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10) 제목: 이기게 하는 것은? 본문: 야고보서 2:8〜13 서론) ‘자비’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우리 뇌가 기억하는 단어는 ‘대자대비’(大慈大悲)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대자대비’라는 단어를 Chat GPT에게 물었더니 이런 답변이 나왔습니다. “대자대비는 모든 중생을 존중하는 자부심과 사랑의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주로 부처님의 마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자비’라는 단어가 너무 당연하게 불교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비’라는 단어는 불교만의 용어가 아닙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기독교적인 용어라고 말해도 괜찮을 정도로 ‘자비’라는 단어는 성경에 속속 등장합니다. 불교에서는 ‘자비’라는 단어가 불교의 창시자가 갖고 있는 마음이라고 제한적으로 정의하지만, 기독교로 그 적용의 범위를 넓히면 ‘자비’라는 단어의 사용 여백이 훨씬 더 광범위해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점을 강력하게 시사해 줍니다. 본론) 오늘 설교는 본문 끝 절인 13절부터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공동 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표준 새 번역 성경도 흡사한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긍휼’이라는 단어가 본문에 등장하지만, 여타 다른 성경 버전에는 ‘긍휼’이라는 단어를 ‘자비’라는 단어로 바꾸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긍휼이라는 단어가 저와 여러분에게 익숙한 이유는 아마도 본문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산에서 가르치셨던 산상수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5:7절을 음미해 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헬라어 단어 ‘ἔλεος’(엘레오스) 때문입니다. ‘엘레오스’는 ‘긍휼’이라는 단어로 그 뜻이 풀이되지만, 조금 더 원색적인 문자적 표현으로 대체한다면 바로 설교 서두에서 밝힌 ‘자비’라는 뜻이 더 가깝습니다. 원래 ‘엘레오스’는 ‘불쌍히 여기다.’, ‘괴로워하거나 도움을 찾는 사람을 돕는다.’, 혹은 ‘자비한 마음을 품는다.’ 등등으로 해석되는 단어의 명사형입니다. 지금 저는 ‘엘레오스’ 즉 ‘자비’ 혹은 ‘긍휼’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 혹은 ‘자비’라는 단어에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 배경을 담는다면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까를 던져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게 우리들의 관심이니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존 스토트 목사가 ‘긍휼’이라는 단어를 본인의 책에서 주석한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긴요한 작업이 될 수 있습니다. “‘엘레오스’라는 명사는 언제나 우리가 고통, 불행함, 비탄함 등 죄의 결과들을 어떻게 보는지와 관련된 단어다.” (존 스토트, 『산상수훈』, 생명의 말씀사, 55쪽) 존 스토트 목사는 ‘긍휼’ 즉 ‘자비’라는 단어를 죄의 결과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해석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조금 쉽게 접근한다면 ‘긍휼’한 마음 혹은 ‘자비’한 마음은 갖는다는 것은 죄에 대해서 아픔을 갖고 이해하려고 할 때 얻게 되는 산물이라고 존 스토트 목사가 진단한 것입니다. 이 해석이 저를 잡아당겼습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세간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는 보편적 가치의 단어가 아니라, 종교적, 신앙적 공감의 능력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총이라는 사실에 저는 방점을 찍기로 했습니다. 빅톨 위고의 걸작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여러 감동적 장면 중에 목사인 저는 당연히 이 장면을 최고의 장면으로 뽑습니다. 굶주린 가족들을 볼 수 없어 몇 조각의 빵을 훔친 죄로 19년 간의 옥살이 끝에 형기를 다 마치고 출소한 장발장은 그가 잠깐 기숙하도록 허락된 성당에서 은식기를 훔쳐 도망가다가 헌병에게 발각되어 다시 수감 될 위기에 처합니다. 범죄 구성을 알아보기 위해 헌병은 장발장을 데리고 그가 잠시 기거했던 성당에 가서 범죄 행위에 대한 현장 검증을 합니다. 이때 성당 주교 신부인 미리엘 신부는 시퍼렇게 서늘한 감시의 눈길을 주고 있는 헌병이 있는 자리에서 장발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군요. 다시 보게 되어 다행이오. 내가 당신에게 은촛대도 주지 않았소? 그것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은 제품이니까 200프랑은 넉넉히 받을 수 있을 거요. 그런데 왜 그건 가져가지 않았소?” 그렇다면 이 자를 그냥 보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헌병들이 장발장을 놓아 주자, 장발장은 뒷걸음질을 쳤다. 주교가 다시 말했다. “형제님, 가시기 전에 여기 있는 당신의 촛대를 갖고 가시오. 여기 있소.” 주교는 벽난로로 가더니 두 개의 은촛대를 장발장에게 주었다.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 은제품을 팔아서 마련한 돈은 반드시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사용하겠다고 나와 약속한 사실을 말이오.” 미리엘이 말한 거짓말이 바로 ‘긍휼’ 즉 ‘엘레오스’의 마음입니다. 성경적 실례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8:21〜34절에서 예수께서 비유하신 담론을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동네에 주인에게 10,000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10,000달란트를 계산하기 쉬운 화폐 단위인 데나리온의 가치로 계산해 보겠습니다. 주후 1세기 20세 이상 성인이 하루 일을 하면 받는 품삯이 1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의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성인 한 명의 16년 연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치가 1달란트입니다. 적용한다면 마태복음 18장에 소개된 종이 주인에게 진 빚이 10,000달란트라고 했으니, 계산 자체가 불가능한 천문학적인 금액이 10,000달란트입니다. 주인은 이 돈을 빚진 자에게 갚으라고 압박했습니다. 이 빚은 계대로 이어지기에 채권자 주인은 채무자에게 본인은 물론 아내, 자식들까지 다 힘을 합쳐서 빚을 갚으라는 압박까지 받게 됩니다. 채무자 종은 자기가 빚을 갚겠다고 애원하며 주인에게 가족들에게만은 이 짐에서 벗겨 달라고 애절하게 간청합니다. 애원을 받은 주인은 그 종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마태복음 18:27절입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이 구절에서 채권자가 채무자를 향해 가진 마음 즉 ‘불쌍히 여겨’의 마음이 ‘긍휼’입니다. 종은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은혜를 주인에게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채무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종은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유를 만끽하며 동네에 나갔는데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채근합니다. 빚 독촉을 받은 채무자 동료는 갚을 테니 말미를 달라고 애원합니다. 하지만 채권자인 이 종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채무자를 빚을 갚을 때까지 그를 옥에 가두고 맙니다. 이 사악한 소식이 10,000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준 주인의 귀에 들어갑니다. 주인은 자신이 빚을 탕감해 준 종을 급거 잡아들이고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마태복음 18:32〜34절입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이 구절에서 두 번에 걸쳐서 마태복음 기자가 사용한 ‘불쌍히 여기다’라는 헬라어 단어의 원형이 앞 설교에서 제가 소개한 ‘ἔλεος’(엘레오스) 즉 ‘긍휼’ 혹은 ‘자비’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긍휼’ 혹은 ‘자비’라는 단어는 존 스토트 목사가 언급한 대로 죄에 대한 시각인데 그 시각이 신앙의 성숙함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사람의 마음 상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누가복음 10장에 기록된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만나봅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린치를 당하고 갖고 있던 모든 것은 강탈당한 끝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그 사람이 쓰러져 있는 곳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보인 반응을 누가복음 기자는 같은 동사로 표현했습니다. 누가복음 10:31〜32절을 만납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그렇습니다. 종교적 책임을 져야 하는 그룹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피하여 지나가고”였습니다. 반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 곳을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이 보인 반응은 앞 두 사람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누가복음 10:33〜34절을 만나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니라” 두 단어가 오롯이 다가옵니다. “불쌍히 여겨”와 “가까이 가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을 품게 되면 아픔을 당한 이 옆으로 가까이 갑니다. 그러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전적으로 종교적 심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오늘 본문 마지막 13절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본문을 의지할 때, 중요한 영적 교훈이 스며듭니다. 모름지기 성도가 삶의 현장에서 이기는 삶을 살게 해주는 신앙의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본문이 알려줍니다. ※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저는 앞서 ‘긍휼히 여김’이라는 단어를 설명했습니다. 문자적인 함의와 성경적 내적 증언을 통해 ‘긍휼’이라는 단어를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오늘 본문과 연계하여 ‘긍휼’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깊이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 8〜9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야고보서 기자는 독자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믿는 성경(율법서)에 기록된 최고의 법이 네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참 잘하고 있는 삶이다. 하지만, 너희 공동체 안에 차별이 있다면 그건 최고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다.” 말 그대로 직격한 셈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직격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고 이어집니다. 10〜12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구약의 법이 제시한 10가지 계명이 있다. 너무 중요한 법이다. 그러니 그 법이 최고의 법이라는 말을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을 명심해라. 10가지 계명을 지켰다는 것은 10개의 계명 모두를 빠짐없이 지켰다는 말이다. 가령, 일곱 번째 계명을 너희들이 다 지켰다고 하자. 그러나 7계명을 지켰어도 만에 하나, 6계명을 어겼다면 너희는 계명을 어긴 자가 되는 거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희들이 진정으로 천착할 일은 최고의 법을 지키는 것에 목을 걸지 말고, 자유의 율법에 더 관심을 두고 말하며 행하는 것임을 명심해라.”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설교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한 부분에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유의 율법”이 과연 무엇일까요? 고신대학교 변종길 교수의 도움을 받아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자유의 율법이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법인데 강제나 두려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사랑에 의해 지키는 법이다. 이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지키는 율법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감사함으로 지키는 ‘감사 규칙’으로서의 율법이다.”(변종길, 『그 말씀-2001년 1월호, 78쪽) 전주대학교 한병수 교수도 자유의 법을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자유의 법은 아마도 은혜 아래에서 완성된 율법 즉 복음일 것입니다.” (한병수, 『야고보서에 반하다』, 다함, 183쪽) 그렇다면 이렇게 설교 해석의 맥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감사함으로 지키는 ‘감사 규칙’으로서의 율법이 무엇일까요?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구원받은 성도만이 지닐 수 있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작년, 독서 반에서 함께 공부했던 아베 피에르의 걸작 『단순한 기쁨』에 보면 피에르 신부가 페루에서 사역했을 때 경험했던 일을 하나 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엄청난 쓰레기 산 위에 세워진 리마시에서 사역했다. 시청 트럭들이 끊임없이 실어 나르는 쓰레기 더미를 밤낮으로 뒤지는 굶주린 자들과 함께 살며 사역했다. 하루는 신문기자들이 그 더러운 곳을 찾아오겠다고 청해왔다. 불안정한 땅을 걷던 기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무릎이 탈구되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사람들이 앰뷸런스를 불렀고, 그를 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동안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가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를 보자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곧 의사가 그의 무릎뼈를 제자리에 끼웠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 사라졌다. 그러자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고통받고 있을 때 손을 꼭 잡아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신부님의 그 행동은 다른 어떤 말보다 제가 고통을 견디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 마음산책, 213쪽) 아베 피에르 신부는 이 일화를 소개한 뒤, 이렇게 이어서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고통받는 자들에게 충고하려 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들에게 멋진 설교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신앙의 설교일지라도 조심하자. 다만 애정 어리고 걱정 어린 몸짓으로 그 고통에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곁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조심성, 그런 신중함을 갖도록 하자. 자비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경험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다.” (위의 책, 213〜214쪽) 고통 중에 있는 자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말로 하지 않고 옆에 있어 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이 긍휼은 하늘의 은총을 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 무기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말한 본문 13절을 먼저 설교한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至難)한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성도가 내 삶의 천로역정에서 지치지 않고 이기게 하는 무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과정 안에 있어도 무너지지 않고 이기는 요소가 있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손잡아주심이라는 긍휼을 삶에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고통당하고 있는 자의 손을 긍휼의 마음으로 잡아 주십시오. 이 긍휼함 즉 자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이깁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는 성도의 무기입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 아침, 오늘도 여전히 내게 주시는 긍휼함을 힘입어 자비한 마음으로 삶을 실천함으로 여러분도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를/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네 눈을 들어 주를 보라/네 모든 염려 주께 맏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의 험한 풍파 몰아칠 때도/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주님은 나의 요새/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