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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12월 25일 성탄절 설교: 변방에서2024-12-24 13:08
작성자 Level 10

20241225일 성탄절 설교

 

제목: 변방에서

본문: 마태복음 2:1-12

 

서론)

 

지난 주일, SBS 텔레비전에서 2024년 연기대상을 발표했습니다.

드라마는 잘 모르지만, 굿 파트너라는 작품에서 열연한 배우 장나라 씨가 연기대상이라는 영예를 거머쥐었다는 보도를 인터넷판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고, 항상 그럴 때마다 크리스천 연기자들이 수상 소감을 밝히곤 하는데, 신실한 크리스천 연기자로 알려진 장나라 자매의 소감이 궁금해져서 유트브에 올라온 그녀의 소감을 찾아보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저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그녀가 첫 번째로 운을 떼며 입을 열어 고백한 이 고백이 왜 이리 감사하고 또 감사한지 순간 울컥했습니다.

인기 배우로 살았고, 인기 가수로 살았던 그녀가 세인들에게 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겠습니까?

최고의 배우이자, 인기 정상에 오른 연예인이기에 수많은 이들이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여배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이렇게 고백하면 전 국민이 보고 있는 브라운관 앞에서 선포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과연 무엇일까?

장나라 자매가 그 답을 여실히 보여주고 선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는 아무런 능력이 갖고 있지 않은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장면을 예레미야 1장은 여과 없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고합니다.

예레미야 1:47절을 만나보십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전적인 부르심이 두려웠습니다.

그 두려움을 가득 안아야 했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고백합니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르나이다.”

여기에 아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아르’ (נַ֖עַר)는 정확하게 나이로 환산하기는 어렵지만, ‘소년혹은 청년을 의미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나아르는 나이를 정확하게 한정하기는 어렵지만 보통 소년이나 청년을 가리킨다. 청소년기는 경험이 부족하고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언변과 설득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다.” (차준희, 예레미야의 영성, 새물결플러스, 58)

미성숙한 상태, 설득할 만한 능력이 부족한 상태가 나아르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를 보면서 도리어 반전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이 목회를 하는 제게는 적지 않은 위로가 됩니다.

미성숙하고, 언변도 어눌한 무능한 라고 고백하는 겸손이 있는 예레미야였기에 하나님은 그를 부르신 것이라는 역발상의 은혜 말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변방에 있는 나라는 분명한 인식을 지닌 겸손한 자를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반전의 은혜입니다.

오늘은 2024년 성탄절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변방에서라고 정했습니다.

왜 설교 제목을 이렇게 설정했는지 지금부터 교우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본문 기자인 마태가 대단히 의도적으로 기록한 흔적이 보이는 텍스트입니다.

본문 줄거리를 우리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던 날,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유난히 크게 보이는 별을 보고 여행을 했는데, 그 별빛이 멈춘 곳이 바로 예수께서 탄생하신 그 장소였고, 그들은 가지고 온 예물을 예수께 드렸다는 아주 오래전 어렸을 때, 고향 교회에서 성탄절이 되면 항상 어김없이 성극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동방박사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부연하자면,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먼저 찾았던 곳은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이 아니라, 헤롯이 거주하던 예루살렘 왕궁이었고, 그곳에 도착한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찾아왔는데 그곳이 어디인가를 헤롯과 그 측근들에게 질문하자,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던 헤롯은 물론, 그의 참모들까지 긴장해서 그곳이 어딘가를 추적하자, 미가 예언자의 예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궁정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곳이 베들레헴임을 알려주었고, 태어난 아이를 죽일 생각이었던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나면 나도 경배하게 그 장소를 나에게 알려달라고 귀띔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태어난 아기를 살해하기 위한 은밀한 계책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를 만난 동방박사들은 예수께 정성스러운 예물을 드리고 돌아갔는데, 돌아가는 길에 그들의 꿈에 하나님이 현현하셔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다른 길을 택해 돌아갔음을 마태복음 기자는 보고합니다.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이렇게 보고한 복음서 기자는 그다음의 무대에서 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현몽해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니, 베들레헴에 애굽으로 피신할 것을 명했고, 순종하여 요셉이 식구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간 이후 헤롯이 동방박사들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 있는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을 몰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음을 고발합니다.

어찌 보면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있기까지의 아픔이 있었음을 마태복음 기자는 토로하고 싶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주어진 본문을 통해 2024년 성탄의 절기에 주께서 하명하시는 영적 교훈을 찾아내야 합니다.

조금 더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우리는 성탄절 절기에 합당한 성서 본문에 대해 익숙한 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성탄절 본문 설교로 정하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은 불편함이 있는 본문입니다.

적지 않은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아기 예수 탄생으로 인해 죄 없는 두 살 미만의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 거지?

너무 아픈 해피엔딩이지 않은가?

아기 예수로 인해 벌어진 이 아픔에 대해 뭔가 신학적인 답을 제시하는 것이 맞지 않나! 등등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이런 불편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여러 주석서를 공부했습니다.

신학적 해제에 대해 나름 공감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는가를 찾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온 해석은 이것이었습니다.

마태는 예레미야의 말을 인용하여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라헬의 울음소리와 베들레헴 여인의 울음을 연결시킨다. 이것 역시 예언의 성취인가? 그렇다면 이 무고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예언을 인용하며 사용한 서술어에 주목해야 한다. 15절은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일이 하나님의 의지였음을 드러낸 반면, 18절은 함이 이루어졌느니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김기석,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 두란노, 3637)

김기석 목사를 비롯하여 몇몇 신학자(모이세스 마요르도모, 양용의)들이 이 주장에 대해 동의합니다.

다시 말하면 베들레헴에서 자행되었던 유아 학살은 전적으로 잔인했던 헤롯의 만행이었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해석이 적절합니다.

그렇다면 불편하지만, 마태복음 2장 본문에서 우리들이 2024년 성탄의 절기에 새겨야 레마는무엇일까요?

인류 구원의 역사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구속사는 휘황찬란한 대도시 예루살렘의 왕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베들레헴이라는 변방에서 시작되었음을 본문이 선언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세인 지체들이 주목해야 하는 점은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변방 중심에서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이 말을 레마로 바꾸어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변방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며 연이어 이 교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기 예수는 변방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본문 46절을 보겠습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동방박사들은 자기들이 본 별은 통상 왕이 탄생할 때 뜨는 별임을 알고 당연히 왕이 거주하고 있는 헤롯의 왕궁을 방문한 것입니다.

왕궁에 도착한 동방박사 일행은 당연히 왕이 탄생한 장소를 물었는데, 헤롯에게는 자신에게 반역할 인물의 탄생으로 여기고, 궁정에서 녹을 먹는 유대 종교학자들에게 유대인의 율법에 기록된 메시아 탄생의 역사성을 되물었습니다.

이 하문을 받은 종교인들이 그에게 조언한 것이 바로 미가 5:2절에 적시된 메시아 탄생의 비밀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메시아가 탄생할 장소가 베들레헴임을 자문했고, 그 결과 베들레헴의 유아 학살이라는 비극을 초래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자들이 바로 궁정 유대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헤롯에게 메시아 탄생의 장소를 알려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미가 예언자가 예언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을까에 대한 질문입니다.

헤롯에게 메시아 탄생의 장소를 알려줄 경우, 헤롯이라는 잔인한 자가 서슴지 않을 만행에 대해 그들이 몰랐을까?

고도의 계략가이자 정치 9단의 헤롯이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그냥 둘 리 없음을 유대 종교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헤롯에게 메사아 탄생 장소를 알려줌으로써 유아 살해의 동기를 부여하게 만든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도래를 말하고 있는 유대 율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입지와 부를 추구하는 종교 장사꾼이라는 씻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걸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에 보면 무신론자 이반이 대심문관으로 상징화되어 예수를 심문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걸작의 내용 중에 가장 걸출할 만한 내용인 바로 이 장면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을 더해 줍니다.

대심문관은 죄인의 모습으로 있는 노인(예수의 상징)을 화형에 처한다고 언도(言渡)합니다.

이유는 예수가 사탄에게 당했던 세 가지 유혹,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라, 나에게 절하라는 유혹을 거절함으로써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육체적인 욕구를 취하지 못하게 했다는 죄목입니다.

내일이면 너는, 내가 손끝을 까딱하기가 무섭게 네가 우리를 방해하러 왔다는 이유로 너를 태워 버릴 저 장작불에 뜨거운 석탄을 집어넣기 위해 달려온 온순한 양 떼를 보게 될 것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의 장작불로 태워 버릴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니까, 내일 화형에 처할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548)

작품 속에서는 무신론자 이반이 신실한 그리스도인 동생 알료사에게 빗대 선언한 글이지만, 오늘, 이 시대에 무신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단골 메뉴로 사용되는 소중한 문학적 자료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대목에 주목하는 이유는 핍박의 대명사인 대심문관 이반의 이전 이력 때문입니다.

그는 독한 판결을 내리기에 앞서 자신의 과거 경력을 표출합니다.

나도 한때 광야에 있었고, 메뚜기와 풀뿌리로 연명했으며, 나도 네가 축복해 주었던 그 자유를 나도 축복했고, ‘수를 채우고 싶은 열망을 품고 너의 선택받은 자들, 강한 척하고 강한 자들의 대열에 합류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위의 책, 548)

성탄절 아침에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머리가 커진 상태로 종교적 이력의 내용들이 쌓이고 또 쌓이면 언제든지 대심문관 같은 괴물로 전락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메시아에 대한 신앙적 대망이 아니라, 굳어지고 학습된 종교적 지식으로 껍데기를 채우면, 언제든지 나는 궁정에서 누리는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는 종교 장사꾼으로 변질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기 예수의 탄생지는 예루살렘의 왕궁이나, 호화찬란한 성전이 아니라,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변방 베들레헴에 있었던 동물들의 처소였음을 되새김질하고 복기해야 합니다.

이것을 잃으면 신앙을 잃고, 아기 예수와는 전혀 관계없는 아무 것도 아닌 종교인으로 전락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루마니아가 소비에트의 장막 하 공산 치하에 있을 때, 순교적 각오로 지하교회를 이끌었던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의 촌철살인이 오늘, 더더욱 새겨지는 성탄절입니다.

종교 한 근을 요리하기 위해서는 상식 아홉 근을 더해야 합니다.”(김기석,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 두란노, 2930)

무엇보다도 2024년 성탄절 아침, 성경이 말하는 상식에 충실해야겠다는 다잡이 하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아기 예수는 변방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내가 섬기는 세인 교회가 변방에 주목하고 변방을 섬기는 교회이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섬기는 세인 교회 지체들이 변방에 주목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4, 성탄절 아침,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