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5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13) 제목: 안락함과의 의도적 별리(別離) 본문: 요한복음 2:12 서론) 저는 교회에서 강해를 계획할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6개월 전부터 준비를 시작합니다. 오늘 함께 나누고 있는 요한복음, 주일에 공유하고 있는 요한서신도 별반 다르지 않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단행본, 주석, 연관된 논문이나 저널들을 모아 읽고 공부합니다. 강해 텍스트 전체를 조망하려면 6개월 정도가 소요되기에 이런 과정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더불어 우리 교우들은 이제 너무 익숙해져 있기에 질문하는 분이 거의 없지만, 저는 강해 설교를 진행할 때 단락 설교를 합니다. 예컨대, 1장을 강해한다고 치면 그 한 장을 한 시간에 강해할 수 있는 능력이 제겐 없습니다. 분향도 너무 많고, 그 많은 분량에서 단 한 가지로 교훈과 레마를 찾는다는 것은 적어도 제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불어 제 설교의 형식인 one point 설교로는 전체 강해를 다루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이유로 단락을 구분하여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런 방법을 취하며 강해 설교를 진행해 왔습니다. 요한복음 2:1〜11절에서는 가나에서 보이신 첫 번째 이적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적 담화를 기록했고, 13〜22절은 소위 ‘성전 청결 사건’이라고 제목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척결하신 예수님의 혁명적 사역을 소개합니다. 이 두 사건은 2장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예수님의 사역이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독자들에게 보고하고 있지만, 이에 반하여 12절은 동떨어진 기사로 외롭게 한 절에서만 소개되고 있기에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스리슬쩍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한복음 강해를 위해 제가 준비한 자료들이나 서적에도 상당수 12절 해석을 생략한 자료들이 허다합니다. 12절을 단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자료들이 많지 않아서 조금은 힘들었지만, 오늘 본문인 12절 단 한 절에 안에 들어 있는 영적 레마가 지대한 교훈을 줄 수 있기에 교우들과 나누며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영적 집중력을 놓치지 않는 오늘 강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본문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판 성경에 번역된 ‘그 후에’는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이 일이 있은 후”(Μετὰ τοῦτο)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확합니다. 이 일은 말할 것도 없이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이 있은 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한 여론적인 분위기를 추측해 볼 때,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을 시기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여론적인 인기몰이는 시작하신 주님이 가나에서 이동하신 장소가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약 20마일 즉 32 KM 정도 떨어진 장소였는데 갈릴리 호수 북 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은 호수를 안고 있는 평지였기에 구릉 지역인 가나에서 가버나움으로 이동하신 주님의 동선 표현을 내려가셨다(went down)고 표현한 것은 적절한 묘사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 홀로 움직이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이었던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마 13:55),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이동하셨음을 본문이 보고합니다. 물론 이때 같이 이동했던 제자와 형제들이 4명과 12명 제자 전부였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이동 그룹은 가족 그룹과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측근들 중심이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렇게 가버나움으로 이동한 주님의 그다음 보고를 요한복음 저자는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독자들에게 알려줍니다. 본문 하반절을 다시 새겨보겠습니다.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오늘 우리는 13번째 요한복음 강해에 주시는 큰 감동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은 가버나움에서 가족과 함께 여러 날을 머무르지 않고 유월절이 되기 전에 가버나움을 떠나셨을까요? 불트만은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공적인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때가 되었을 때 가버나움을 떠났으나,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곳에서 계속해서 머물렀음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불트만,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 304쪽)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머문 시간은 정말로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보고한 것입니다. 그 짧은 시간을 주님은 가족과 함께 지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 본문 이후,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바로 그 현장에 요한과 함께 다시 등장하기 전까지 요한복음의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7:5절을 소개합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인 능력을 보이며 활동하시던 클라이맥스의 정점을 보일 때조차도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님의 구주 되심을 믿지 않았다는 보고가 등장한 것 말고는 이들도 요한복음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대단히 의도적인 요한복음 저자의 저술 기법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가족과 함께 시간이 대단히 짧은 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이후, 주님의 육적인 가족들은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왜 요한복음의 기자는 이런 강수를 썼을까요? 다음 주에 살필 요한복음 2:13절을 읽겠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유월절이 가까이 이른 시기에 주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종교적인 적대자들이 우글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고 기자는 보고합니다. 이 말은 성전 청결 사건이라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이제 시작되는 것을 알려줍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마리아의 아들로서 살았던 이 땅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이제는 구속사를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공생애를 삶으로써 가족과의 의도적인 별리(別離)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본문의 정황입니다. 이 별리가 우리에게 어떤 영적인 통찰을 줄까요? ※ 안락함과의 단절을 시사합니다. 주님이 가족과 함께 시간은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성경 내증에 기록된 증언에 의하면 주님이 30세 정도의 청년 시기까지 가족과 함께했음을 우리는 이미 주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정황은 공생애의 때가 이른 것을 직감한 예수님은 익숙했던 가족공동체에서 떠나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과감하게 따뜻했던 어머니의 품을 떠났음을 알게 해줍니다. 물론 이런 결단은 동고동락했던 형제들과도 별리한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아주 세밀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기에 예수께서 어떤 과정을 두고 가족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예수께서 단호하게 가족과 별리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후에도 복음서에서 증언됩니다. 마가복음 3:31-35절을 만나 보십시다. “그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이런저런 기적을 보이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역사를 나타내시자 가장 강하게 위기의식을 느꼈던 유대 종교의 서기관들이 예수의 능력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의지한 사탄적인 행태라고 부화뇌동하는 여론몰이를 하면서 예수님을 압박합니다. 급기야 예수님의 친족들에게까지 이런 호도된 여론이 강제되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역에 제지를 가하라고 압박하기에 이릅니다. 유대적인 압박 여론이 드세지자,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형제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가기 위해 예수께서 계신 처소를 찾아옵니다. 이런 기회를 호기로 잡은 예수님의 반대 세력들이 가족들이 너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밖에서 너를 기다린다고 으름장을 놓자, 주님이 선언하셨던 선포가 싸늘하기까지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 3:35) 왜 주님은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가족에게 대하셨을까요? 물론 신학적인 답을 내놓자면 주님이 이 일을 행하셨을 때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속사를 이루시기 위해 성역을 감당하던 때였기에 인정이나, 혈연관계를 통해 약해질 수 있는 일체의 일들을 방어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받는 영적 교훈은 더 절절합니다. 의도적인 안락함, 편리함을 갖고서는 구속사의 위업을 이룰 수 없음을 주님이 아셨기에 주님은 철저히 이런 일과 별리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은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으로 떠나시는 때까지의 기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기간만을 함께 하신 주님은 어머니, 형제, 제자들과 떨어지기로 별리하십니다. 힘들고 외롭고 지난한 일이었지만, 주님은 그 길을 과감하게 선택하셔서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다른 한 사람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에게서 찾아야 하는 또 다른 측면의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마리아 역시, 아들이 가족과 별리할 때 그를 붙잡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마리아는 아들이 가족과 별리하려는 것을 만류하지 않았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마리아 역시 육신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조금도 의심없이 믿었기에 인간의 정이나, 개인적인 아쉬움에 천착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리아도 어머니로서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나, 유익함을 포기한 것입니다. 마리아도 자신의 안락함에서 의도적으로 별리한 셈입니다. 얼마 전에 배우 신애라씨가 입양한 큰딸이 버클리에 유학을 떠났을 때 직접 딸아이에게 쓴 편지를 소개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전문을 인용하겠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던 그 조그맣던 딸이 어느새 다 자라 대학에 갔다. 이렇게 오래 멀리 떨어지는 건 처음이라 자꾸 눈물이 난다. “사랑하는 귀한 은이야! 우리집에 선물처럼 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너는 존재만으로도 우리의 기쁨이고 감사였단다. 어렵고 힘들 때 늘 상 찾던 엄빠는 옆에 없지만 한순간도 너를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부르렴. 새로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너를 너무너무 축복해. 알지?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지?” 배가 아파 낳은 딸은 아니지만, 마음 아파 낳은 딸을 향한 절절한 러브 레터를 읽다가 그들이 그리스도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특히 엄마 신애라 자매가 엮어놓은 딸을 향한 사랑의 밀어들은 정상적인 엄마들의 공통 분모인 언어입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헌신적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마리아 역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아들 예수가 걸어야 하는 길에 대한 엄청나게 험난한 과정을 아마도 마리아는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붙잡지 않은 것은 아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아들을 포기해야 하는 별리를 당연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관련된 이재철 목사의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어머니에 지나지 않는 자기 곁을 떠날 때에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재철, 『요한과 더불어 1』, 202쪽) 엄청난 성찰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안락함을 유지하겠다는 마음과 단절했기에 아들 예수가 의도적으로 자신과 별리하려는 행위에 대해 동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신앙생활은 익숙한 것으로부터 나를 단절하고 수용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안락함과 편리함의 영역에서 나를 단절하고 동의하는 일입니다. “2,000년 전에 죽은 로마의 사형수여! 그대가 내 품에서 심장을 오려가듯 외동딸을 빼앗아 가는구나. 그대는 죽은 사람인가? 산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생명의 약탈자여! 이 말은 아버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너무 너무 사랑해서 아무리 붙잡아도 기어이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나는 외동딸을 보내는 프랑스 출신의 한 老 시인이 외친 외침이다.” (김준곤, 『예수 칼럼』, 23쪽) 예수께서 가셨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안락하지 않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삶은 편안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예수께서 가셨던 길을 따라가려면 불편한 것을 감내해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과 동행 해야 하며,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9:19-21절에는 예수를 따르겠다고 결심한 자들에게 교훈하는 정말로 중요한 교과서적인 따름의 방법을 알려 주는 시금석이 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열왕기상 19:19-21절을 읽습니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겨릿소를 붙들고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내가 갖고 있는 겨릿소를 불태우는 일입니다. 그러니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단히 호의적인 장소였습니다. 기적도 제일 많이 베푼 장소이고, 제자들의 고향이기에 병행하여 나름 예수께 열려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무슨 일을 해도 이해하는 어머니가 있는 곳이었고, 형제들이 함께 하던 곳이었기에 예수님에게도 늘 맘이 편한 곳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지뢰밭 길이었습니다. 여기서 꽝하고, 저기서 꽝 하는 자들이 충돌하는 대단히 불편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가버나움에서 잠시 거했습니다. 이어 곧바로 숨 막히는 장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음을 본문 정황이 우리 독자에게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의 경주는 안락한 곳에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인 김병도 박사는 자신의 책 『도전력』에서 신학자 존 세드에 어록을 남겼습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항구에 안전하게 묶어두려고 배를 건조한 것이 아니다.” (김병도, 『도전력』, 해냄, 132쪽) 뜻깊은 성찰입니다.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성을 향하여 항해하는 배에 승선하는 자들이라고 믿습니다. 항구에 정착한 배에 승선해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파고가 넘치는 대양에서 항해하는 자들입니다. 멀미도 하고, 구토도 할 수 있는 치열한 정글에서 살아내야 하는 이들입니다.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은 항해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는 점입니다. 안주하는 자와는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신앙의 경주는 안락함과 의도적으로 별리하는 삶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 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 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곳 내 아버지 너른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 둔 내 소망 있네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