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3일 고난주일 설교 제목: 넷째 모양은? 본문: 다니엘 3:24-29 서론)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유명한 성찰이 있습니다. “종교(religion)란 다시 읽기(relegere)다. 종교란 주의하고 있다는 것, 바짝 정신을 차리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병철, 『심리 정치』, 문학과 지성사, 76쪽) 아감벤의 성찰에 제가 주목한 이유는 ‘다시 읽기’라는 해석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은 지성인의 해석입니다. 지난 주간, 셀 사역을 진행하면서 지체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드리는 새벽예배 시간에 매일 드리는 제목 기도가 있습니다. 월요일은 세인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날인데, 5가지 제목 중에 첫째 기도가 ‘하나님, 세인교회에 바른 부흥을 주옵소서!’입니다. ‘바른’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이유는 ‘바른’ 부흥이 아니면, 그건 교회가 아무리 부흥해도 옳지 않은 선택이자, 교회 존재의 의미에서 그릇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개념은 부흥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건 부흥이 아니라 왜곡이기 때문입니다.” 2023년 우리 교회 표어를 이렇게 정했던 적이 있습니다. “상식을 존중하는 교회” 이 표어가 정해지자, 지체 한 명이 제게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목사님, 교회가 정말로 지향해야 하는 정확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른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저는 성경이 제시한 성경적 교훈과 그 성경적 교훈을 신학이 올바르게 지지해 주는 틀 안에서 이탈하지 않는 신앙생활이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오늘 종려주일에 주시는 본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혹시나 소홀히 여기거나 간과해버린 실수를 바로잡아 주는 대단히 중요한 지침서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합니다. 본론) 주전 605년에 바벨론의 신흥 강자였던 느부갓네살 2세는 남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애굽을 의지하던 남 유다가 괘씸죄의 대상이었기에 제2차 갈그미스 전투를 통해 애굽과의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한 느부갓네살 2세는 남 유다를 종주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침공해서 소기(所期)의 목적을 달성했고 남 유다의 총명했던 청년 다니엘(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 그의 친구였던 하나냐(야훼께서 자비를 베푸시다.), 미사엘(누가 야훼와 같은가?), 아사랴(야훼는 나의 도움이시다.)와 같은 미소년(14〜15세로 추정)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잡아간 미소년들을 약 3년간, 바벨론이 제공하는 최고의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정책적으로 유다 출신의 젊은 청년들로 하여금 바벨론 문화에 빠르게 유입하게 함으로써 식민정치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다니엘과 그의 친구 세 명의 교육은 바벨론 정부에 적지 않은 선한 영향을 미칠 걸로 예상했지만, 유독 유다 종교 즉 야훼 하나님 신앙을 바벨론 신앙으로 갈아타게 하는 데는 전적으로 실패했음을 다니엘 1〜2장에 보고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1장과 2장은 다니엘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3장은 다니엘이 아닌 그의 세 친구에게 이목(耳目)이 집중되었음을 보고합니다. 느부갓네살은 2장에서 자신이 꾼 꿈을 다니엘이 풀어줌으로써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성성이 얼마나 위대하고 가치 있는 분인가에 대한 신학적 수업을 받았지만, 어리석게도 다시 또 3장에서 자신을 우상화하는 어처구니없는 금 신상을 만들었음을 낱낱이 고발합니다. 성경은 그 금 신상의 크기가 무려 27M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임을 보고합니다.(단 3:1) 그러니까 오늘의 단위로 말하자면 아파트 9〜10층 규모의 크기였습니다. 이런 신상을 바벨론 평지에 만든 느부갓네살은 전국에 있는 관리, 참모들을 불러서 낙성식에 참석하게 한 뒤에 모든 바벨론 땅에 거하는 사람들은 이 신상에 엎드려 절할 것을 명령합니다. 만에 하나,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풀무 불(화덕)에 던져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이제 금 신상에 절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국가적 제례로 발전해서 그것을 하는가, 안 하는가가 곧 느부갓네살에게 충성하는가 안 하는가의 잣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야훼 신앙으로 견고히 무장한 다니엘의 세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당연히 그 국가적 제례에 참여하지 않고 거부합니다. 포로로 끌려온 유다 청년들이 바벨론의 요직을 차지한 것에 대해서 그러지 않아도 불만이었던 바벨론의 관리들이 그들의 행태를 느부갓네살에게 고발합니다. 세 청년이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고발이었습니다. 화가 난 느부갓네살이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를 소환합니다. 이윽고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에 던져넣겠다고 협박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굴복할 줄 알았던 세 명이 전혀 요동하지 않고 왕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그 유명한 다니엘 3:17〜18절을 개역판 성경 버전으로 소개합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바로 이 번역에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세 친구가 선언한 말에 더 큰 분노를 발한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말하는 그들을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본보기 삼아 보통의 풀무 불보다 7배나 더 뜨거운 화덕에 던져 넣었습니다. (단 3:19) 세 명은 결박된 채로 화덕에 던져졌습니다. 상황은 이제 끝이 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극심한 핍박의 결과를 저와 여러분에게 알려줍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4〜25절을 봅니다.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느부갓네살이 세 명을 풀무에 던진 뒤에 경험한 놀라운 일을 보고합니다. 분명 결박한 채로 세 사람을 던졌는데, 왕의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전혀 다른 양태를 보이고 있었음을 독자에게 알려줍니다. 어떤 상태였습니까? 결박된 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왕의 눈에 보이는 형체는 네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결박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들이 풀무 불을 돌아다니는 데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25절 후반절입니다.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너무 놀라운 일을 경험한 느부갓네살은 이윽고 형 집행을 중단시켰고 세 명을 풀무 불에서 건져내라고 명합니다. 다니엘서 기자는 26〜29절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말 그대로 해피엔딩입니다. 은혜가 되십니까? 하지만 종려주일 아침에 주신 이 말씀을 전통적인 해석인 다니엘의 세 친구가 믿음을 사수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셨다는 해피엔딩의 은혜 때문에 이 본문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종려주일에 이 본문을 택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더 큰 신학적 교훈을 나누기 위해서 본문을 택했습니다 이제 그 은혜로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접근하려고 합니다. 찾으려는 은혜는 넷째 모양의 존재에 대한 해석적 접근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넷째 모양에 대한 주석을 이렇게 해제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았다. ‘신들의 아들’이라고 번역한 아람어 ‘바르 엘라인’과 비슷한 히브리말 표현으로는 ‘브네 엘로힘’을 들 수 있다. 창세기 6:2, 욥기 1:6절 등에서 이 표현은 천상의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시립해 있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김근주, 『다니엘처럼』, 대장간, 107쪽) 김 박사는 이렇게 주석한 뒤에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넷째 모양’을 정의합니다. “결국 세 사람은 뜨겁게 타오르는 풀무 불 속에서도 조금도 상하지 않았고 다치지 않았다. 그리고 본문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무사히 지켜진 까닭은 그들과 함께 불 가운데에 있는 네 번째 존재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네 번째 존재는 하나님께서 세 친구의 믿음대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보내주신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책, 108〜109쪽) 영어 성경 『KJV』 번역은 넷째 모양의 존재에 대해 의미 있게 이렇게 번역해 놓았는데 귀담을 만한 번역입니다. “He answered and said, Lo, I see four men loose, walking in the midst of the fire, and they have no hurt; and the form of the fourth is like the Son of God.” (느부갓네살이 답하며 말했다. 보라, 나는 불 가운데로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네 명의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해를 당하지 않았고, 특히 그 네 번째의 형태는 마치 하나님의 아들과 같았다.) 네 번째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번역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는 이 의견에 대해 분분(紛紛)합니다. 이 해석에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저는 지금부터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성찰을 하고자 합니다. 넷째 모양을 한 존재가 왜 다니엘 세 친구가 던져진 풀무 불 안에 들어갔을까? 이 질문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접근이 오늘 종려주일 아침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기에 답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든,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이시든, 아니면 하나님, 당신의 실체이든 누가 되든 넷째 모양을 한 존재는 다니엘 세 친구가 당하고 있는 현장에 뛰어 들어가 그들이 당하고 있는 불같이 맹렬한 극한의 시험 고통을 이기도록 그 자리에 함께한 존재라는 해석은 동일할 것입니다. 도대체 다니엘 세 친구의 신앙이 어떤 신앙이었기에 넷째 모양의 존재께서 감동을 받아 직접 그 현장으로 뛰어 들어간 것일까? 접근하자면 상당히 많은 이유와 요소를 추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세 친구에게서 찾게 되는 정말로 놀라운 교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 세 친구는 자기의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삶의 정답임을 확신한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다니엘 3장을 종려주일 아침 설교 본문으로 택한 이유는 특별한 의미를 교우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내가 갖고 있는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으로 지키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이 친구들이 약 1,000°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뜨거움을 자랑하는 풀무 불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신상에 절하지 않음으로 그 죽음의 불 속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라는 믿음 하나만을 갖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이 친구들은 하나님은 언제나 정답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에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에 하나, 이 친구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 자기 신념이었다면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으로 그들의 기도를 마쳤을 것입니다. “하나님, 풀무의 화덕 자체를 초토화시켜 주십시오.” 하지만, 세 명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세 명이 선언한 믿음의 선언은 압권입니다. 다니엘 3:17-18절을 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친구 세 명이 선포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①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② 하지만 건져주시지 않더라도 우리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도에 담긴 놀라운 은혜가 보입니다. 성경적, 신학적 올바른 믿음이란 내가 갖고 있는 신념에 따라 내가 원하는 결과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군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입니다. 성경적, 신학적 올바른 믿음이란 내 믿음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신학적 올바른 믿음이란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하나님, 당신이 갖고 계신 사랑과 선하심이라는 속성을 동원하여 우리의 필요를 온전히 채워주실 것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학적 올바른 믿음이란 내 신념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확신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설명한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 소개한 고난당하고 있는 세 친구들의 장면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세 친구가 보여준 성경적, 신학적 올바른 믿음은 풀무 불의 고통에서 나를 완벽하게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서 나를 완벽하게 지켜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곳, 그 현장에서 주님도 나와 함께 계셔서 나와 같은 마음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믿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라는 사실을 본문이 알려줍니다. 이 믿음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적어도 성경적, 신학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이며 믿음입니다. 브라이언 채플 목사가 이런 갈파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가 볼 때 최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최선인 것을 주시리라고 믿는 이들이다.”(브라이언 채플, 『불의한 시대, 순결한 정의』, 성서유니온, 99쪽) 엄청난 성찰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2025년 4월 13일 현재, 엄청난 세속의 풀무 불 속에서 사탄의 세력에 의해 엄청나게 가공할 만한 영적 공격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세속이라는 풀무 불 안에서 저와 여러분이 당하는 그 고통을 이기도록 해주는 넷째 모양의 존재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그 풀무의 현장에 함께 계심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 오늘부터 2025년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팀 켈러 목사가 이렇게 말했던 문장에 밑줄을 그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그것도 자원해서 겪었다면 우리가 당하는 시련은 더 이상 부당하지 않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기이한 형태의 행복이 가능하도록 이미 고난을 당하셨다.”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두란노, 241쪽)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고난주간, 주님은 내 삶의 풀무 속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 속에서 1,000°보다 더 뜨거운 고통이 나를 옥죄지 못하도록 나와 함께 같이 고난을 당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넷째 모양을 하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내게 주시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말씀 생각하며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신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당신이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을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