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13) 제목: 무엇이 행하는 믿음인가? (1) 본문: 야고보서 3:1〜2 서론) 작가 이기주가 이런 갈파를 했습니다. “사물의 형체가 굽으면 그림자가 굽고 형체가 곧으면 그림자도 바르다. 말도 매한가지다. 말은 마음을 담아 낸다. 말은 마음의 소리다. 수준이나 등급을 의미하는 한자 ‘품’(品)의 구조가 흥미롭다. 입 ‘구’(口)가 세 개가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品性)이 된다.” (이기주, 『말의 품격』, 황소북스, 9〜10쪽)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을 입에서 내뱉으며 삽니다. 어렴풋하지만 책에서 이런 문장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한다. 이 말은 언어화되지 않고 표현되지 않은 말은 내가 사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는 지금까지 5권의 졸저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어떤 작가든 공통으로 느끼는 소회가 하나 있는데 가장 애정이 가고 아끼지만, 한편으로 조금 더 잘 쓸 수 있었는데, 하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책이 처녀작이라는 분모입니다, 저 역시, 예외이지 않습니다, 2016년에 부끄럽게 세상에 내놓은 첫 저서인 『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이 그렇습니다. 정말 많이 공부하고 열심히 독서한 끝에 내놓은 처녀작이기에 지금도 들춰보면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 이렇게 치열했었네! 라고 자평하곤 하는 책입니다. 저는 첫 번째 책의 에필로그 즉 나가는 말에 이렇게 작품 후기를 남겼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이유는 사유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천박해지는 이유는 동물적 감각으로 오감에 흡족한 것만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암세포보다 더 무서운 치명적 독소는 생각하지 않고 살게 하는 무감각입니다.”(이강덕, 『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동연, 316쪽) 저는 오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아침에 언어라는 도구는 인간을 사유하게 만드는 선한 도구가 되게도 하지만, 그 반대로 사유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입에서 내뱉을 때는 언어 그 자체가 대단히 무서운 폭력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나누어 보려 할 것입니다. 본론) 본문 1〜2절을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야고보서 저자는 독자들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이전 설교를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형제’(ἀδελφοί)라는 단어는 주후 1세기 지역 공동체에서 사용되던 흔한 용어가 아니라, 유독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공동체에서 사용되던 용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수신자 공동체는 당시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이방 공동체 중에서 예수를 믿음의 주체로 고백하고 있던 신앙공동체인 교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본문 1〜2절은 그 공동체에서 나타나고 있던 아주 독특한 상황을 알게 해 줍니다. “아마도 이 편지를 받는 교회 안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을 희망하거나, 말을 잘한다는 것만을 가지고 실제로 가르치는 사람 행세를 하며, 교회를 어지럽히고 소란하게 하고 있어서 어떤 사람이 가르치는 직분에 적합한지를 명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훈택, 『선생의 자격에 관한 야고보의 충고』, 그 말씀, 2001, 1월호, 88쪽) 사정이 이러했기에 야고보서 저자는 대단히 엄중한 울림으로 1절을 쓴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이 구절을 『우리말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혀를 제어하라> 내 형제들이여,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너도나도 선생이 되려고 나서지 마십시오.” (우리 말 성경 야고보서 3:1) 결국 선생이 되려고 마음을 먹은 이들이 있다면 반드시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기본적 태도가 있음을 야고보서 저자가 천명한 것입니다. “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왜 이 정도의 엄격한 잣대를 저자는 제시했을까요? 본문 2절을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이 구절은 『새한글성경』 번역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많이 헛디딥니다. 누군가 말을 할 때, 헛디디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는 온몸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야고보서 저자가 강력하게 선언한 메시지는 온몸을 제어할 수 있는 완벽한 말을 하는 존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선생이 되려고 이들은 더 깊숙이 생각하고 신중히 그 길을 선택하라는 충고이기도 한 메시지가 1〜2절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게 불현듯 다가온 영적 조명이 있었습니다. 왜 선생 된 자가 헛발을 디딜까? 이 질문에 냉정한 답변을 하라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제게 벼락처럼 다가온 천둥소리였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잠깐 원고 작성을 멈추었습니다.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오늘의 레마입니다. ※ 성서에 담긴 메시지에 대해 신학적으로 치열하게 사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예레미야 27〜28장 텍스트를 심도(心到) 있게 다룰 것입니다. 집중해서 경청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최종적 멸망은 주전 587년에 느브갓네살이 유다의 예루살렘을 함락으로 끝이 났지만, 실상 유다의 국운이 쇠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주전 605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집트와의 패권 다툼을 벌인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느부갓네살 2세는 이제 근동의 나라를 장악한 실질적 패권국의 수장으로 우뚝 서서 팔레스타인의 조그마한 약소국가인 유다에게 조공을 요구하며 실질적 종주국의 위용을 뽐내기 시작합니다. 약소국가이기에 어쩔 수 없어 바벨론에 조공을 바치던 유다는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 반바벨론 정책을 펴다가 느부갓네살 2세의 침공을 다시 받고 유다 성읍 중에 예루살렘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을 빼앗기고 강제 폐위가 됩니다.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 역시 바벨론에 의해 꼭두각시 왕으로 재위하다가 궁극으로는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합니다.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바벨론의 2차 침공 때 많은 유다의 귀족들, 군사 지도자들, 기술자들을 포함해 약 10,000명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예언자 에스겔도 함께 끌려갔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난 주전 587년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가 반바벨론 정책을 펼치다가 느부갓네살 2세의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바로 이때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결국 성을 빼앗긴 체로 유다는 완전히 멸망 당하는 비운의 운명을 맞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정신적, 종교적 기둥이었던 솔로몬의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초토화되었고 대부분의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치욕적인 식민지 백성이 되어 비참한 삶을 살게 된 것이 유다의 바벨론 포로 시기의 대략입니다. 이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저는 예레미야 27〜28장에 기록된 대단히 중요한 기록을 교우들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예레미야 27〜29장의 배경은 바벨론의 2차(597년) 침공과 3차 침공(586년) 사이를 배경으로 하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대략 요약할 수 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유린 되어 많은 지식인들과 귀족층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그 시기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선민 공동체인 유다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망국의 설움 앞에서 대단히 혼란스럽게 당황스러운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변의 그만그만한 나라들이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주변 국가와 유다의 시드기야는 반바벨론 연대를 계획합니다. 그 자리에 옵저버 형식의 대사로 두 명의 예언자가 배석했습니다. 한 명은 당시 유다에서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예언자 하나냐와 또 한 명은 매우 달갑지 않은 예언의 소리를 주저 없이 선포함으로 유다 입장에서는 매우 눈엣가시 같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레미야는 반바벨론 연대에 대해 매우 거침 표현으로 이 연대는 결국 파멸로 가는 첩경이 될 것이니 바벨론에게 대적하지 말라고 혹평을 서슴지 않고 예언합니다. 예레미야 29:7〜10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반바벨론 연대 공동체에게 찬물을 끼얹는 흉 예언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를 쓰고 용을 써도 70년이 지나야 포로에서 해방된다는 예언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 해가 오기까지 살아남으려면 바벨론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매우 불편한 메시지까지 전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발언과 예언은 매국노와 같은 발언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유다 정치권력과 기득권 세력의 가려운 곳을 매우 적절하게 긁어주는 예언자가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하나냐입니다. 예언자 하나냐가 기라성과 같이 등장해서 예레미야에게 반기를 들고 기득권 정치권력에 마음에 부합한 메시지를 이렇게 던집니다. 예레미야 28:2〜4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너무 통쾌한 사이다 발언이었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 있기에 가뜩이나 우울한 모드가 유다 전반에 깔려 참담한 실정이었는데, 단 한 방에 그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희망을 노래하게 만드는 하나냐의 메시지가 선포되었으니, 이보다 더 달콤한 복음의 소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70년이 지나야 나라가 회복된다는 예레미야의 절망적 예언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던 현장에, 단 2년 만에 유다가 회복된다고 하니 이처럼 행복한 메시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유다의 목에 하나님이 바벨론이라는 멍에를 매게 하셨다고 선포했는데, 하나냐는 바벨론 왕의 멍에를 하나님이 꺾었다고 선포했으니, 이보다 더 열광하게 만드는 복음 중의 복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서적으로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결은 이미 결정이 나 있는 것과 진배없는 대결이었습니다. 하나냐의 한판승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를 성경이 무엇이라고 진단했습니까? 예레미야 28:15〜17절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선지자 하나냐가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 하냐냐의 참패요, 예레미야의 완승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레마를 통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오늘의 사람들이 신학적으로 치열하게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헛발질을 내딛고 있다고 정의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주군께서 알려주신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현란하고 매혹적이며 군중을 압도하는 말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야훼께서 그를 보낸 적이 없고, 그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면 그가 전하는 모든 것이 그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저는 오늘의 레마를 2025년에 이렇게 적용합니다. 왜 수많은 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해지지만, 거기에 능력이 없는가? 그가 선포하는 말에 하나님을 운운하지만, 그의 말은 왜 야훼 하나님의 말이 아닐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야훼의 말씀을 공급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야훼께서 주신 ‘레마’를 ‘다바르’로 승화하지 못했고, 적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으니, 그는 자기 말을 하나님의 말로 둔갑시켜서라도 민중을 호도하고 무지몽매한 자로 만들어버려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2025년에 기독교 현장 안에서 즐비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 1절에서 대단히 엄중하게 선포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김기석 목사는 말을 진부하게 만들거나 말씀을 왜곡하는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을(선생 된 자) 향하여 이렇게 쓴소리를 선포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이여, 말이든, 글이든 편법을 쓰지 마라. 키질을 해 알곡을 고르는 사람처럼, 체로 쳐 고운 가루를 얻는 사람처럼, 진실의 키와 성의(誠意)의 체로 거짓과 편견과 이기와 탐욕을 거르면서 살라. 하루를 위해 고귀한 영혼에 켜켜이 거짓의 분을 바르지 말라. 참과 거짓이 싸울 때 겁많은 자의 용기로나마 참의 편에 서라. 진실의 샘이 말라버린 시대라 하더라도 그 샘 저 밑바닥을 흐르는 지하 수맥이 돼라.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입이 되어 살라. 가슴속에 늘 이 소리가 늘 종소리가 되어 울리게 하라” (김기석, 『오래된 새길』, 포이에마, 69쪽)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닙니다. 선생 된 이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다 가르침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치밀하게 사유하고 성찰하는 자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습니다. 은혜의 통로에서 엇나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올곧음이라는 좌표를 선물로 주신다는 점입니다. 2025년, 오늘 대단히 무례한 자들의 소리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그 소리들은 더 큰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이런 영적 난맥상이 도드라진 이 시대에, 나는 우리 세인 교우들이 성경에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로고스를 치열한 신학적 성찰과 집요한 신학의 사유를 기초 삼아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은혜에서 엇나가지 않는 교우들과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결론) 저는 오늘 본문 1〜2절을 통해 행동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첫 번째로 나누었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치열하게 성찰한 뒤에 내 입에서 말을 꺼내는 신중한 신앙적 삶을 살아내는 것이 행동하는 믿음임을 역설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작가 한강이 쓴 단편 소설 『흰』에 담겨 있는 글감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구름 뒤에 달이 숨는 순간, 구름은 갑자기 하얗고 차갑게 빛난다. 먹구름이 섞여 있을 때면 미묘하게 어둑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 잿빛이거나 연보랏빛이거나 연푸른빛을 띠는 그 무늬 뒤에, 둥글거나 반원이거나, 그보다 갸름하거나 실낱처럼 가는 창백한 달이 숨겨져 있다.”(한강, 『흰』, 난다 출판, 69쪽) 물론 천재적 감성을 지닌 작가이기에 그렇겠지만, 보름달, 반달, 초승달을 바라보면서 그달을 ‘창백한 달’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한 이런 작가적 표현이 어떻게 가능했지? 하고 물으면 답은 한 가지일 것이 분명합니다. 작가가 갖고 있는 직업의식, 작가적 감성 등을 전제로 그냥 보지 않는 집요한 성찰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말입니다. 적어도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로고스를 ‘레마’로 승화시켜 ‘다바르’의 삶을 연결하는 이들은 말씀을 집요하게 성찰하는 공통점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와 말은 그가 선생이든 아니면 듣는 이든 상관없이 결코 천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은혜의 수여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삶의 현장이라는 행동의 영역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우리들의 언어가 천박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의 품격을 담은 말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예수, 하나님의 공의 예수 하나님의 공의 주 독생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예수 제물이 되신 주 영광 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주의 나라 영원하며 그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 주의 주권과 주의 통치와 주의 나라 힘과 권세 임하네 예수 하나님의 공의 예수 하나님의 사랑 주 은혜와 말씀으로 나타났네 예수 거룩한 하나님 영광 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주의 나라 영원하며 그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 주의 주권과 주의 통치와 주의 나라 힘과 권세 임하네 예수 하나님의 공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