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2024년 10월 2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14) :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1)2024-10-02 15:09
작성자 Level 10

2024102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14)

 

제목: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1)

본문: 요한복음 2:13-21

 

서론)

 

영국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랍비인 조너선 색스가 차이의 존중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도덕이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이 세상에서 새삼 회복해야 할 가치는 책임’(responsibility)이다. 즉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미래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책임감이다.”(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 149)

이 글을 만난 지가 오래되었지만, 마음에 와닿았기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2024년을 사는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임한 비극이 있다면 잘못된 것이거나, 잘못되어져 가는 것에 대해 반응하는(responsible) 능력(ability)이 무감각해졌다는 점입니다.

뭔가 잘못되어 가는 과정이 있으면 그 과정의 이유에 대하여 곱씹고 또 곱씹어서 그 잘못됨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데 그 민감함이 사라졌다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비극의 핵심은 아닐까 싶습니다.

인공지능이 잠식하고 있는 시대니까, 백번 천번을 양보하여 세속의 영역은 그렇다고 치부하십시다.

하지만, 이런 시대이니까, 적어도 공동의 선과 유익,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보루이자, 마지노선이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세속의 영역이 있는 자들이야 고개를 흔들겠지만, 저와 여러분이 흔들리지 않아야 영적 자존감은 교회만이라도 세상에 의해 무너진 영적, 윤리적, 도덕적 보루가 되어야 한다는 정신을 갖는 것입니다.

캐나다 밴쿠버 기독교세계관 대학원 교수인 최종원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종교란 마지막으로 찾아갈 희망의 공간인지도 모른다.” (최종원, 교회, 경계를 걷는 공동체(비아토르, 244)

저는 최 교수의 갈파에 동의하면서 그의 의견을 당연히 기독교라는 영역으로 그 외연을 좁힙니다.

저는 교회는 올바르게 걸어가야 하는 방향성에 대해 책임과 사명을 완수하고 반응할 수 있는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공동체라는 주존감으로 무장해 있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작금, 한국교회의 상태는 녹록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세속의 시각이 따갑기가 그지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 19’의 참극을 겪으면서 교회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의 공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설자리가 더더욱 비좁아졌습니다.

숨쉬기조차 힘들어져 있는 상태인 것을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상황이 이러니, 교회는 좌절해야 하고 말아야 하는가?

교회는 재생 불량의 상태로 누워 있어야 하는가?

만에 하나, 이런 운명론과 비관적 예측에 속수무책이라면 오늘, 제 설교가 교우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천만다행인 것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은 본문이 신약 성경 정경 안에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오늘 본문 성경 안에서 그로기 상태에 있는 내 사랑하는 교회를 회복시키고 다시 부흥의 물꼬를 트게 할 수 있는 원천적인 교훈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안도의 숨을 쉬게 됩니다.

 

본론)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성전 정화 담론은 다른 공관복음서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성전 정화 담론의 시기는 예수께서 담당하셨던 예루살렘 여행 즉 소위 예수님의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인 월요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소개되고 있기에 공생애 말년 시기로 보는 반면에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에는 공생애 사역 초기의 일로 보고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요?

루돌프 불트만이 질문에 답한 글을 소개합니다.

요한은 마가보다 더 높이 평가한 독립된 연대기적 자료를 갖고 있었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성전 정화 사건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성전 정화 담론을 복음서 앞에 배열시켰다. 나는 후자의 입장이 더 그럴듯하다고 본다.” (불트만,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 306)

무슨 말인가 하면, 요한복음 저자가 성전 청결 사건을 공생애 사역의 초기에 설정한 것은 유대 종교 기득권이라는 무소불위의 세력에 맞선 예수님의 사역은 초기부터 강력했음을 설명하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불트만의 입장을 지지한다면 오늘 본문인 성전 정화 즉 청결 사건은 예수님의 행하셨던 공생애 사역의 초기도 매우 강렬했다고 보아도 무방한 엄청난 사역으로 간주해도 됩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보인 인파들과 그 성전에서 자행되던 일들을 목격하신 주님이 반응한 내용이 본문 141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이 구절을 전제해 설명한다면 주께서 엄청 과격해 보이는 행동을 보이신 이유의 근간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적어도 주님이 갖고 있었고, 양보하지 않았던 성전에 관한 인식은 성전 안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장사하는 장소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였습니다.

왜 주님은 이런 의지를 소유하고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병행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답해 보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11:17절입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그렇습니다.

주님이 갖고 계셨던 성전에 관한 인식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인식이었습니다.

그런 성전을 지금 유대 종교 권력과 그 권력에 굴복당한 이들이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 주님이 분노하셨음을 보고합니다.

장사하는 장소라고 빗댄 주님의 성토는 그 유명한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라고 하는 7:11절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토해 내신 그 작태였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렇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범죄에 대해 주님이 질타하신 것이 성전 정화 담론의 이유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본문을 중심으로 몇 주간 교우들과 중요한 메시지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왜 예루살렘 성전 종교가 강도의 소굴 즉 도둑의 소굴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오늘 그 첫 번째 이유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성전을 우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이 얼마나 은혜를 사모했는지 에스라, 느헤미야서에 기록되어 있는 제2 성전 건축, 더불어 그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다시 수축한 성벽에 대해서 수없이 공부하며 이해해 왔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제2 성전 터에 헤롯이 야심 차게 다시 세운 성전이 본문에 기록된 예수께서 올라가서 장사치들을 다 쫓아 버린 헤롯 성전입니다.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헤롯은 기원전 1920년부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배로 확장하는 개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마차 1,000, 건축 숙련공 10,000명을 동원하고 수많은 석공과 목공을 훈련시켰고 많은 재정을 투입하여 대대적인 건축 사업을 전개하였다. 성전 건축이 끝나자, 이 일에 동원된 18,000여 명 이상의 노동자가 실직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 성전은 헬라식으로 개축된 것이었다. 성전 주위에는 회랑을 만들고 헤롯이 아랍에서 가져온 것과 다른 야만국에서 빼앗거나 헌납받은 약탈물을 전시하였다. 무엇보다 경건한 유대인들을 자극한 것은 성전 회랑 정문에 로마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거대한 독수리상을 막대한 비용의 금으로 세운 것이다. 이는 종교적으로 우상숭배를 금지한 제2 계명을 어긴 신성모독인 동시에 로마의 식민 지배를 상징하는 국가적 모욕이었다.” (허호익, 예수 그리스도, 동연, 389)

허 박사가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제2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과 제3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헤롯 성전은 그 태생부터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전혀 과언이 아닙니다.

3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헤롯 성전은 명목을 유대인들을 위한 성전이라고 포장했지만, 전혀 유대적이지 않으며, 하나님을 위해 지었다고 하지만,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한 우상숭배 성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헤롯 성전 개축 당시의 유대교 정신을 놓고 보면 경건한 유대인(하시딤)에 의해 전혀 수용 받지 못한 우상단지가 헤롯 성전이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종교 주의자들로 변질된 산헤드린 직업적인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성전은 그대로 수용되었고, 그것을 수용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헤롯과 연대하여 각종 프리미엄을 취했고 그것들로 인해 기득권 종교 지도자들은 정치와 야합하여 타락의 극을 달렸던 것입니다.

이제 다음 주 수요일부터 더 세밀하게 살피겠지만, 이런 먹이 사슬 구조 및 종교, 정치적인 역학 구도에 의해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산헤드린 유대 기득권주의자들은 더할 나위 없는 부와 명예와 권력에 길들여져서 한없이 타락해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하나님이 없는 혹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소굴로 만들어 버리는 참담한 짓을 자행한 자들이 헤롯 성전주의자 즉 산헤드린 공회의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지만, 하나님이 없는 장소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역사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살펴본 성경 내증이지만, 오늘 본문에 연관하여 너무 적절하기에 다시 한번 복기하겠습니다.

사도행전 8:31절을 읽겠습니다.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 내가 섬기는 교회가 절대로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장한 각오로 절치부심하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약 1,500km입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경우에도 약 2, 3일이 걸리는 먼 거리입니다.

하지만 제 3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 받은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측근인 내각 참모 한 명이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자신의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목인 가사에서 빌립 집사를 만났는데 그때 읽고 있었던 이사야 53장의 내용을 이해하냐고 질문하는 빌립에게 내시가 읍소한 말씀이 사도행전 8:31절입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내시가 목적하여 갔던 예루살렘 성전에 지니고 있었던 영적 무기력함을 단적으로 고발한 메시지에서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습니다.

?

이 무기력함이 우리 교회에 상존할까봐.

교회가 갖고 있는 최고의 위기는 강단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쏟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대할 것이 없는 강단, 영적으로 도전과 교훈과 어찌할꼬!의 탄식을 내뱉는 돌이킴을 주지 못하는 무력함이 있는 강단, 재앙입니다.

강단이 무력하면 그 강단의 기대감을 갖고 있는 자들이 가사(현장)에서 절망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의 성전은 껍데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선포되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무너지고 쓰러지고 자빠질 때, 그들이 다시 부둥켜안고 일어설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교회, 문을 닫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어제 독서 토론의 시간에 담임목사의 5번째 글을 나누는 지체들이 공통분모를 갖고 같음의 의견을 도출한 것 중의 하나는 세인 교회가 추구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교집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에 말씀의 부재는 최고의 재앙입니다.

예레미야 7:21-24절을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소의 말하는 예레미야가 행한 성전 설교의 뒷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위해 드린 제물이 아니라, 자기 만족으로 야훼께 겉멋으로 드린 제물을 지적한 야훼 하나님께서 드린 자들을 향하여 불을 뿜어낸 말씀이 읽어드린 예레미야 7:21-24절 메시지입니다.

특히 21절 번역은 충격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풀면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이 종교적인 쇼 엔터테이먼트로 너희들의 만족을 위해 드린 번제물의 고는 너희들이 먹어라. 나는 먹지 않겠다.”

이 구절을 가장 큰 충격 요법으로 번역한 성경이 공동 번역 성경입니다.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선언한다. 친교제에다가 번제를 보태어 바치고, 그 고기를 너희들끼리 처먹어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한국교회가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열이 40도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열병을 앓았고, 또 지금도 앓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혼수상태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단말마적인 단어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가닥을 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집을 하나님의 집답게 보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레마를 통해 또렷이 기억하며 우리들이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교훈은 세인 교회 건물이나 외형을 금보다 귀하게 여기는 삶이 아니라, 세인 교회를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살아내는 삶에 천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삶을 전제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와 교회 건물은 섬기는 대상이 아닙니다.

성도가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하는 것은 교회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보내 주신 주군이신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우리 가슴에 새긴 주의 십자가 사랑

나의 교회를 사랑케 하네

주의 교회를 향한 우리 마음

희생과 포기와 섬김과 고난

하물며 죽음조차 우릴 막을 수 없네

우리 교회는 이 땅의 희망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합심 기도 제목

 

세인 교회가 하나님이 머무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세인 교회는 비본질이 아니라 본질이신 예수께 집중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세인 교회를 하나님의 도구로 자유자재 사용하여 주옵소서.

세인 교회 강단이 오염되지 않게 하옵소서.

세인 교회에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가득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