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2025년 3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11): 둘은 다르지 않습니다.2025-03-22 16:11
작성자 Level 10

20253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11)

 

제목: 둘은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 야고보서 2:1420

 

서론)

 

크리스천 아카데미 선임 연구원인 김진 박사가 쓴 책에 이런 간디의 일화가 적혀 있었습니다.

언젠가 간디가 막 기차에 오르려는데 한 기자가 간디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고통당하고 있는 인도 국민을 위하여 메시지를 전해 주십시오. 그때 간디가 종이에 무엇인가 급히 써서 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My life is my message.”(김진, 간디와의 대화, 스타북스, 53)

내 삶이 내가 말하는 메시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땅에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곱씹어도 간디라는 인물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엄청나고 지대한 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교우들과 나누려는 본문은 야고보서 본문 전체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를 제시하는 논쟁거리를 제공하기에 눈을 크게 뜨고 주목해야 합니다.

단지 야고보서 저자만이 던진 메시지가 아니라, 본문의 화두는 기독교 전체가 항상 토론하고 논쟁하는 주제이기도 하기에 더더욱 우리 교우들은 오늘 본문 설교에 집중해야 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본론)

 

오늘 설교 본문이 시작되는 14절을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동시에 본문 17, 20절도 충격적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17)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0)

야고보서 저자가 선언한 이 두 구절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가장 뜨겁게 달아오르는 논쟁의 빌미로 맞서게 하는 바울이 선언 두 구절이 떠오릅니다.

먼저는 로마서 1: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동시에 갈라디아서 2:16절의 그 유명한 구절도 떠오르게도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야고보서 저자는 분명히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행함이 없으면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

반면 바울은 이렇게 맞섭니다.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구원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다.”

발언만 놓고 보면 바울과 야고보가 만났다면 어쩌면 멱살잡이할지도 모르겠다는 오싹함이 들게 할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바울의 믿음과 야고보의 행함은 언제나 교회와 신자들 간의 뜨거운 논쟁거리이자 맞수처럼 여겨지는 카운터파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우들에게 묻겠습니다.

믿음이 구원의 조건입니까? 아니면 행함이 구원의 조건입니까?

다른 말로 질문하겠습니다.

바울의 말이 맞습니까? 아니면 야고보의 말이 맞습니까?

답하기가 매우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을까를 간접 자료들을 통해 소개합니다.

야고보서는 히폴리투스(2세기 로마 출신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가 주후 2세기에 집대성한 무라토리 정경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략 4세기까지도 야고보서의 권위는 폭넓게 인정받지 못했다. 4세기 이후 정경 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야고보서의 정경성은 토의가 끝나지 않았다. 야고보서에 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평가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에 따르면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다. 루터가 보기에 야고보서는 신앙의 중심을 선포하지 않는다. 신앙의 중심이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이다. 믿음의 중심을 가르치지 않는 정경은 그 자리를 마땅히 내주어야 할 것이다.” (김학철, 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야고보서,9)

그러니까 루터 같은 인물은 야고보가 말한 행함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 메시지에 대해 평가절하한 셈입니다.

하지만 동시대 인물이기는 하지만, 루터의 후배 사역자라고 볼 수 있는 칼뱅을 비롯한 1548(트렌트 종교 회의) 이후 성서 신학자들은 야고보서의 정경성에 대해 적극 지지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아마도 믿음 제일주의라는 도그마에 빠져 진짜로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도외시한 중세 교회에 밀려온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것을 이겨야 한다는 영적 긴장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내놓으라 하는 믿음의 선배들까지도 왜 믿음과 행함에 대한 교리적 화두에서 일치를 보지 못했던 걸까요?

지금까지 이 논쟁거리에 대해 해석하고 설명한 너무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설교자인 제가 참고하는 자료도 야고보서에 관해서는 너무 많은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읽어보면 나름의 설득력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 역시 설교자로서 이런 주장과 학설에 대해 선택해야 하기에 고민하다가 현장 목회 신학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제게 가장 큰 울림과 제 신학적 성향에 걸맞는 해석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제 선택을 말씀드리기 위해 부연할 내용들을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14절을 새 한글성경번역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군가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새 한글 번역 성경을 읽다가 왠지 모를 통쾌함이 제게 임했습니다.

야고보가 야고보서 수신자들에게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를 너무나도 분명히 밝힌 번역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이렇게 직설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서로 차별하고 갈라치기 하면서 세속의 영역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고 있는 이방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비수를 하나 던진 것입니다.

14절은 바울이 선포한 그대로 참된 믿음을 소유함으로 구원받는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자로 정의하면서 수신자들에게 던진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의 속내는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말로 믿음이 있다고 천명하는 자라고 해서 그가 모두 구원받은 자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가 정말로 구원을 받은 믿음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삶의 내용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것입니다.

간디가 말한 그대로 내 삶이 메시지가 되는 것을 보여주는 자가 참된 믿음을 소유하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한다는 것이 야고보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이 전제를 염두하자면 저는 이렇게 야고보서에서 제기된 믿음과 행함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이렇게 제 신학적 입장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터는 믿음 제일주의라는 대세에 함몰되어 야고보가 제시했던 더 큰 그림을 무시한 실례를 범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 역시 야고보서의 저자는 결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바울의 메시지를 부인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선물로 받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의 삶에서 행함이라는 실천적 행위를 통해 예수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지론에 저 또한 서 있습니다.

그러니 기실, 오늘 14절 말씀은 2025년 한국교회라는 현장에서 비춰 볼 때 한국교회는 물론,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야고보의 직격탄이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메시지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불편하고 껄끄럽지만, 14절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광야의 소리이기에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새기고 반드시 삶으로 구원받은 이의 모습으로 변역(變易)해 나아가야 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분명히 불편해할 것을 알았지만, 수신자 디아스포라 이방 크리스천들에게 조금의 여백을 남기지 않고 고삐를 죄며 다음의 말씀을 이어갑니다.

1517절을 연이어 보겠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25:3440절을 나누겠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더불어 야고보서에서 역설한 저자의 일침이 얼마나 적확한 성서적 교훈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줍니다.

1820절을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벌써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좋습니다. 당신이 믿음을 맡으면, 나는 행함을 맡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보여줄 수 없듯이, 여러분도 믿음 없는 행함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 행함과 믿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여러분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면서, 마치 그것으로 대단한 일을 했다는 듯이 뒷짐을 진 채 만족해 하더군요. 참 대단하십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합니다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믿음과 행함을 갈라놓고도 그것을 계속 죽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메시지번역에서 저는 감탄의 감탄을 토로할 수밖에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야고보서 저자의 뜻을 분명히 인지하고 다음과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믿음과 행함을 이분법적으로 갈라치기 하지 말라. 단언컨대 믿음이 없는 행함이 없는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을 갈라치기 하는 존재는 사탄이다. 믿음, 믿음하지 말라. 믿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행함으로 그 믿음의 증거를 나타내라

저는 개인적으로 내 네이버 블로그를 관리하는 블로거입니다.

제 블로그에는 2025323일 현재, 2,604개의 글이 올려져 있습니다.

누군가의 글을 퍼온 글이 아니라, 순전히 제가 쓴 글만 2,604개가 링크되어 있습니다.

네이버 블로그는 해피빈이라는 콘텐츠가 있습니다.

블로거가 글을 쓰면 100원을 적립해 주는 시스템인데 지금까지 제가 쓴 글이 2,604개이니까 제게 적립된 금액이 260,400원입니다.

이렇게 적립된 금액을 불우한 이웃들에게 기부해 주는 콘텐츠입니다.

저는 지난 313일에 TCS증후군(트레처콜린스 증후군)이라는 희귀 유전 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태환이에게 33번째로 기부금을 보냈습니다.

이 질환은 얼굴의 뼈와 조직 형성에 영향을 주어 안면기형과 함께 소이증(귀가 작음)을 동반하기에 태환이는 태어나자마자 난청 판정을 받았고, 소리를 듣기 위해 반드시 골도 보청기를 착용해야 하는데 그 기기를 구입하는 비용으로 기부했습니다.

너무 작은 기부금이라서 어느 때에는 적절한 기부금을 더해서 보내는 일도 소홀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해피빈에 올라오는 피() 펀딩 수여자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기부자로서 역부족을 느끼기에 자괴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도 있습니다.

더불어 해피빈 기부 사역 콘텐츠에 가면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너무 많은 피 대상자들에게 기부금을 보낸 뒤에 후담들이 댓글로 달립니다.

알려드리고 싶은 점은 댓글의 내용을 추적하다 보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히 평범하게 그리고 은밀히 펀딩 섬김을 하는 이들의 면면에서 숨길 수 있는 신앙인의 모습이 담겨 있음을 발견할 때의 행복감이 제게 밀려온다는 점입니다.

정말 많은 이들이 말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임을 직감할 수 있음에 감사 또 감사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인들처럼 이름이 번지르르하게 밝혀지는 나눔이 아니라, 숨겨진 섬김 사역에 더 집중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행함 자체가 그 무엇을 증명해 내려는 시도가 아니라, 믿음이 역동하게 만드는 당연한 일이기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저는 블로그 사역의 한 가지 예를 실례로 소개했지만, 이것 말고도 진짜로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는 너무 당연히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삶을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야고보서 11번째 공부를 통해 잊지 말아야 하는 레마를 자신 있게 선언하며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두 가지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김학철 교수의 야고보서 본문 해제를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고자 합니다.

야고보서에 대한 가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이 서신이 바울 서신과 모순 관계에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오해를 요약해 말하면 이러하다. 바울은 행위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선언한다. 반면 야고보는 행위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사람이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야고보와 바울이 둘의 서신을 서로 바꿔 읽는다고 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읽는 서신이 진실한 신앙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야고보와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나 행위에 대한 쓰임이 서로 다르고, 그 단어들이 각기 다른 맥락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이나 행위에 대한 쓰임이 다르더라도, 둘 다 모두 생명을 구원하는 믿음은 단지 교리나 선언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야고보나 바울 모두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로 향하는 전인적 돌이킴, 성령 안에서의 전적인 삶을 신앙으로 간주하지, 지적 동의나 감정적 동참을 두고 참된 신앙이라고 하지 않는다.” (김학철, 위의 책, 7576)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결코 두 개의 다른 개념이 아닙니다.

김학철 교수의 말대로 믿음과 행함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로 향하는 전인적 돌이킴, 성령 안에서의 전적인 삶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주는 하나의 같은 가치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가르치다라는 단어와 ‘갈라는 말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교회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공동체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이 크게 울리게 하려면 내 삶의 텃밭들을 올바르게 갈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가르침을 받은 성도가 그 가르침을 올바르게 받았는가를 증명하는 일은 내 삶의 밭을 지금 어떻게 갈고 있느냐가 그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밭을 잘 가는 일이 행함입니다.

내 마음의 밭 가는 일을 소홀히 여기는 자는 가르침을 온전하게 받은 자라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행함과 믿음은 반비례하는 가치가 아니라, 정 비례하는 가치입니다.

기형도 시인의 시() 한 편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중 병()에서 103.)

 

사람이 늙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너무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자 순리입니다.

시리도록 아프지만 시인은 노화를 병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젊음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늙음은 초라한 게 맞습니다.

그러니 기형도는 늙음을 병이라고까지 혹평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자연의 법칙 앞에 대들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감히 말하지만 없습니다.

하지만 극복할 수 있는 병은 존재합니다.

신앙의 질이 병드는 치명적 질병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 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삶, 영적 노화를 극복하는 대안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내는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주님이 주신 땅으로/한 걸음씩 나아갈 때에/수많은 적들과 견고한 성이/나를 두렵게 하지만

주님을 신뢰함으로/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큰소리 외치며 나아가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그 땅을 취하리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그 땅을 취하리니

 

 

우리 오늘 눈물로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린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우리 함께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