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5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31번째 강해) 본문: 요한복음 4:35-38 제목: 존재할 이유 서론) 저는 1961년 5월 11일에 인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올해 저는 한국 나이로 65세가 되는 해입니다. 65년이라는 세월을 살면서 반추하는 일이 있습니다. 나는 65년 인생 기간,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이유에 대해서 답을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반추입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이유에 대해 답할 수 없다면 65년이라는 인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헛헛한 인생을 산 사람이기에 밥만 축내면 산 비극적 주인공이 될 것이고, 반면에 그런대로 완벽할 수는 없지만 나름 선방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건 정말 다행스럽고 복된 인생을 살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오늘 세인 교회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는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의 삶을 산 사람에서 열외 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전자의 인생을 산 비극의 주인공입니까? 아니면 나름 하나님 보시기에 선방한 삶을 산 복 된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은 여러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인 교회 교우들이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본문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토대로 답해 보려고 합니다. 만에 하나, 오늘 설교를 통해 질문에 대한 답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만 있다면 앞에서 질문한 내가 살아온 인생 여정 중에 적어도 우리는 후자 즉 나를 보내신 주님의 뜻에 대해 나름 선방하며 살아왔다는 그 증거일 수 있기에 오늘 수요예배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본문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본론) 주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 물을 뜨러 온 여인에게 복음을 제시했고,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자기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고 사마리아 동네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전도자로 변화되었음을 살폈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 머무신 주님은 동네로 먹을 것을 사러 간 제자들과 다시 재회하셨습니다. 주님은 음식을 내놓은 제자들에게 내 양식은 육의 양식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또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양식임을 선포한 메시지를 지난 수요일 예배를 통해 살폈습니다. 이윽고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의미 있는 메시지를 연이어 내놓으셨습니다. 본문 전체를 다시 숙독하겠습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개역개정판』 본문을 최근 대한성서공회에서 번역한 『새한글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대들 자신은 말하기를 아직 4개월이 있어야 거둘 때가 온다’라고 하지 않나요? 보세요. 나는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그대들의 눈을 들어서 밭을 잘 보세요. 무르익어 거둘 때가 되었어요. 거둬들이는 사람은 품값을 받고 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열매를 모아들이고 있어요. 그리하여 씨를 뿌리는 사람과 거두어들이는 사람이 함께 기뻐할 겁니다. 이 경우에 ‘한 사람은 뿌리고 한 사람은 거두어들인다’라는 말은 참말입니다. 바로 내가 그대들을 보내어 거두어들이게 했는데, 그대들 자신은 그걸 위해 힘들여 일한 것이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힘들여 일했고, 그대들 자신은 그들이 힘들여 일한 덕을 본 겁니다.” (새한글성경 요한복음 4:35〜38) 오늘의 언어로 번역했기에 본문 이해가 조금은 쉬워졌을 것으로 사료(思料) 되기에 본문 주해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아주 뚜렷하게 내리는 기후적 특성이 있습니다. 이른 비는 이스라엘의 월력(月曆)으로 ‘티스리’ 월 즉 우리나라 월력으로 10~11월경에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이른 비가 내리는 시기를 시작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우기가 시작됩니다. 농부들은 우기가 시작되면 2~3주 후에 밭을 경작하고 그곳에 씨를 뿌리며 농사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씨를 뿌린 농부들은 우기를 거친 뒤에 소위 ‘아달월’ 즉 우리나라 월력으로 3〜4월에 내리는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늦은 비 역시 농부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비입니다. ‘티스리’월에 뿌린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비라 그렇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적어도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기까지는 아무리 못해도 4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말이 속담처럼 회자되곤 했습니다. 이런 사회적 속담에 대해 주님이 모를 리 없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지역도 이런 사회적 배경이 다를 바 없었던 수가성에서 제자들과 대화하실 때 이 속담 이야기를 화두에 올리며 말을 이어간 것입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5절) 주님이 던지신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씨 뿌림에서 열매 맺는 수확까지 시간을 설정했지만, 나는 분명히 다시 전한다고 쐐기를 박으신 내용이 35절 후반절입니다. 4개월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야말로 결실의 때라는 직설을 선언한 것입니다. 바레트 교수는 예수님의 생각을 지지합니다. “추수에 관한 한 씨뿌리는 때와 추수 때 사이에 간격이 없다. 너희들은 넉 달의 간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바레트,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 387쪽) 이렇게 영혼 추수의 시기를 분명히 선언한 주님은 이어지는 36〜38절에서 영혼 구원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어엎으시는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거둬들이는 사람은 품값을 받고 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열매를 모아들이고 있어요. 그리하여 씨를 뿌리는 사람과 거두어들이는 사람이 함께 기뻐할 겁니다. 이 경우에 ‘한 사람은 뿌리고 한 사람은 거두어들인다’라는 말은 참말입니다. 바로 내가 그대들을 보내어 거두어들이게 했는데, 그대들 자신은 그걸 위해 힘들여 일한 것이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힘들여 일했고, 그대들 자신은 그들이 힘들여 일한 덕을 본 겁니다.” (새한글성경 요한복음 4:35〜38) 주님은 지금 사마리아 땅에 계십니다. 더불어 사마리아 땅에 구원해야 할 영혼들이 수없이 많음을 지적했습니다. 희어져 추수할 것이 많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를 대변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도구로 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한 건 씨를 뿌린 존재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주께서 씨를 뿌렸지만, 거두는 것은 제자들의 몫임을 37〜38절에서 암시합니다. 그러니 거두는 자는 자랑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거두어들이는 수고만 하면 되는 게 제자들의 미션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 아주 중요한 오늘 설교의 신학적 함의가 들어 있음을 놓치면 안 됩니다. 다시 한번 재론합니다. 씨를 뿌린 건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씨로 인해 자라난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이는 제자들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렇게 구분하면 주님과 제자들의 사역을 이분화된 것처럼 여겨져서 착각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기에 노파심으로 교우들에 다음을 전합니다. 바레트의 해석을 한 번 더 고찰해 보겠습니다. “씨뿌리는 자와 추수하는 자는 놀랍게도 역설적으로 일치한다. 씨뿌리는 자와 거두어들이는 자가 동일하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여인과 대화하면서 씨를 뿌렸고, 믿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의 수확이다. 비록 38절이 보여주듯이 제자들이 그들을 거두어들이도록 예수를 도와줄지라도 그것은 예수의 수확이기 때문이다.” (위의 책, 388쪽) 천재적 지성을 발휘한 바레트 교수의 주석이 놀랍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의 영혼 구원을 위해 씨를 뿌린 주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받은 그들을 추스르고 돌보아야 하는 역할을 제자들에게 맡기셨지만, 그 일의 위임 역시 주님이 하신 것이기에 영혼 구원의 주체자와 결론을 맺는 분 역시,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신약학자의 해석은 몇 번을 들어도 정답입니다. 38절 본문을 마지막으로 더 한 번 정독하겠습니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보내서,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이 구절을 번역했습니다. “나는 너희가 일구지 않은 밭으로 너희를 보내 추수하게 했다. 너희는 손가락 하나 보탠 것 없이, 다른 사람들이 오랫동안 힘써 일궈 놓은 밭에 걸어 들어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본문 해제를 통해 설교 서두에 언급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시점에 도착했기에 그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보내신 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낸 사람으로 여러분은 인생을 사셨습니까? 아니면 전혀 그러지 못한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사마리아 수가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준 말씀의 핵심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내가 다했다. 너희들이 한 건 없다. 그냥 내가 너희를 불러서 내기 이루어놓은 영광을 맛보게 한 거다. 그러니 너희들은 지금부터 이후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 나를 수단 삼지 말고 목적 삼아라. 오늘 설교의 레마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목적 되신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성도의 존재 이유는 목적 되신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언제 성도들의 이런 존재 이유가 허물어집니까? 주님을 수단 삼으면 허물어집니다. 이사야 43:1절을 읽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구절에 아멘 하지 않는 이는 신앙인일 수 없습니다. 제2 이사야를 통해 선포하신 신탁이 정말로 위로가 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고통받았던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언하신 이 구절은 오늘 예수 믿는 우리 모두에게도 은혜로운 선언을 들립니다. 언급한 대로 이사야 43:1절의 복을 받는 주체는 2인칭 대명사 ‘너’ 즉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보고는 이사야 43장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이사야 43:7절을 봅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구절에서 돋보이는 단어는 3인칭 단수인 ‘그’입니다. ‘그’를 송병현 교수가 의미 있게 해석했습니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하나님이 구원하실 자들을 제한하고 있음을 밝힌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 즉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을 다짐하는 사람만이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주석 – 이사야 Ⅱ』, 196쪽) 그는 누구일까? 이스라엘 백성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사야 43장의 정황상,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인정하는 모든 이들, 물론 이방인들도 다 포함하는 총칭이 ‘그’입니다. 만에 하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구원은 우리만의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배제한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제한시킨다면 바로 이런 악용이 하나님을 목적이 아닌, 자기들만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아주 질 나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가 제시한 고발 중에 대단히 불쾌하고 짜증 나게 하는 담론이 아마도 마태복음 20장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20:20〜21절입니다.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아주 못돼먹은 주님을 수단 삼은 이들이 천박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도진개진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20:24절의 보고를 만나 보십시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성령 받기 이전, 제자들의 수준이 이 정도였다는 것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주님을 철저하게 수단 삼는 이들의 초라함을 여지없이 보게 됩니다. 지난달 28일에 서울여자대학교 10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윤선 총장의 취임식을 축하 차 다녀왔습니다. 이 총장은 취임하는 취임사에서 서울여자대학교의 비전을 밝히고 제시했습니다. 향후 본인이 재직할 동안, 서울여자대학교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는 취임사를 들으면서 응원했습니다. 취임사 말미에 이 총장은 이렇게 연설을 마감했습니다. “저는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달려갈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이것이 제 비전이요, 앞으로 총장의 역할을 감당할 영적 자양분이고 무기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 총장의 비전 선언에 아멘 하며 동의한 이유는 예레미야 33:3절을 붙든다고 선언한 이 총장의 고백에 하나님이 뒷받침 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33:2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선언을 하신 뒤에 33:3절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 33:2절 말씀은 무엇일까요?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왜 우리는 야훼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목적 삼아야 합니까? 야훼 하나님은 그분을 목적 삼는 이들을 위해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며, 단순히 일만 하시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오늘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와 교회 존재 목적이 분명해졌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교회가 세인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이들이 세인 교회 성도들이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고난 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내 몸이 약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예수 안에 난 완전함이라 화려한 세상 부럽지 않은 것은/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세상 모든 것들도 부럽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