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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2월 19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29번째 강해): 혁명보다 위대한 것2025-02-19 14:09
작성자 Level 10

2025219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29번째 강해)

 

본문: 요한복음 4:2730

제목: 혁명보다 위대한 것

 

서론)

 

10여 년 전에 레미제라블이라는 뮤지컬 영화를 정말 감동적으로 감상한 적이 있습니다.

장발장으로 분()한 휴 잭맨의 연기와 노래, 영화 글래디에이터로 유명세를 탄 자베르 경감 역을 열연한 러셀 크로우, 그리고 무엇보다도 판틴 역을 너무 훌륭하게 소화해 낸 앤 해서웨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참 벅찬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오롯합니다.

하지만, 이 뮤지컬에 제가 꽂힌 이유는 이 뮤지컬이 배경 삼은 역사적 사건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미제라블18326월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민중봉기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고질적인 히어라키즉 철저한 계급 권력 구조로 조직된 왕정의 폭정에 반발하여 다시 민중이 살기 좋은 평범한 프랑스를 만들기 위해 일어났던 시민 혁명이었지만, 공권력을 갖고 있던 권력의 무력에 무참히 짓밟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참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아픔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영화였기에 저는 레미제라블이 말하고자 했던 이루지 못한 미완의 혁명에 대해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아픔을 갖고 보았기에 지금도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한 교훈을 되새기고 때론 영화에 나오는 OST를 애청하면서 그때의 감동을 추억하곤 합니다.

소위 말하는 혁명이라는 대단히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단어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대한민국은 4,19 의거를 겪었고, 5.16 군사 쿠데타를 경험했고, 80년 서울의 봄을 짓밟은 신군부의 쿠데타를 기억하고 있기에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2023, 1979년에 발생한 12,12 사태를 배경으로 한 서울의 봄이 상영되었습니다.

영화에서 전두광 역할을 맡은 배우가 대사로 외쳤던 말은 그때는 물론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말이 정말로 위험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실패하면 반역이지만,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하지만, 혁명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유불리에 따라 천박하게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혁명이라는 단어를 쳇봇 GPT에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국가나 사회의 제도와 조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를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GPT의 설명을 읽다가 상황에 따라서, 대단히 선한 가치의 단어인 혁명이라는 단어가 악한 이들로 인해 매우 나쁘게 오용되고 변질되는 단어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혁명보다 위대한 것이라고 정했습니다.

이렇게 정한 이유는 이 아슬아슬한 단어 혁명과는 족히 비교해서는 안 되는 더 위대한 가치이자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영적 변곡점이 있음을 분명히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론)

 

사마리아 수가 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로 제6시 그러니까 우리나라 시간으로 정오에 물을 얻기 위해 물동이를 지고 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예수께서 그녀에게 내게 물을 줄 수 있는가를 질문했고, 어찌 유대 남자가 서로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걸 수 있냐고 따지며 정색하는 여인에게 그대가 나에게 혹시 물을 준다면 그 물은 다시 사람을 목마르게 하는 물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먹으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복음의 핵심적 가치를 선언하자, 그녀는 그 물을 내게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께서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명하셨고, 나름 당황하던 여인은 난처해 자기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들이 예배하는 처소가 다른 낯섦을 피력하자, 주께서 그녀에게 예배하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의 마음이 더 중요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 마음을 완전히 연 여인은 드디어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요한복음 4:25절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유진 피터슨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은 압니다. 그분이 오시면, 이 모든 것의 전말을 알게 되겠지요.” (메시지, 요한복음 4:25)

여인의 말을 접수한 예수께서는 곧바로 혁명과도 같은 메시지를 그녀에게 남기셨습니다.

요한복음 4: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감히 그 누구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마리아 전 지역은 물론, 유대 전 지역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메시지를 던진 예수님을 만난 여인이 행동했던 반응이 오늘 설교 본문 2829절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혁명적인 선언을 듣자마자 자기 삶을 피폐하게 만든 진원지 사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간 그녀는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를 외쳤습니다.

와서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이 우리 선조가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도이시다.”

신약학자 C,K, 바레트는 이 구절에 대해 아주 의미 있는 주석을 남겨 놓았습니다.

여인은 아마도 예수께서 물을 마시도록 물동이를 남겨두고 갔을 것이다. 더불어 물동이를 버려둠으로써 자신의 과거와 완전히 절연했음을 시사한다.”(C.K. 바레트,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 한국신학연구소, 384)

이 해석에 동의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분명한 사실은 여인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곳이고, 그래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마리아로 들어가서 다시는 들춰내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를 스스로 다시 무대 위로 올린 뒤에, 나는 나를 사로잡고 마치 마음에 족쇄를 채운 것과 같은 이 아픈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했음을 선포했고, 이로 인해,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었다고 간증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나는 여인의 이 행동을 이렇게 재정의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여인은 혁명보다 더 위대한 새로운 영적 삶의 지평을 열었다.”

무슨 말일까요?

진보적 색채가 뚜렷한 교회와 목회자들은 이렇게 부연하면 위대한 혁명을 폄훼하는 발언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습니다.

,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개인적인 신학적 성찰로 적용하자면 쓰라리게 고통스러운 아픔과 트라우마를 갖고 있어 날마다 심각한 좌절과 우울함에 빠져 있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희망과 소망을 갖게 되고, 삶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는 일이 생겼다면 그건 거창한 혁명보다 더 위대한 사건이라고 선언하는 것에서 물러설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혁명보다 더 위대한 일이라고 제가 정의한 이 엄청난 사건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이 질문입니다.

제게는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흔들리지 않는 신학적 성찰을 토대로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전인격적 만남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조금 깊이 읽다 보면 스스로 나를 놀라게 하는 구절을 만날 때를 곧잘 발견합니다.

성경적 증언 하나를 소개합니다.

오병이어로 이루신 기적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눈으로 목도한 제자들은 그 현장, 벳세다를 떠나 건너편 벳세다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유는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킨 현장에서 속히 떠날 것을 재촉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4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하시고

재촉하사는 헬라어 ‘ἠνάγκασεν(에낭카센)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원뜻은 강제로 무엇인가를 압박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적용한다면 제자들은 가고 싶지 않은 건너편 벳세다로 억지로 이동해야 했다는 것을 전제한 구절입니다.

이 해석과 더불어 또 하나 이해를 요()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곳이 벳세다인데 제자들에게 떠나가도록 명령한 목적지의 이름도 벳세다라는 기록입니다.

도대체 지형적으로 이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풀어야 합니다.

양용의 교수의 해석을 소개합니다.

벳세다라고 불리는 도시가 갈릴리 해 동쪽 해안에 하나 있었고(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곳-벳세다 율리아스), 갈릴리 해 서쪽 해안 가버나움 근처에도 하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양용의, 마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 유니온, 159)

이 해석을 전제하여 적용한다면 제자들은 매우 기분이 언짢을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강요에 의해서 해야 하는 현실이 매우 불편하고 싫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할 때, 항상 두 겹의 고난이 겹쳐 옵니다.

갈릴리 동쪽 벳세다 율리아스에서 배를 이용해 가버나움 근처에 있는 서쪽 벳세다로 이동하는 새벽 3시쯤, 제자들이 탄 배는 추론에 의하면 헐몬 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힘겹게 항해해야 하는 고된 상황에 놓입니다.

바로 그때 힘에 겨워하는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하여 뭍에서부터 걸어오는 예수님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생각해 두려워하고 있는데 주께서 배에 오르시면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윽고 주께서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고 마가복음 기자는 보고합니다.

이 담론에서 제가 정말로 주목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6:51-52절입니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제자들은 왜 호수를 건너 배에 오르시는 주님에 대해 유령이라고 소리를 치며 놀라고 두려워했을까요?

개역 개정판은 보고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둔하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진 피터슨은 마치 오늘 설교하는 담임목사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 같은 해석을 남겨놓아서 통쾌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저녁 식사 때

하신 일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엇도 아직 그들의 마음속까지 파고들지 못했던 것이다.” (메시지-마가복음 6:51-52)

유진 피터슨이 표현한 이 대목이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그 무엇도 아직 그들의 마음속까지 파고들지 못했던 것이다.”

말씀을 준비하며 이 구절을 성찰하다가 유레카하며 무릎을 쳤습니다.

그 무엇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제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했을까?

나는 주저 없이 선포합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오병이어로 엄청난 기적을 베푸셨던 주님을 눈으로 보았던 제자들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전인격적 만남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바로 유진 피터슨이 지적한 바로 그 무엇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아는 것,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수없이 많은 기적들을 경험한 것이 곧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인가를 묻는다면 저는 단언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아는 것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 중의 착각입니다.

설교를 수천 번 수만 번 들었다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 그 자체입니다.

주님을 전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물동이는 주님에게 맡겨두고 자기 삶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현장으로 돌아가 내가 만난 예수로 인해 내 삶이 변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살아내는 것이 바로 주님을 전인격적으로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이론과 체험은 내가 지적으로 진보하는 데에 일조는 할 수 있어도 그것이 내 삶을 궁극적으로 변화하게 만드는 도구가 아닙니다.

내가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말씀을 토대로 내 마음속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행하셨던 삶의 걸음을 나도 걸을 때입니다.

내가 주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을 진솔하게 경험했다는 증거는 내 삶의 현장이 바뀌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똑똑한 친구가 예수님을 만나 영적 감격을 경험하며 삶에서 변화된 인생을 살고 있는 친구에게 와서 질문했습니다.

친구, 주님 만났다고 하는데 마태복음을 다 읽어 보았나?”

아니.”

그럼, 주기도문은 성경에 어디에 있는 줄 아나?”

아니.”

바울이 쓴 서신서가 신약 성경에 몇 권이 있지?”

몰라

아니, 이 친구야. 이런 것도 모르면서 주님 만났다고 말하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마태복음도 다 읽어 보지 못했어. 나는 주기도문이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도 몰라. 바울이 쓴 글이 무슨 글인지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지. 나는 이전에 술에 찌들어 살았어. 나는 도박판에도 기웃거렸어. 어디 그뿐인 줄 아나? 나는 남을 미워하는 사람이었고, 행실도 바르지 않아 윤리적으로도 많은 나쁜 짓을 했지. 그러나 분명한 건 그런 모든 것을 단절했다는 점이야. 나는 매일 기뻐한다네. 나는 내 삶에 이런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자네가 질문한 것을 하나도 알지 못하지만, 너무나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어. 나를 이렇게 변화하도록 만들어 준 분이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지.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야.”

여인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주님을 전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성으로 돌아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29)

요한은 이렇게 사마리아 출신 여인의 보고를 선언한 뒤, 한 가지 감격적인 여백을 남기며 본문을 마감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30절은 감동의 압권입니다.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이것이 바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혁명보다 더 중요한 은혜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겠습니다.

시대를 바꾸는 혁명보다 더 위대한 것은 내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자아의 변화는 혁명보다 위대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격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많은 열매를 거두려면 전지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기막힌 성찰입니다.

예수 믿은 세월의 경력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내가 무슨 직분으로 교회를 섬겼는지 드러내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1-23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많은 라는 자기중심의 종교성이라는 가지를 쳤느냐입니다.

이 가지를 치는 것은 단 한 가지 일회성으로 주님을 보았고, 체험했다는 것으로 평가되거나 치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지치기는 주님을 시분초마다 전인격적으로 만나 내 삶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말대로 내 마음을 주님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삶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을 모르던 세월

 

주님을 모르던 세월 방황하던 내 영혼/아름다운 목자 음성을 거역하며 살았네

달콤한 유혹과 즐거움 나를 썩게 하여도/사망의 그늘이 지는 줄 생각지도 못했네

그림자 같은 나날을 욕심으로 채우고/항상 나 하나만 위하여 쓸모없이 지냈네

분토만도 못한 소욕이 어찌 그리 중했나/오 주여 용서해 주소서/머리 조아립니다.

부드런 주님의 손길 나를 어루만질 때/육신으로 살던 세상은 흔적 없이 사라져

더러웠던 나의 옛사람 십자가에 못 박고/성령의 새 옷을 입었네/주여 나를 보소서

시간과 물질과 노력 나의 생명까지도/주님께만 바치렵니다. 나를 받아주소서

좁은 이 길 모두 걸은 후 주님 다시 뵈올 때 영광의 면류관/쓰고서 영원토록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