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2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28번째 강해) 본문: 요한복음 4:16〜26 제목: 왜 올바른 예배인가? 서론) 진해교회를 섬길 때, 고신 측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제가 섬기는 교회로 수평 이동을 해 온 부부 집사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고신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이였는데 목회는 하지 않고 일반 직장을 섬기는 형제였습니다. 진해교회 사역을 마치고 제천으로 부임할 때, 그 형제가 제게 대단히 분노해 날카롭게 말했습니다. “진해에서 떠나지 않고 목회할 줄 알았는데, 제천으로 이임하는 목사님을 보면서 매우 실망했습니다. 저는 주변에서 진해성결교회에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의 목회 열정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들었고, 특히 강해 설교에 대한 은혜가 있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성결교회에 와서 탐방하다가 이런 목회자이면 내 신앙의 줄을 내려도 되겠다 싶어, 제 출신 교단인 고신 교회를 버리고 성결교회로 옮겨왔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목사님의 목회 열정에 감탄했고,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목사님이 제천으로 이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배신감에 매우 화가 났습니다. 왜? 목회자는 지금 섬기는 교회보다 규모가 크면 이익에 따라 교회를 옮기는 것입니까? 그것도 주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포장해서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회의를 느낍니다. 앞으로 예배하는 삶을 포기할까 합니다.” 그 형제의 글을 읽고 나서 항변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이미 마음을 닫은 이에게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그의 마음이 열릴 것 같지 않아 미안하다는 말로 침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답글을 간단히 쓰면서 이렇게 전했습니다. “집사님, 앞으로는 이강덕 목사에게 예배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전환점으로 삼아 주십시오.” 옥한흠 목사의 글에서 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19세기 유명한 설교자 헨리 위드 비처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영적 감동을 주는 영감 넘치는 설교였기에, 그가 섬기는 교회는 설교를 듣기 오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여느 다른 주일처럼 비처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청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교회 강단에는 비처 목사가 아닌, 다른 강사가 단 위에 섰습니다. 순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많은 이들이 교회를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강단에 선 강사가 빠져나가는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러분 중에 헨리 위드 비처 목사를 예배하기 위해 온 사람들은 지금 예배당에서 다 나가십시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 하기 온 분들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나가는 자들 중에 상당수가 대부분의 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간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옥한흠, 『요한이 전한 복음 上』, 226-227쪽) 본론)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출신의 여인은 예수께 먹어도 다시 목마르지 않은 물을 달라고 예수께 청합니다. 이런 요청을 받은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심령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기 위해 이제는 여인의 지나온 삶의 아픔을 건드렸습니다. “남편을 데리고 오라” (16절) 주님의 반응을 들은 여인은 적지 않게 놀라며 남편이 없다고 에두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말에 이렇게 곧바로 다시 반응하셨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화들짝한 여인은 예기치 못하게 자기의 과거를 치고 들어온 예수님께 당황하면서 화제를 돌리는 화두를 던졌는데 이것도 주께서 이끄신 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구절의 이해를 위해서는 주석을 요합니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솔로몬 사후 다윗에 의해 통일된 이스라엘이 두 쪽으로 갈라집니다. 남쪽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연합된 남 유다로, 북쪽은 이외 열 지파가 연합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분열된 남북은 때론 이해 조건이 맞으면 화합할 때는 연대했고, 서로에게 손해가 된다고 여겨지면 전쟁도 불사하며 그런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역사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722년에 북쪽 이스라엘이 왕국이 앗수르에 멸망 당하고 지도에서 사라지는 불행이 임했습니다. 하지만, 소수이기는 했지만, 북쪽에서 근근이 사마리아의 역사를 이어가던 북이스라엘 거민들은 북쪽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그들만이 갖고 있었던 신앙을 지키려고 사력을 다하며 명맥을 유지합니다. 여기서 한가지는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구약 성경은 『히브리 성경』을 전제한 번역본입니다. 히브리 성경이라고 하면 매우 철저하게 남 유다 중심의 신앙적 측면에서 기록된 역사입니다. 특히 역사서라고 정의하는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에 기록된 역사 기술은 남 유다 편향적인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기에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는 억울한 측면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으로 연결됩니다. 사마리아를 적대시하는 유대의 교만입니다. 본문 20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언급한 ‘이 산’에서 예배했다고 말하는 술회는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마치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만이 올바른 일이며, 북쪽 사람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던 장소인 세겜에 위치한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사마리아인들을 비인간 취급하는 행태는 유다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민족주의적인 횡포였습니다. 그러기에 주께서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본문입니다, 21〜2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께서 여인에게 전한 메시지가 얼마나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주께서 여인에게 깨우쳐 주신 메시지는 이렇게 순화해서 해석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예배드리는 장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한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 그리심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강하게 역설한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배하는 자의 영적 마음가짐이라고 쐐기를 박으셨습니다. 이렇게 전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예루살렘에서 드리든지, 그리심에서 드리든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만에 하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진리와 영으로 드리는 예배의 자세가 아니라면 예루살렘이 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에 하나, 그리심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 사람이 드리는 그리심산에서의 에배도 정답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해당됩니다. 만에 하나, 사마리아 출신의 사람이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 예루살렘에 내려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에 영과 진리로 충만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면 그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말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 출신의 사람이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그리심 산에 올라가 예배를 드린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에 영과 진리로 충만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면 그 장소 그리심 산이 정답이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설교하고 나니 한 가지 염려가 증폭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코로나 3년이 교회에 입힌 심각한 데미지 중에 가장 강력한 후유증을 남긴 것이 무엇일까를 질문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성도가 지켜야 하는 신실한 예배 드림을 무너지게 한 것” 우리 교회만 하더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코로나 시기부터 시작해서 대면 예배와 절연한 교우들이 있습니다. 몇 번이고 이제 코로나가 끝났으니 예배 참석에 최선을 다하라고 권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윽고 제가 항변하는 말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으며, 예배도 열심 다해 참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세인교회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오늘 설교가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얼마나 큰 변호의 근간이 되겠습니까?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도 예배하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근데 왜 목사님은 자꾸만 대면해서 예배를 드리라고 압박하십니까? 목사님은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아닙니까?” 설교 서두에 언급한 진해교회를 섬기던 집사님 부부가 이임하는 제게 아주 강하게 불만을 표한 내용이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왜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예배에만 국한 시킵니까? 왜 예수님과의 만남을 심야 기도회에만 있다고. 수요예배에만 있다고, 새벽기도회만 있다고 압박하십니까? 저는 일상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저는 그 형제의 독설적인 공격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왜요? 저는 저를 공격하기 위해 그 형제가 말한 내용에 한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아멘하기에 그렇습니다. “저는 일상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멘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가 만났던 이런 부류에 있는 지체들이 삶으로 예배하고 있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본문 24절을 다시 곱씹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 구절에 대한 공동 번역 성경 해석입니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메시지』 번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영과 자신의 참된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가장 중심이 되는 단어 ‘영’과 ‘진리’에 대해 성경 해석자들은 여러 가지로 표현하지만, 한 가지 사실에는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세는 ‘알리데이아’ 즉 ‘신실성’과 ‘프뉴마’ 즉 ‘하나님의 마음으로 호흡하는 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장소와 관계없이 예배하는 자들이 신실성과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실한 호흡‘을 갖고 예배한다면 대면 예배가 아니라, 비대면 예배도 얼마든지 예배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친구 목사에게 전언해 들은 이야기 중에 참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서울에서 건실하게 목회하는 친구 목사 교회에 펜데믹 이후 대면예배를 드리지 않는 젊은 집사가 친구 목사에게 보낸 글이 이렇습니다. “목사님, 주일에 목사님 설교를 듣습니다. 월요일에 이찬수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화요일은 소강석 목사, 수요일은 윤석전 목사, 목요일은 이제훈 목사, 토요일은 이영훈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친구의 답변이 참 웃펐습니다. “집사님, 그래도 주일에 본교회 담임목사의 말씀을 듣고 예배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코로나 19 이후 한국교회는 쇼윈도우 예배와 뷔페 예배가 자리를 잡아 고객들을 유치한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대체로 다섯 가지의 예배 신학을 기초로 드려집니다. ① 예배의 주체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② 말씀 선포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캐리그마 하명과 수용 ③ 예배자의 헌신을 보이는 봉헌의 감격 ④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전이하심 ⑤ 삶의 현장으로 파송되는 사명자의 결단 이 중에 그 어느 것 하나도 배제된 것이 있다면 예배는 올바른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예배 신학에 동의하는 목사이기에 이 다섯 가지 예배자의 마음가짐을 오늘 본문과 연관하여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이렇게 적용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자세가 바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권면하신 바로 그 자세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께서 사마리아 출신 여인에게 선언하셨던 메시지를 통해 우리 교우들과 함께 견인해야 하는 올바른 예배에 대한 은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 예배를 즐기는 관객이 아니라, 예배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 8:13〜18절을 읽겠습니다.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 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 나무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우리 교회가 작년 함께 공부했던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가장 절정의 장면인 수문 앞 광장 부흥회 이후,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이스라엘 주민들의 반응입니다. 은혜받은 자는 예배에 모이는 일부터 집중합니다. (모여서) 모여 예배하며 말씀을 듣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렇게 예배하는 자는 말씀을 들은 뒤에 말씀한 대로 순종합니다. (가져다가, 짓고) 다시 모여 말씀을 사모합니다. (율법책을 낭독하고) 예배 공동체가 연이어 구성됩니다. (성회를 열었느니라) 나는 우리 교회가 올바른 예배를 드리며, 그 예배자가 된 결과물을 삶의 현장에서 성도들로 양육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전인격적인 영적 소통이 이루어진 여인과 그리스도는 이제 영의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로 발전합니다. 25〜26절을 봅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 선지자라고 표현했던(19절) 호칭을 이제는 구약성서에서 예고한 메시아(25절)라고 승화시키는 격상의 언어를 에둘러 사용합니다. 아직도 완전히 메시아로 확신하지 못하는 여인에게 주님은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내가 바로 메시아다.” (26절) 우리가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배의 궁극적 목적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배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과 경배를 받으실 분임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함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인정하는 신실한 예배자, 올바른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뷔페 예배가 판을 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어느 예배가 나를 가장 즐겁게 해주고, 나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주는 예배인지를 고르며 예배를 엔조이 하도록 하는 난감한 종교적 취향의 선택을 자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교회의 종교성이 가장 현대적이며, 어느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가 가장 들을 만하며, 어느 교회의 종교적 엔터테인먼트가 가장 흥미로운가를 쇼윈도우에 내걸어놓고 경쟁하는 참담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23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배를 즐기는 자가 아니라,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대로 예배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내 영혼 거룩한 은혜를 향하여 내 마음 완전한 하나님 향하여 이곳에서 바로 이 시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기도 제목 ① 주님, 세인 공동체가 하나님께 신실하게 예배하는 거룩한 지성소가 되게 하옵소서. ② 대면 예배에 온 교우들이 함께 참여하는 상한 심령을 허락하옵소서. ③ 2월 셋째 주, 넷째 주 사역이 은혜롭게 하옵소서. ④ 목회자의 영성이 더욱 진보하게 하옵소서. (영과 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