 이 모든 것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예언에 분명히 나와 있지 않았나요?) 무슨 말입니까? 오늘의 언어로 풀면 이런 말입니다. “메시아가 되는 그리스도가 올 것이라고 구약 성경에 수없이 예언되었고, 나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그토록 말했는데 왜 그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하는 것인가?” 부활을 믿지 못하고 낙향하는 두 제자를 야단치시는 주님의 질타였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이 질타를 당한 두 명 제자에 대한 그다음의 행보를 소개한 것은 그나마 참 다행입니다. 엠마오 도상으로 내려가던 두 제자 담론의 클라이맥스는 누가복음 24:32〜33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이 구절에서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하는 두 구절이 보입니다. 첫 번째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그리고 또 하나는 “돌아가”입니다.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엠마오로 내려갈 때, 부활하신 주께서 그 두 사람에게 오셔서 말씀을 풀어 주셨습니다. 말씀을 풀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명을 받은 그 두 사람은 눈이 떠졌습니다. 눈이 떠졌다는 것은 단순히 못 보던 눈이 떠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이제 드디어 그들도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영적 변화를 강력하게 내비치는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의 말씀을 들었던 그들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가는 혁명적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두 제자들은 삶의 궤적을 바꾼 것입니다. 신앙적 삶의 궤도를 언제 바꿀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 인생의 궤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지난 주일, 4주 연속 교회에 나와 예배하며 세인교회의 멤버십을 확인하고 동역하기를 결심한 형제와 교제하는 자리에서 저는 이렇게 그 형제에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우리 세인교회는 이벤트 행사나 화려한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으로 가동되는 교회가 아닙니다. 지난 4주 동안 보셨던 것처럼, 세인교회는 고집스럽게 예배를 통해 진행하는 강해 사역으로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을 기초로 세상에 파송되어 지난한 정글 같은 세상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내 보려고 몸부림치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집사님도 세인 교회 지체로 서서, 이런 목회적 구도에 스며들면 신앙생활의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 붙들림 당하는 그 은혜가 앞으로 집사님의 삶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제 말을 듣고 난 집사님이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세인교회를 만나 예배자로 서고, 앞으로도 그렇게 서는 성도가 되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말씀이 제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이 은혜를 기대할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만난 먼저 변화 받은 여인에게 찾아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다시 본문 41〜42절을 읽습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사마리아 사람들이 걷고 있었던 영적 삶의 궤적이 바뀐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결론) 지난 삼 일간,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가 출간한 『양심』에 푹 빠지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자가 2023년 모교 후기 졸업식에 축사자로 선정되어 그 현장에서 연설했던 전문을 실었는데 읽다가 짜릿한 감동에 휩싸였기에 한 대목을 교우들께 전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 나라 최고의 수재들입니다. ‘대서울대학교’의 졸업장을 거머쥐셨습니다. 취업전선에서 완벽하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그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서울대학교 졸업장이 두 번째, 세 번째 직장을 얻을 때도, 70대에 할 일을 찾을 때도 지금처럼 막강한 힘을 발휘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쉼 없이 배우고, 일하고, 또 배워야 합니다. ‘융합의 세기’, 21세기를 살아내려면 ‘통섭형 인재’가 되어야 합니다. 겸허한 자세로 평생 공부할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졸업을 축하드리며 이제부터 살아갈 4분의 3 인생도 지금처럼 치열하게 그러나 사뭇 겸허하고 따뜻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변은 온통 허덕이는데 혼자만 다 거머쥐면 과연 행복할까요? 농민 사상가 故 전우익 선생님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최재천, 『호머 심비우스, 양심』, 더클래스, 2025, 39〜40) 최 교수의 글을 읽다가 목사의 직업의식이 발동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스펙의 유효기간, 영원하지 않습니다. 최 교수의 말대로 서울대학교의 스펙 유효기간은 한순간입니다. 하지만, 유효기간이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을 새기십시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나 주님과 함께/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가리 나의 의로움이 되신 주/그 이름 예수/나의 길이 되신 이름/예수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나를 단련하신 후에/내가 정금같이/나아오리라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채워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드릴 수 있도록/목마른 나의 영혼 주를 부르니/나의 맘 만져 주소서/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나의 맘 만져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