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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3월 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9): 왜 교회인가?2025-03-08 14:44
작성자 Level 10

20253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9)

 

제목: 왜 교회인가?

본문: 야고보서 2:17

 

서론)

 

류호준 교수가 본인이 신학교 교수직을 은퇴하고 내놓은 책 교회에게 하고 픈 말에서 이런 문장을 새겨 놓았습니다.

설교는 무엇인가를 알려 줄(inform)뿐만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form) 일입니다.”

(류호준, 교회에게 하고 픈 말, 138)

이 문장을 만나고 나서 이런 질문과 자답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인가?

완벽한 답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답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곳이면서, 또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곳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문득 깊은 자괴감에 빠진 것 같다는 회한이 몰려왔습니다.

제천세인교회 공동체를 목회하며 나는 언급한 명제에 부합한 목사로 살아왔는가를 자문해 보니 낙제생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내 딴에는 목회자로 정글 같은 현장에서 만난 교우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명징하게 정의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달려왔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데는 현격히 실패했음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마지막 목회 연한의 필드에 서 있는 나이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목회가 정말로 너무 어렵고 또 어렵다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도 나에게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로서는 능력이 부족하여 신앙의 선배인 야고보의 도움을 받고자 오늘 본문에 주력했습니다.

 

본론)

 

본문 14절을 만나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는 주후 62년 전후에 기록된 편지로 유대 땅이 아니라, 로마가 통치하고 있던 지역 즉 유대의 시각으로 보면 이방 지역에 살고 있던 흩어져 있는 교회 공동체 형제들에게 전하는 편지임을 우리는 이미 살폈습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2장을 시작하는 첫 말머리에 수신자들을 향해 내 형제들아라고 호칭합니다.

이미 밝힌 것처럼 내 형제들아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Ἀδελφοί’(아델포이)는 주후 1세기 유대와 고대 근동 지역에서 특정한 부류에게 붙이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신앙 고백한 이들이라는 특정한 공동체에 속한 그룹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임을 감안할 때, 야고보서 저자가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에게 느끼고 있었던 감정은 동질성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저자는 1절에서 밝힌 그대로 이들을 가리켜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라고 정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유대감, 동질감이 있는 이들이 야고보서 수신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전하는 야고보서 저자의 선언은 그리 시선이 고운 메시지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절 후반절에서 분명히 그 이유를 저자는 밝힙니다.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분명히 이방 땅 디아스포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볼썽사나운 일을 저자가 지적한 것입니다.

차별하는 행태가 디아스포라 교회 공동체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경고를 날린 것입니다.

23절을 읽어보면 그 차별이 무엇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대단히 슬프고 아쉬운 일이 공동체 안에서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빈부 간 차별을 두는 행위가 만연했던 공동체가 야고보를 받는 공동체였습니다.

바로 이 구절에서 세인 공동체가 눈을 부릅뜨고 성찰할 단어가 있어 소개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빈부의 차별이라는 악한 짓을 했던 장소를 분명히 밝힙니다.

회당’(synagogue)이었습니다.

회당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은 그들이 예배하는 유일한 가시적 장소를 예루살렘에 만들었습니다.

그 유명한 솔로몬 성전입니다.

하지만, 이 성전은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입으로 완전히 무너져 초토화되었습니다.

예배하고 제사를 드릴 장소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후 유대인 중에 많은 이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방의 땅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졸지에 하나님께 예배할 장소를 상실한 셈입니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포로 기간에 이들이 야훼 하나님께 예배할 대안을 찾았고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회당 공동체(synagogue)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방 땅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유대 신앙공동체의 가시적 장소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리고 율법을 공부하는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이런 이유로 시작된 회당 공동체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예루살렘이 아닌 이스라엘 지방 도시에 세워져서 지방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예배 및 교육 장소로 활용되었고, 바울 서신에서 보는 것처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이방 땅에 만들어 놓은 유대인들의 율법 교육 및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로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회당 공동체입니다.

주목할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회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승계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회당 공동체는 디아스포라 예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말입니다.

종교 개혁지 탐방 중에 방문했던 프랑스 샹제리제 거리에 유대인들이 예배하는 회당을 보았는데 유감스럽게 휴관하는 날이라, 직접 견학할 수 없어 아쉬움을 갖고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회당은 세계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는 유대인들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는 장소가 회당이었습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적용한다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명하는 은혜를 공급받는 장소 역시 회당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 저자가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인 회당에서 자행되는 전혀 아름답지 못한 비신앙적 일탈에 대해 준엄하게 경고한 메시지가 본문 24절에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비신앙적 행위를 거침없이 질타하고 있습니다.

빈부에 따른 차별 행위였습니다.

한병수 목사가 쓴 글 중에 23절에 관련된 주석을 한 부분 소개해 보겠습니다.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당시에 공적인 권세를 가진 관리, 재벌급 부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부하고 유력한 사람이 회당에 나타나면 그의 관심을 차지하고 싶어서 대단히 예의 바른 꿀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이 그에게 쏠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누군가를 열렬히 주목하는 것은 그 자체가 차별 행위일 수 있습니다. (중략) 반면,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등장하면 눈길을 주며 아래위를 훑다가 급히 회수하여 대변을 밟은 것처럼 불쾌한 표정을 짓습니다. 외모에 나타난 남루한 신분이 파악되면 흘기는 눈으로 뾰족하고 모멸적인 시선을 보냅니다.”

(한병수, 야고보서에 반하다., 다함, 115156)

이런 사악한 행위가 회당에서 벌어졌다는 점을 야고보서 저자는 분명히 합니다.

이런 행위가 아주 못된 죄악이고 저질스러운 행태임을 천명하기 위해 저자는 이어진 57절에서 부가 의문문 형식을 동원하여 매우 강하게 성토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표준 새 번역 성경은 57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결국 무엇을 야고보서 저자가 말하려고 한 것입니까?

그대들을 괴롭히고 압제하고 못살게 군 이들이 부자들인데 왜 그들이 회당에 나올 때,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혈안이 되는가?”라고 반문한 것입니다.

특히 야고보서 저자가 강조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는 구조이고 그런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는 곳이지만, 어찌 그런 결과와 반대로 거슬려 가야 하는 교회(회당)마저도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은 참담한 일을 따라서 하려고 합니까?”

이것이 야고보서 저자가 외치고 있는 일성이었습니다.

결국, 차별은 세상이 하는 것이지, 교회가 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다시 1절로 돌아갑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차별이라고 번역된 단어 προσωπολημψίαις’ (프로스폴렙아이스)의 문자적 의미는 편파적임혹은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차별한다는 단어의 신학적 함의는 갈라치기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은 빈부의 차별만을 거론했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차별의 내용을 한병수 목사는 본인의 책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우등하고 여자는 열등하다. (남녀 차별) 부자는 우등하고 빈자는 열등하다. (빈부 차별), 주인은 우등하고 종은 열등하다. (주종 차별), 고득점은 우등하고 저득점은 열등하다. (성적 차별), 유식한 저자는 우등하고 무식한 독자는 열등하다. (지식 차별), 수도권은 우등하고 지방은 열등하다. (지역 차별) 서양은 우등하고 동양은 열등하다. (문명 차별) 잘생긴 사람은 우등하고 못생긴 사람은 열등하다. (외모 차별), 고등직은 우등하고 하위직은 열등하다. (직위 차별) 백인은 우등하고 흑인은 열등하다. (인종 차별) 유능은 우등하고 무능은 열등하다. (재능 차별)” (한병수, 위의 책, 157)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차별이 어찌 이것만 있겠습니까?

종이 열 장으로 더 적을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다양한 게 차별 의식입니다.

누가복음 18:914절을 만나 보십시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이 구절을 묵상할 때 추상같이 내리치는 죽비와 같은 교훈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이 몰고 간 차별성이 악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100%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교훈을 각색한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집으로 돌아간 두 사람의 그 이후의 행적을 각색한 글입니다.

바리새인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위선과 교만을 회개하고 돌아섭니다.

하지만, 세리의 후담을 각색한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뻤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것이 매우 기뻤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저 바리새인처럼 교만하지 않고, 외식적이지 않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만에 하나, 세리가 이렇게 기도했다면 그 역시 바리새인과 차별화된 것을 자랑하는 자기의(自己義)에 빠진 죄인입니다.”

적절한 가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4절에서 야고보 기자는 이런 차별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가를 질문하며 자답까지 합니다.

다시 4절입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차별하는 일은 전적으로 악한 생각에 기인합니다.

악한 생각의 근원적 기저는 사탄에게서 방출됩니다.

사탄의 영역에서 사탄이 통치하는 방식은 차별하라는 것입니다.

전방위적으로 차별하라고 압박하는 것이 사탄의 통치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대목에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 주시는 영적 교훈과 도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왜 교회입니까? 교회는 사탄이 통치하는 방식과 맞서기 때문에 교회입니다.

 

사탄의 통치 방식이 할 수만 있으면 갈라치기 하며 차별하라고 종용하는 것이라면, 교회는 할 수만 있으면이라는 조건을 내걸지 말고, 무슨 상황,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차별하지 않는 것이 교회 공동체임을 알려 줍니다.

교회는 갈라치기 하지 말아야 하는 곳입니다.

우생학(eugenics)’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습니까?

문자적으로 쉽게 말씀드리자면 다윈이 주장했던 적자생존을 악용한 실례가 우생학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존재하는 생물들은 진화된 존재만 생존할 수 있다는 이론을 골격으로 합니다.

문제는 이런 다윈의 이론을 변질시킨 자들이 인간에게도 우수한 인종이 존재하며, 그 우수한 인종은 열등한 존재들을 짓밟고 생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선동했다는 점에서 경악할 만합니다.

이렇게 변질된 독일의 사회다원주의자들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며 나치즘을 탄생시켰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던 유대인을 학살이라는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자행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차별은 전적인 사탄의 궤계이며 작품입니다.

교회는 무엇 하는 곳입니까?

사탄의 궤계로 인해 전방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차별함과 맞서는 곳이 교회입니다.

왜 교회가 이런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까?

교회는 사탄의 공격을 초토화할 수 있는 유일한 이 땅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1521절을 받들어 봉독하겠습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하나님은 사탄의 궤계를 수포로 만드시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차별하는 행위와 맞서야 합니다.

이것을 이루어가는 곳이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194410,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프린츠 알프레히트 슈트라세 게슈타포 지하감옥으로 이송되어 수감됩니다.

그러니까 순교하기 6개월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앞으로 죽음을 예상하듯 시를 한 편 씁니다.

 

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싸여(Von guten Mächten)

 

선한 권능에 어린애같이 고요히 감싸여/보호와 위로를 받으니 놀라워라

나 이 날들을 그대와 함께 살려네/새해를 그대들과 함께 맞이 하려네.

묵은해가 우리 마음을 괴롭히고/괴로운 날들이 무거운 짐이 우리를 억누르려 하니

오 주님, 우리의 놀란 영혼에/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을 베푸소서.

당신께서 괴로운 잔, 쓴 잔/철철 넘치는 고난의 잔을 건네시니

당신의 선하고 사랑스러운 손에서/떨지 않고 감사히 받아 마십시다.

그러나 당신께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쁨을 베푸시어

이 세상과 그 햇살을 보게 하신다면/과거를 잊지 않고

우리의 일생을 당신께 온전히 바치겠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어둠 속에 들여보내신/양초가 오늘 따스하게 환히 타오르게 하시고

되도록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 주소서.

고요가 우리 주위에 짙게 퍼지고 있으니

우리에게 들려주소서. 보이지 않게 주위와 퍼지는/세상의 저 충만한 소리를

당신의 모든 자녀가 부르는 힘찬 찬송 소리를.

놀랍게도 선한 권능에 감싸여 보호를 받으니

우리는 다가올 일은 자신 있게 기다리노라.

하나님은 저녁에도 아침에도 우리와 함께하시고/새날에도 확실히 함께하신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인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들입니다.

교회는 선한 싸움을 벌이는 근원적 기저요, 장소입니다.

사탄의 궤계와 공격에서 물러서지 마십시다.

교회는 이깁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 땅의 유일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 선한 능력으로 안으시네/그 크신 팔로 날 붙드시네

절망 속에도 흔들리지 않고/사랑하는 주 얼굴 구하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이전의 괴로움 날 에워싸고/고난의 길을 걷는다 해도

주님께 모두 맡긴 우리 영혼/끝내 승리의 날을 맞으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주님이 마신 고난의 쓴 잔을/우리도 감사하며 받으리

주님의 남은 고난 채워가며/예수와 복음 위해 살리라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