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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3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8): 무엇이 경건인가?2025-03-01 14:54
작성자 Level 10

20253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8)

 

제목: 무엇이 경건인가?

본문: 야고보서 1:2627

 

서론)

 

영화 미션을 기억하십니까?

우리나라에도 1986년에 개봉한 롤랑 조페가 총연출을 맡아 감독하고, 그 유명한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 감독하며 넬라 판타지아를 삽입했던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던 영화가 바로 영화 미션입니다.

이 영화가 주었던 감동과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저는 신학교 졸업반 시절이었기에 더더군다나 앞으로 목사가 될 소양을 갖출 때라 영화가 주었던 이런저런 감동은 지금도 생각해 보면 전율하게 하는 추억이 오롯이 있습니다.

영화가 주었던 감동을 이 짧은 설교 시간에 교우들에게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특히 신학교 졸업반 학생이었던 저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던 한 테마만 전해 보려고 합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미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서로 경쟁하며 싸우던 18세기 암흑의 시기에 파라과이는 두 나라의 팽창 싸움에 휘말리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됩니다.

특히 파라과이 부족인 과라니족이 살고 있었던 이과수 폭포 지역에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어가 선교한 끝에 지상 최고의 낙원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가톨릭교회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천국과도 같은 과라니 원주민들이 만든 예수회 교회는 스페인, 포르투갈이라는 서구 열강 간의 영토 다툼 끝에 마드리드 조약에 의해 포르투갈의 영토에 편입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합니다.

당시 무신론자인 포르투갈 왕은 자신의 영토로 귀속된 이과수에 세워진 교회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군사력을 동원해 예수회 교회 폐쇄와 스페인 사제들의 철수를 명령하고 교황의 전권 대사인 추기경을 파견해 설득합니다.

하지만, 예수회 소속 신부였던 가브리엘 신부는 교회 폐쇄와 철수 명령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가브리엘 신부를 따르던 멘티 멘도사 수사가 있었는데, 그는 회심하여 가톨릭 신앙으로 귀의하기 전에 원래 과라니족을 인신매매하여 유럽에 노예로 팔면서 부를 축적한 아주 질 나쁜 인간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자신의 애인과 바람을 피운 이복동생과 펜싱으로 결투를 벌이다가 동생을 죽인 살인자이기도 한 냉혈한이었습니다.

하지만 멘도사는 가브리엘 신부가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에 변화되어 사제가 될 꿈을 꾸며 과라니 부족 선교에 동참했고, 그렇게 자신의 죄를 참회해 가는 과정에 포르투갈이 압박하는 예수회 교회 폐쇄라는 비상식적인 폭력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가브리엘과 달리 다혈질적인 멘도사는 칼과 창을 들고 포르투갈과 맞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그의 성향은 폭력에 맞서는 방향에서 가브리엘 신부와 갈라서는 계기가 됩니다.

포르투갈 군대의 폭력 앞에 각기의 방법으로 교회 폐쇄를 막기에 나서는데 가브리엘 신부는 십자가 사랑으로, 멘도사는 칼과 창으로 폭력과 맞서지만, 결국 엄청난 군사력에 의해 둘 다 희생됩니다.

포르투갈의 잔인한 만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과라니 부족의 교회 공동체는 전멸을 당하면서 영화는 새드 엔딩합니다.

이 슬픈 엔딩 장면은 어언 4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지워지지 않는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 폐쇄를 전하고 선교사들의 철수를 권했지만, 그들이 거부하자 어쩔 수 없이 국가권력과 그 권력에 기생하던 교황청과 스페인 가톨릭교회는 서로 야합하여 첨단 총과 대포로 무장한 포르투갈 군사 진압에 암묵적으로 사인을 합니다.

그 대표자가 스페인 출신의 추기경이었습니다.

총과 대포로 쑥대밭이 된 과라니 부족 교회를 보며 최소한의 양심으로 괴로워하던 추기경은 이 모든 폭력을 묵인한 사악한 교황 베네딕토 14세에게 편지 쓰고 독백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목사가 되겠다고 준비하고 있는 저에게 이 엔딩 장면을 잊을 수가 없는 최고의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황 성하, 그리하여 사제들은 죽고, 저만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건 나고, 산 자는 그분들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미션, OST 시놉시스에서)

 

본론)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무엇이 경건인가?”라고 정했습니다.

20대 전도사 시절, 경건해 보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겉멋으로 위장하고 포장했습니다.

30, 40대 젊은 목사 시절, 경건은 주의 사역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온 힘 다해 교회 부흥을 시키는 것이 경건인 줄 알고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렸습니다.

50대 중년 목사 시절, 경건은 성도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설교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착각하여 설교 준비에 목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60대 중반, 사역의 종착지를 향해 걷는 노년으로 들어가는 목사의 삶을 살고 있는 오늘, 경건은 앞에서 언급한 것들이 아님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60대에 느끼는 진실한 경건은 토달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내는 삶이 경건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사역을 마치고 내려오는 그날, 내 영혼의 울림 안에서 조직과 제도 안에서 갖고 있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는 헛소리를 주군께 자랑질하는 목사로 서게 된다면 이건 정말로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재앙의 삶을 산 목사의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주군이신 하나님께서 내 남은 사역의 여정 중에 내게 요구하는 외식하는 경건이 아니라, 그날 두 팔 벌려 너른 품으로 안으실 진짜 경건한 삶인 말씀대로 살아내는 내 삶이 되기를 기대하고, 여러분의 삶도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진실한 경건의 모습을 야고보서 저자의 직언을 기초로 하여 두 가지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1) 말을 줄이는 삶입니다.


본문 26절을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서 기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수신자들을 향해 혀에 재갈을 물라고 직격탄을 날립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방 문화의 환경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합리화하지 말며 막 살지 말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적어도 이방 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말씀에서 배제된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권면이자 경고를 던진 셈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이 있다는 게 더 서글픈 일인 듯합니다.

김학철 교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특별히 와 관련된 경고를 한다. 이로 보아 이 경고는 일차적으로 과 관련하여 공동체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의 위선을 향해 있는 것 같다. 이른바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일수록 위선과 자기기만에 빠질 위험이 크다.” (김학철, 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야고보서, 59)

디아스포라 공동체 안에 있는 리더 중에 겉멋 든 이들이 있음을 고발한 것입니다.

결국 본문이 야고보서 안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수신자 공동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겉멋 들지 말고 모두에게 말을 줄이라는 권면을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7:111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빌라도 총독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은 세속 법정이라는 살벌한 체제 안에 묶여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데도 예수께서는 본디오 빌라도의 질문에 딱 한 번 답변하신 것 외에 단 한 번도 자신을 공격하는 질문에 입을 닫으셨습니다.

왜 주님은 당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을까요?

학자들은 세 가지 이유 때문임을 전합니다.

죽어야 하는 구속사를 완성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말해도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이 놓은 덫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답변의 가치가 없는 헛 질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하실 수 있는 방어는 입을 닫는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이 제시한 글에서 보여주는 교훈은 예수께서도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는 가르침입니다.

몇 년 전에 소설가 김훈이 쓴 산문집에서 이 문장을 만났습니다.

나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자가 되고, 읽는 자가 아니라 들여다보는 자가 되려 한다. 나는 글자보다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고, 가까운 것들을 가까이하려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야,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김훈, 연필로 쓰기, 문학동네, 7576)

제가 이 글을 담아둔 이유는 뜻밖에도 표현된 부사 한 단어가 크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겨우라는 부사입니다.

저도 대단히 경계하려고 하지만, 삶에서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겨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하는 무지함 때문에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제 스스로 대단히 위험하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습니다.

정말로 싫어하는 인간입니다.

나는 모든 걸 다 안다고 떠벌이는 자기 확신에 찬 사람입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227일 성서 묵상 글입니다.

오늘부터 담임목사 셀은 이재철 목사의 새신자반, 성숙자반, 사명자반 시리즈를 마치고 김기석 목사의 역작인 오래된 새길-포이에미 간을 교재로 공부한다. 첫 번째 텍스트에 이런 글이 있다. “인간은 위대하다. 그러나 위험하다.” 얼마나 명료한 인간 이해인가? 나 또한 김 목사의 인간 정의에 오롯이 동의한다. 목회자로 서서 지난한 세월을 달렸다. 목회자로 서서 내 사역의 임기 중에 현장을 섬기며 가장 힘들었던 건, 대단히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었다. 사람처럼 난해한 동물은 없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안티고네에서 이렇게 말했나 보다. “이상한 존재는 많지만, 사람보다 더 이상한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이상한 존재를 창조하신 분이다. 그러니 인간을 얼마나 잘 아실까? 재론의 여지가 없는 명제다. 야훼께서는 이상한 존재 그룹인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할 거라고 말하며 아주 의미 있는 어록을 남기셨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오늘 성서 일과 신명기 9:5절이다, 하나님은 이상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경계하셨다. 그들이 얼마나 교만하며 이상한 존재인지 아셨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당신의 사역을 맡기면서도 네 힘이나 네 방법이나 네 지식을 내가 믿는다고 하지 않으셨다. 다만 내가 스스로 일을 해서 네게 준다고 하신 오늘 성서 일과를 묵상하다가 복잡한 감정에 빠진다. 하나님이 나도 믿지 못하실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기분 나쁘지 않다. 하나님께 감사하다. 나같이 이상한 존재를 믿지 않으시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직접 일을 행하고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끈을 끊지 않고 당신의 일을 행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의 조건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만들어가시는 일에 나는 감사만 올린다. 그게 이상한 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요, 반응이다.”

부족함이 전부인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엎드리는 것이 사는 태도입니다.

진짜로 경건한 삶을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은 내가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말을 줄이는 엎드려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려면 말을 줄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2) 삶의 방향성을 하나님의 궤적에 맞추려는 삶입니다.

 

본문 27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설교 원고를 작성하면서 야고보서 기자가 일격(一擊)한 이 구절이 한 주간 내 마음을 방망이질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의 현실적 직시 안에서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의 모습을 갖출 수 있다는 저자의 권면 앞에서 꼼짝없이 포로 된 느낌을 지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더러움이 없는 신실한 경건을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환란 당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삶이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이다.

결국 내 삶의 방향성을 하나님의 궤적에 맞추려는 삶이 진짜 경건임을 알려 줍니다.

구약성경이 줄곧 말하는 테제가 있습니다.

특히 예언서는 이 테제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미가 6:8절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예언자 예레미야도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7:57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아모스 예언자도 5:2124절에서 직격했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야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일심은 단 하나입니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폼 잡고, 거들먹거리고, 신앙의 연수를 자랑하고, 나는 이런 경험한 사람이라고 나대는 더럽혀진 경건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 미션에서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아 과라니족이 만든 교회 공동체를 무력으로 짓밟는 일에 암묵적으로 방관한 추기경의 외형적 경건에 하나님은 단 1%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힘이 정의라면 이 땅에 사랑이 설 자리가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멘도사의 무력 대항까지도 반대하며 십자가를 들고 과라니 원주민 신자들과 대포가 떨어지고, 총탄이 날아드는 폭력의 괴물들 앞으로 나아갔던 가브리엘 신부의 그 진정한 경건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예수 믿는 자들이 폭력을 부추기는 일에 동조하고, 방관한다면 그것이 어찌 삶의 방향성을 하나님의 궤적이 맞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 자들이 어찌 코람데오의 신앙적 바탕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양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선포했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무거운 울림과 경책을 줍니다.

디모데후서 3:25절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내 삶의 궤적을 하나님의 궤적에 맞추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경건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글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진리를 찾는 것보다 진리를 아는 편이 훨씬 더 쉽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여행과 같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고, 과거에 배운 것을 버리고, 변화를 겪으며 성장한다. 종교적 진리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라서 절대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는 주장으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종교적 진리의 탐구는 멈추지 않고 항상 계속되는 과정이다.” (챨스 킴볼, 종교가 사악해질 때, 현암사, 12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생활은 마침표를 찍는 피리어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쉼표를 찍는 콤마(,)입니다.

찰스 킴볼의 말대로 신앙적 탐구와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단지 이 과정 중에 말을 줄이는 삶과 하나님의 궤적과 맞추려는 내 삶을 살아내는 노력이 바로 진실한 경건 생활로 가는 길임을 믿고 그 길을 걸을 뿐입니다.

이 길을 잘 걸어가는 교우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 지치고 내 마음 연약할 때

 

나 지치고 내 영혼 연약할 때/근심 속에 내 마음 무거워

주 오셔서 함께 하실 때까지/나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

열망 없는 그런 삶은 없으리/끊임없이 고동치는 가슴

주 오셔서 경이로 날 채우고/영원한 삶 나에게 주시네

 

후렴)

날 세우사 저 산에 우뚝 서리/날 세우사 풍랑 가운데도

함께 하심 나 강하게 하네/날 세우사 모든 것 할 수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