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2025년 2월 26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30번째 강해): 보내신 이의 뜻2025-02-26 14:37
작성자 Level 10

 

20252월 26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30번째 강해)

 

본문: 요한복음 4:31-34

제목: 보내신 이의 뜻

 

서론)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현장에서 제일 많이 고민했고, 성찰했고, 묵상했던 것, 그리고 2025226일 오늘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으며, 성찰하고 있고, 또 묵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믿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고, 바로 이 질문에 답하는 삶입니다.

이 질문하기와 답하기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제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월요일 저녁에 탁구장으로 나가 매주 하는 것처럼 열심히 땀을 흘렸습니다.

한 게임을 하면 이제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조금 쉬는 시간을 갖고 다시 게임에 임하며 운동을 하는 게 제 패턴이 되었습니다.

그날도 잠시 쉬고 있는데, 관장이 와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잘 몰라서 그러는데 요즈음 막 뜨고 있는 목사 두 명이 궁금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광화문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아무개 목사와 부산 대통령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아무개 목사가 탄핵 반대 집회를 이끌고 있는데, 목사가 저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목사님은 저런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제가 알고 있는 탁구장 관장은 지성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이고,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제게 극히 절제하는 표현을 썼지만, 대단히 못마땅한 감정을 드러내 보이며 이렇게 제게 질문한 것입니다.

목사가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관장의 지론은 이 점을 밑에 깔고 제게 불만을 터뜨린 것입니다.

관장의 말을 듣고 나니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절제했습니다.

동시에 탁구장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제가 하는 말 한마디는 곧바로 세인교회의 이미지와 직결되는 일이기도 하기에 답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 이렇게 에둘렀습니다.

그들은 정치가 하고 싶은가 보죠?”

이렇게 웃고 넘겼지만, 그날 목사로 살고 있는 내가 얼마나 초라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오늘 새벽에 교우들과 나눈 생명의 삶 큐티 본문이 요한복음 16장이었습니다.

교우들과 요한복음 16:12절을 레마로 삼고 깊은 묵상을 함께 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시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지만, 전혀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기에 하나님과 1도 관계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면서 이들이 이렇게 정의한 것은 절망스러운 일이라고 해석하며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괴물들이 탄생하는 걸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본문 강해로 답해 볼까 합니다.

본론)

 

본문 31절을 읽겠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을 전도하고 있는 동안, 4:8절에 기록한 대로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사마리아 성읍을 방문했다가 다시 예수께 돌아왔고 제자들은 가져온 음식을 예수께 드리며 시장기를 면할 것을 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름, 고생하며 발품을 팔아 준비한 음식을 제자들이 내놓았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셨음을 3234절에서 보고합니다.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많이 시장할 것으로 예상했기에 곧바로 주께서 음식을 곧 드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뚱맞은 답변을 한 것입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그 양식의 정체를 아주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놀라운 답변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살게 하는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이 시작하신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메시지 4:34절 번역)

예수께서 즉답하신 이 구절을 세밀하게 적용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내가 진짜로 먹는 양식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은 완성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복음 4:34절을 기초로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교훈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정답이라고 믿고 최선을 다해 바르게 사는 삶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6:10절을 소개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내용의 한 대목입니다.

김영봉 목사는 신약을 전공한 분입니다.

그가 사역(私譯)한 버전으로 마태복음 6:10절을 소개합니다.

임하소서,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김영봉,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IVP, 12)

이 아름다운 기도에 노멘 한다면 그가 어찌 그리스도인일 수 있겠습니까?

저는 김 목사가 번역한 주기도문에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아멘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가지를 심사숙고하고 싶습니다.

주께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아버지의 뜻이 과연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기입니다.

목사로 살면서 교우들에게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이 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뜻이 뭐죠?”

목사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요.”

목사님, 하나님의 뜻이 가끔은 이해가 안 돼요.”

등등 수없이 많은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아 보았습니다.

저 역시 나약한 인간이고, 불완전 존재 그 자체이기에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답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아 곤혹스러울 때가 비일비재합니다.

해서 보편타당한 말로 대체할 때가 많았습니다.

보편타당하게 이해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제가 하나님의 뜻을 보편타당하게 말할 때 곧잘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9:11절을 소개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장은 예레미야가 주전 595594년에 제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를 담고 있는 텍스트입니다.

나라를 잃어 비극의 현장으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으로 절망의 날을 지내고 있는 유대 백성들에게 힘들겠지만 23세대 즉 70년이 지날 때까지 잘 견디고 이기라는 메시지를 예레미야 29장이 담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냐와 같은 예언자들이 선언하는 장밋빛 청사진, 예를 들어 2년 안에 다시 유다가 회복될 것이라는 그런 메시지에 휘둘리지 말 것을 당부하는 편지였으니 포로로 끌려간 유다의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편지가 도리어 사기를 꺾는 편지처럼 느껴질 수 있었을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야훼 하나님이 전해주신 신탁을 왜곡할 수 없어 있는 그대로의 예언을 편지에 담아 보내는 아픔을 감내했습니다.

제가 예레미야가 보낸 이 까칠한 편지에 주목하는 이유는 진정성 때문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잠시 주는 고난의 의미를 잃지 말고 회복하라는 메시지가 진정성이 있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야훼 신탁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예레미야 29:11절입니다.

다시 복기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예레미야 예언의 내용을 적용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바른 신앙으로 무장하고 돌이키는 이들의 끝을 승리로 연결해 주신다는 분명한 팩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신앙으로 잘 서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있는 뜻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희망임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교우들에게 설교를 진행하면서 줄곧 강조하고 있는 내용을 눈치채셨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인 평안과 희망이 접목되는 대상은 바른 신앙을 소유하고, 그 신앙의 길에 이탈하지 않으려고 날마다 노력하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좋은 실례를 하나 들겠습니다.

이재철 목사께서 오래전에 쓴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에서 일본에서 경험한 일은 소개한 글을 보았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일본교회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일본은 크리스천이 전 국민의 1%밖에 지나지 않기에 기독교 불모지라고 불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 1%밖에 되지 않는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철저한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일본인들처럼 세례를 받기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그 어느 세계에도 없다. 그들은 세례를 받는 순간까지, ‘정말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어 확신이 들어 세례를 받은 사람은 정말 철저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 (이재철,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홍성사, 4546)

이 목사가 일본 예찬론자이기에 이런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일본 크리스천이 갖고 있는 분명한 바른 신앙의 정체성이 우찌무라 간조를 낳았고, 미우라 아야꼬를 낳았으며, 엔도 슈사꾸를 낳은 것은 물론, 가가와 도요히꼬와 같은 신실한 목회자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이 목사는 개진합니다.

작년에 둘러본 종교 개혁지 중에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해서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 츠빙글리가 섬겼던 대성당을 관람했습니다.

관광객들이 오가는 박제된 성당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동상이 세워진 바세르교회 앞에서 그의 동상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의 동상은 새똥들의 천국이었고, 악취가 진동하는데도 제네바시에서 전혀 관리를 하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관리하지 않는가?

목숨을 걸고 올바른 신앙의 길을 지키고자 했던 츠빙글리는 스위스 제네바 시민들에게 전설의 고향에서 나올 법한 그 시대 인물 외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럽의 종교 개혁지, 스위스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최고 탑에 자리를 잡은 나라이기에 그들에게 신앙이 그리 중요하다고 믿지 않는 세속적 가치가 그들의 신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스위스 기독교가 무너지게 된 더 심각한 이유는 그럼에도 교회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에 대해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직무 유기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스위스가 오늘의 세속적 가치에 잠식당하게 만든 원흉입니다.

그럼에도 스위스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스위스 국민의 90% 이상이 신교와 구교 신자라는 이력을 갖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는데 일본 크리스천과 비교할 때 복잡한 감회가 저를 사로잡는 게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0:916절을 읽겠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가 한 날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그릇 안에 담겨 있는 부정한 네 발 가진 짐승들이 가득 찬 환상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먹으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렸는데, 율법에서 금한 깨끗하지 못한 부정한 음식들이었기에 베드로는 하늘 소리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소리가 들리기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단호한 명령이 베드로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누가가 기록합니다.

이 기록을 기초로 우리 교우들과 나누어야 할 명제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대의 뜻이 충돌하면 그대는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깊이 생각해 볼 과제라고 느끼면 그래도 그 지체는 소망이 있습니다.

괴로워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증거니까요.

하지만 고민조차도 하지 않고 당연히 내 뜻을 선택한다고 선언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오늘 내가 섬기는 한국교회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정용섭 목사는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는 사람 역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른 사람들이다.” (정용섭, 주기도란 무엇인가, 홍성사, 99100

그렇다면 이런 적용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함과 아름다움을 갖고 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바른 신앙과 생각을 품고 실천하는 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백성이라는 교훈이 오늘 레마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요한복음 4:3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우리 주 예수께서 먹을 양식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일이라고 제자들에게 권면한 말씀이 이제는 오롯이 다가오는 저녁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바른 신앙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온전하게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테레사 수녀의 예화로 답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세인트루이스 대학 교수인 존 캐버너가 캘커타에 있는 테레사 수녀가 섬기던 수녀원에 방문해서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사역을 시작하던 첫날, 테레사를 만난 캐버너 교수가 테레사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무엇을 기도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캐버너가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확실하게 알고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자, 테레사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 없습니다.”

왜죠?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히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테레사가 이렇게 마지막으로 답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은 추구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김영봉, 주기도, 가장 위험한 기도, 134135)

엄청난 성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은 쌓아가는 삶이 아니라, 비우는 삶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텅 빈 충만이라고 갈파한 한 신학자의 말이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 지금은 비록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 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곳

내 아버지 너른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 둔 내 소망있네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