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30일 수요기도회 설교 (요한복음 37번째 강해) 본문: 요한복음 5:19〜27 제목: 보내신 이의 뜻 서론) 공학이나, 의학이나, 이학과 같은 이과적인 분야에는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실례로 카이스트(KIST)에서는 천재적 두뇌를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20대 젊은 박사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음악도 이런 점에서 유사합니다. 하지만 유독 문학에서는 절대로 젊은 박사들이 배출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문학은 인간과 그 인간의 삶을 다루는 것이기에 약관의 나이에는 인생의 이력이나 삶의 두께가 없어서 젊은 작가들이 아무리 뛰어난 글솜씨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내면의 깊이를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훈 작가의 글을 보면 오이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글 그대로 전문을 소개합니다. 1) 오이지를 담글 때는 어른 한 뼘 정도의 작은 오이를 으뜸으로 친다. 너무 큰 오이는 소금발을 잘 받지 않고, 또 물컹해지기 쉽다. 2) 오이를 깨끗이 씻어서 항아리에 담근다. 3) 소금물을 만든다. 소금의 농도를 맞추기가 어려운데, 계란이 뜰 때까지 소금을 풀어 주면 대체로 무난하다. 4) 소금물을 끓여서, 끓는 상태로 항아리에 붓고 돌을 지질러 놓는다. 5) 반나절이나 한나절 후에 소금물을 따라내고 다시 끓여서 붓는다. 6) 오이지 항아리를 서늘한 곳에 두고 며칠 후, 오이에서 노란색이 올라오면 냉장고로 옮겨 놓는다. 찬물에 뽀득뽀득 씻어 가면서 짠 기를 빼 준다. 너무 짜면 물에 담갔다가 먹는다. 김훈 작가는 이렇게 오이지를 담그는 방법을 소개한 뒤에 이런 메시지를 묵직하게 남겨 놓았습니다. “오이 꼭지는 써서 먹을 수가 없지만, 오이지를 담글 때 꼭지를 따지 않는 까닭은 오이의 온전성을 해치지 않기 위함일 터이다. 의미심장하다. 오이지를 담아 놓은 그 항아리 속의 비밀 중 하나는 ‘시간’의 섬세함일 것이고, ‘있음(being)’에서 ‘됨(becoming)’으로 사물을 전환시키는 데, 그 신적인 작용이 가장 선명하고 육감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단연코 오이지 항아리 안이다.” (김훈, 『연필로 쓰기』, 219〜222쪽) 제가 주목한 김훈의 필체 중의 하나는 단연 ‘신적 작용’이라는 문장입니다. 오이지 담그기는 사람의 손맛이라는 정성과 시간이라는 신적인 작용이 어우러진 작품이라는 극찬이 담긴 글 쓰기였습니다. 이런 삶의 회오리바람 같은 농익은 자국들을 어찌 젊은이들이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훌륭한 십 대 소설가, 시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시선을 돌려 목회를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목회가 무엇인가? 목회도 인간의 삶에 대한 농축된 스토리를 엮어가는 게 목회이기에 목회 역시 젊은 나이에는 성숙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 성찰입니다. 목회가 무엇일까요? “목회란 죄인 된 인간을 의인 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가능합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교우들이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거의 삶의 대부분을 목사로 살면서 교우들의 삶의 언저리에 얹혀살면서 이제 지금의 나이가 되어 보니 어렴풋하지만, 보이는 실루엣에 있기에 오늘 설교를 통해 가늠해 보려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시의 종교적인 헤게모니를 잡고 있던 유대인들과 주고받았던 치열한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인해 적지 않은 공격을 받게 된 주님의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놀라운 점은 안식일에 38년 된 환자를 고쳤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말도 안 되는 공격을 받으신 주님은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수비적 자세를 취하지 않고 도리어 공세적으로 당신을 변호하셨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5:16〜18절을 다시 한번 복기해 보십시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유대인들의 격노를 불러온 주님은 그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당신이 갖고 있는 권한 즉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적 권한에 대해 한층 더 영적 권위를 갖고 피력합니다. 본문 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이 구절을 통해서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첫 번째로 알게 됩니다. 1)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위임(委任)’이라는 단어를 숙지해 보겠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위임이라는 단어는 이런 해석입니다. “어떤 일을 지워 맡기는 것. 또는, 그 맡은 책임. 위기(委寄)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당신의 권위를 비롯한 일체 일을 맡기셨고 또 그 일에 대해 책임 지라는 부담까지 떠안게 하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들에게 자신의 권한 모두를 넘기셨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아들 예수의 권한은 곧 하나님의 권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도식을 그려도 무방합니다.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게 잘 알려진 요한복음 14:〜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되심을 선언한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전적으로 당신의 일을 위임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당신의 일을 위임하시면서 무능력한 아들, 무지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계신 일체 전지함과 전능함을 동시에 위임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능력도 하나님의 능력을 위임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21절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에게 위임하신 뜻은 사람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통 시선을 집중했던 건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와 그대를 먼저 불러 구별하여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리라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을 너무 잘 알고 계신 주께서 이런 신학적 의미 때문에 일찍이 이렇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0절을 말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탄의 그늘 안에 잠식된 세속적 영역의 구도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이 전부입니다. 세속의 영역은 부익부 빈익빈, 약육강식, 적자생존 등등의 단어만이 존중받게 합니다. 더불어 말 그대로 그것들만 생존하게 하고 존중받게 합니다. 그 안에 품어줌, 희생함, 사랑함이라는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결국 나를 위해 그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짓밟고 죽여도 그건 타당성이 있는 일이고,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부추기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위임하고 건네신 뜻은 바로 그런 세상에서 살아감으로 인해서 영적으로 살해되고 있는 자들을 건져내고 그들을 다시 살리라는 엄중한 사명이었습니다.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이 아들을 보낸 뜻이기에 이것을 전제할 때, 분명히 선언할 수 있는 명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지 않게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숙제라는 명제입니다. 언젠가 이런 리포트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서울 모 지역에 있는 학교가 둘로 갈라져 있다는 글이었습니다. 부유한 계층에 속하는 아파트 촌에 사는 아이들과 그 반대쪽에 허름한 빈민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해 같은 학급에 소속하지 않게 학교에서 반 편성을 했다는 리포트였습니다. 무자비한 폭력입니다. 그렇게 반 편성이 된 학교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바로 이놈도 저놈도 사회적 비적응자로 성장하여 반사회적 괴물들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페루 수도 리마에 가면 ‘비야 마리아 델 드리운포’라는 빈민들이 모여 사는 무허가 주택촌이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라 몰리나’라는 부유한 이들이 사는 화려한 주택가가 있습니다. 이 두 장소가 유명해진 이유는 그 사이에 세워진 장벽 곧 담 때문입니다. 최고 높이 3M, 길이가 10 KM에 달하는 장벽이 세워져 가난한 자들이 부유한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행 허락을 받아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자행되는 나라가 페루입니다. 전 세계의 여론과 사람들은 이 장벽을 철폐하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는지 ‘라 몰리나’에 살고 있는 부유한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웬만한 상식을 지니고 있고 평범한 지식인들을 그 담을 지칭해 ‘무로 데 라 베로궨사’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수치의 벽’이라는 뜻입니다. 진보적 지성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반 일리치가 오늘의 세속적 참담함을 이렇게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풍요에 사람들이 중독되고, 그것이 문화 속으로 한 번 배어들면 ‘가난의 현대화’가 생겨난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34쪽) ‘가난의 현대화’에 길들여지면, 21세기 언어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편 가름은 상식이 되고, 네 편 내 편의 갈라치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적 기호가 되고, 부자와 빈자의 구분 짓기는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일로 합리화되며, 우등한 자와 열등한 자로 차별화하는 것이 상식이 되는 지옥 그 자체가 되는 세상이 바로 오늘 일입니다. 마땅히 교회는 사람을 죽이는 이런 일에 분연히 반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께 위임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세인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뜻을 잘 이해하고 살아내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2) 하나님이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뜻은 심판자가 주님임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원래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그 심판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아들에게 심판의 권한을 위임하신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들이 아들을 공경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밝히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체가 되심을 본문에서 선언하신 셈입니다. 본문 24〜25절은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선명하게 구분한 고전적인 구절입니다. 곱씹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주님과 하나님이 하나이시면서 동등 됨의 신분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생을 얻는다는 것과 같음을 명징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는 곧 에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와 연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신앙의 궤적에 있는 이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① 영생을 얻는다. ②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③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무슨 의미입니까?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목회가 무엇일까요? 저는 설교의 서두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회란 무엇인가? 목회란 죄인 된 인간을 의인 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이게 가능하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답변하겠습니다. 가능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뜻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동의하는 자에게 이런 신비로운 구원의 은혜가 임하기에 목회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뜻을 강변하고, 교육하고, 지도함으로써 죄인을 의인으로 신분 변화시켜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임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26〜27절을 마지막으로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상당히 통쾌한 은혜의 궤적을 요한복음 기자가 우리 독자들에게 보고해 줍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있는 ‘생명’ 즉 ‘조에’(ζωὴ)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주어 그를 믿는 자마다 ‘조에’를 얻게 하신다는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저와 여러분을 적지 않게 감동 받게 합니다. 어떤 감동입니까? 주님이 심판의 주님이시라는 확신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생을 드리며 섬겼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이 말은 결국, 저와 여러분의 선택과 집중이 절대로 헛되지 않은 해피엔딩의 드라마를 썼다는 점에 대한 도장 찍기 즉 사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로 인치심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믿어 구원의 장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엄연하고도 확실한 구원 프로젝트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가장 궁극적이고도 결정적인 목적입니다. 이 뜻을 믿는 자들은 지난 부활주일에 나누었던 말씀이 새삼 은혜의 울림으로 울려옴을 느낍니다. 고린도전서 15:57〜58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의 갈파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설교를 한다는 것은 말할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 말할 것은 복음에 대한 확신이다.” (존 스토트, 『설교』, IVP, 40쪽)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존 스토트 목사의 말대로 목회자가 자기가 말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건 정말 사기극이지 않겠습니까? 지난 세월, 강단을 지키며 달려왔습니다. 강단을 지킨다는 것은 이론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단은 피로 물들여져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삶과 몸에서 터져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번 강단에 오를 때마다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혈이 설교를 통해 흘러넘쳐야 합니다. 그 피에 묻어나오는 주님의 음성은 두 가지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심판의 주로 서서 내 (주 예수 그리스도)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하나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증명하실 심판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아들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믿으십시오. 그것이 믿는 자의 도리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기도 제목 1) 하나님, 우리 교회가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2) 하나님, 우리 세인 교회에 말씀의 갈급함으로 방황하는 이들을 보내 주옵소서. 3) 하나님, 내일 월삭 예배를 축복하셔서 은혜로운 5월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