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0일 부활주일 설교 제목: 사망의 사망을 선언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15:52〜58 서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시간 낭비하지 말라. 네가 숨이 멎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거든 그때 가서 죽음에 대해서 실컷 생각해 보거라. 왜 지금 삶을 제쳐놓고 죽음에 신경 쓰는가.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나게 마련이다.” (법정, 『아름다운 마무리』, 문학의 숲, 54쪽) 불교계의 유명했던 이판승 법정의 유고집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불교가 죽음에 관해서 설명할 때는 이 정도의 철학적 사유로 가름합니다. 이 정도만 사유해도 꽤 괜찮은 생각하는 삶이라고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에 비해 죽음에 대한 해석과 성찰에 있어서 불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세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부활절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본문이 바로 그 증거 자료입니다. 본론) 오늘은 본문 마지막 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바울이 기록한 58절은 소위 말하는 기독교 교리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부활 章이라고 부르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최종적인 결론 멘트이기도 합니다. 새 한글 번역 성경은 58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굳건하게 서서 꿈쩍도 하지 말고, 주님의 일을 언제나 더 많이 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습니다.” Livig Bible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미래의 승리가 확실하므로 항상 강하고 꾸준히 주님의 일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은 부활이 없다면 아무것도 헛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 개의 번역 성경 버전을 종합하면 이런 결론이 도출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 신앙은 신앙 이유의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58절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부활 신앙을 사수하며 그것을 지켜나가는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의 메시지로 다가오며,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런 위로의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어느 부분이 그렇습니까? 먼저,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를 살펴 보십시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고’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코포스’(κόπος)는 ‘손이 칼에 베인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58절의 기록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부활을 주장하려면 피 흘리는 고통을 수반하고 있는 수고를 담보해야 했다는 시대적 정황을 알려주는 보고이기도 합니다. 추론컨대, 고린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부활 신앙을 말하는 자들은 지성적이지 못한 무식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두개파 성향을 띤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 잠식하고 있었던 교회가 고린도 교회이다 보니 아마도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성도들을 왕따를 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런 이유로 부활을 말하고 믿는 자들은 고린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외롭고 힘든 신앙의 여정을 걸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안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주장하고 선포하는 형제들아, 너희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고린도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부활을 믿고 달려가는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세 가지의 당부를 건넵니다. ⓵ 견실(견고)하라. ⓶ 흔들리지 말라. ⓷ 힘쓰는 자가 돼라. 그렇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견고하게 서라고 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흔들리지 말라고 권합니다. 부활 신앙을 기초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58절 본문은 바울 사도도 부활 신앙에 목을 걸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하게 권고하고 있음을 피력합니다. 그렇다면 바울도, 고린도 교회의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간직한 부활 신앙이 도대체 무엇이었기에 이들이 이토록 천착하며 강조했을까요? 1) 주님이 먼저 체휼하신 부활을 부활 신앙인들도 경험하게 될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52〜53절을 나눕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바울이 선언한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깊은 은혜가 임합니다. 천사장(天使長)이 나팔을 불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겁니다. 그렇게 오시는 그날, 부활 신앙을 믿는 자는 네 가지의 놀랍도록 신비한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게 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② 살아 있는 이들도 변화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③ 분명히 썩어야 하는 존재가 썩지 아니하게 될 것임을 눈으로 본다고 말합니다. ④ 죽을 것들이 죽지 아니함을 보게 될 것도 알려줍니다. 이 네 가지의 신비로운 경험을 눈으로 보게 된다고 바울은 적시했는데, 모든 이가 이런 신비적 광경을 목격하는 것이야말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결국,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들에게 임하는 복은 주님이 손수 먼저 경험하신 부활의 신비적인 은혜를 그들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사실은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놀라운 은혜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잠시 잠깐 후에 우리의 눈으로, 육체적 체감의 능력으로 경험하게 되는 실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42절에서 이런 확신을 기초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주지했듯이 저는 몇 주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친구 목사 아버님의 화장 예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91년 생을 마감하신 고 ○○○ 집사님을 소각로 입실시킵니다. 유족들이 매우 아파하고 있는데 우리는 불현듯 어르신을 다시 뵐 것입니다. 부지 중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시의 이별로 인해 아파하는 유족들에게 영원히 만나는 그날을 기억하며 고린도전서 15:58절의 말씀으로 위로해 주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58절의 메시지는 부활의 신앙을 지니고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외 없는 은혜의 무기가 됨을 저는 믿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렇게 아픈 상태라 누워서 목사님 심방을 받게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일어나 앉아서 주의 종을 맞이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함을 용서해 주세요.” 아들뻘 되는 목사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 당신의 온몸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던 신앙의 거인 안인환 권사님을 그날이 오면 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지 중에 주님이 오시는 날, 아니, 내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종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껴주셨던 정진석 권사님을 암세포가 있는 상태가 아니라, 흠이 없는 완벽한 부활체의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될 것을 믿습니다. 두릅 철이 되면 알맞게 두릅을 무쳐 담임목사에게 가져오시며 수줍게 “목사님, 맛있게 드셔주시는 게 제게는 기쁨입니다”라고 말씀해 주신 유영남 권사님도 그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저는 그날, 하나님의 품으로 갈 것을 알고 마지막 심방 때, 심방 감사헌금 봉투를 내밀며 제가 직접 교회에 출석해서 드려야 하는 게 하나님께 지켜야 할 예의인 줄을 알지만,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목사님께서 대신 심부름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웃으며 인사했던 최정희 집사를 아픈 몸이 아니라 완벽한 부활체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투병 생활 어언 1년 남짓 한 번도 중보의 끈을 놓지 않았고, 본인 스스로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고 있는 모든 지인을 향해서 신앙의 흔적을 아낌없이 남긴 서정수 집사를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부활체의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셨지만, 신앙을 가진 이후, 교회 새벽에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셨고, 요양원에 계실 때도 제가 왠지 모르게 높은 사람처럼 보여 항상 제가 심방을 가면 군인 출신답게 거수로 경례하시던 어린아이 같은 순결한 영혼을 소유하던 이동우 집사님을 그날 만나 포옹해 드릴 것입니다. 제천에 와서 평생 먹을 보신탕을 다 먹여주신 강영자 권사님을 만나 편안하셨지요? 물으며 안부하며 허그해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셨고, 때를 따라 교회 어려움을 앞서서 헌신해 주셨던 김택준 권사님도 똑같이 안아드릴 것입니다, 언제나 부족한 종이 시골 순두부를 좋아하는 걸 알고, 아내를 종용해서 따뜻한 식사 대접하기를 즐겨 하셨던 이종구 집사님를 만나서 이제는 호흡하시는 게 불편함이 없으셨죠? 물으며 반갑게 안부할 것입니다. 내 머리카락을 자르며 연애인 머리를 자르는 것처럼 떨린다고 부끄러워하셨던 권영옥 집사님에게 안부를 물으며 재회할 것입니다. 안 그러신 것 같이 행동하셨지만, 딸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서 준 걸 날마다 자랑하고 싶어 하셨던 권혁순 권사님도 만나 손잡아 드릴 날이 분명히 올 것을 저는 믿습니다. 교회 궂은일을 맡아 헌신하며 묵묵히 사역을 감당하며 조용하지만 성실하게 하나님께 충성하며 신앙의 여정을 끝까지 잘 달린 최남규 집사가 그날, “목사님 보고 싶었습니다.”라고 해맑게 웃으며 맞이하실 것을 믿기에 저도 그동안 잘 계셨느냐고 안부할 것입니다. 언제나 항상 그 자리에서 자리를 지키며 담임목사에게 튼실한 역할을 감당해 준 박연형 집사님도 그날 안아드릴 것입니다. “목사님, 저도 목사님과 함께 사역을 돕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 함께 하지 못함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영미를 목사님께 보냅니다. 영미를 영적으로 잘 거두어 주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딸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떨리는 손으로 제 손을 잡아주시던 이세진 장로님도 그날 기쁨으로 해후할 것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저는 우리 세인교회만이 아니라 제 목회 현장에서 만났던 아름다웠던 그리스도인 모두를 그날 만난 안부하며 포옹할 것입니다. 2) 부활 신앙인들은 내게 엄습하는 죽음을 향하여 강력하게 사망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4〜57절을 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 구절은 읽을 때마다 내게 영적인 시원함과 통쾌함을 줍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날, 천사장(天使長)이 연주하는 나팔 소리가 들릴 때, 즉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우리들이 부활체로 부활할 때 사망이 사망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는 선포입니다. 읽어 드린 바울의 이 선언이 얼마나 멋진 선언입니까? 바울은 예언서 이사야와 호세아의 선언을 믿었던 신앙의 선배였습니다. 바울이 이 땅에 오기 약 750〜700년 전에 먼저 야훼 신앙으로 무장하여 예언의 소리를 잇댄 이사야와 호세아의 소리를 다시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부활 신앙인들에게 잇대어 선포했습니다. 먼저 예언자 이사야의 소리를 들어보십시다. 이사야 25:8절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제는 호세아의 소리를 들어봅니다. 호세아 13:14절입니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앞에서 숨으리라” 우리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로마서 3:2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사망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부활체로 부활하게 되는 날, 우리들의 사망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는 말이 54〜55절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다가 아주 의미 있게 읽었던 구절이 눈에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6〜8절을 소개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마리아를 통해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전갈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베드로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세마포였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몸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세마포가 따로 접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개역 개정판에 ‘쌌던 대로’라는 이 번역을 먼저 보던 개역판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개켜 있더라” 이 단어의 가장 적절한 해석은 ‘둥글게 말려 있다’(ROLL UP)는 뜻입니다. 왜 복음서의 이 기사를 상세히 설명합니까? 세마포가 시신에 입혀져 있을 때 그 세마포는 죽음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무덤가에 주님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세마포는 세마포대로, 몸을 감싸고 있었던 세마포는 그 세마포대로 따로 개켜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개켜져 있었던 세마포를 보는 순간 요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20:8절입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이 개켜 놓으신 세마포는 주님의 부활하심의 확실성을 증거하는 것은 물론, 이제부터 나를 감싸고 있는 죽음의 종말을 선언한 의미 있는 증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사망의 종말을 선언하신 주님이셨기에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4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믿음으로 무장한 부활 신앙인들이 부르는 찬송가 222장의 4절입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사망 권세 이기도록 지켜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사망이 사망 됨을 믿는 부활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만이 진정성 있게 부를 수 있는 찬양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57절 본문을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렇습니다. 왜 부활의 신앙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인이 승리합니까? 오늘 설교 제목으로 돌아갑니다. 사탄이 주는 사망의 사망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주일 아침, 예배에 참석한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사망을 사망했다고 주저 없이 선포하게 하신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의 다시 사심을 박수로 환영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사망을 사망했다고 선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로마서 8:35-39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찬송가 160장입니다. (1)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2)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 주 (3) 거기 못 가두네 예수 내 구주 우리를 살리네 예수 내 주 후렴)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