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2025년 2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7): 자기만족은 신앙이 아닙니다.2025-02-22 19:39
작성자 Level 10

20252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7)

 

제목: 자기만족은 신앙이 아닙니다.

본문: 야고보서 1:2225

 

서론)

 

몇 년 전에 존스토트 목사의 글을 읽다가 벼락이 친 뒤에 천둥소리가 몰려오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영적 굉음처럼 다가온 문장을 발견하고 설교 자료 노트에 보관해 놓은 글을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타협을 포기하라. 마지못해 포기하는 마음에서 돌아서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의 자리에 놓으라. 그분을 여러분의 주로 삼아라. 그분의 기준을 따르라. 그러면 여러분의 소금은 짠맛을 낼 것이며, 여러분의 빛은 빛이 비췰 것이다.”(존 스토트, 온전한 그리스도인, IVP, 123)

이 문장은 존 스토트 목사가 1980년 영국에 사는 크리스천 의사들의 국제 대회에서 행한 설교 중에 나오는 글입니다.

사회적으로 인텔리 계층에 있는 의사들, 그것도 크리스천 의사들이기에 아마도 존 스토트 목사의 설교를 듣는 그들은 영국 사회가 주는 여러 혜택과 경제적 풍요로움 그리고 사회 권력의 측면에서 볼 때 안정적 기득권이 그들일 것입니다.

아마도 설교를 경청한 대상들의 마음에는 이런 제반적인 세속적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충만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자아의 안전과 타협하고, ‘기꺼이가 아니라 마지못해행하는 헌신을 타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허드렛일 정도로 여기지 말고 그분의 기준을 따르라고 토설한 존 스토트 목사의 사자후(獅子吼)가 내 마음과 동일하여 그의 설교는 적어도 내게 벼락과 천둥소리로 다가왔습니다.

출애굽기 20:4절은 주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하명(下命)하신 십계명 중에 두 번째 계명을 소개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눈에 띄는 점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의 기저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이유인데 바로 이 점입니다.

너를 위하여

너를 위하여라는 주님의 소리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인간이 자기를 위하는 자기만족이야말로 우상의 표본임을 분명히 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빌립보서 2:68절에서 바울은 자기의 주군이신 예수께서 보이셨던 삶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앞에서 언급했던 너를 위하여라는 자기만족과는 정반대로 주님은 자기를 비우셨고, 부인하셨음을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운 아들 예수를 아버지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어지는 빌립보서 2:911절은 보고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빌립보서 2:68절 말씀대로 살아, 2:911절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이 행보로 인해 저는 이 찬양을 부를 때 압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본론)

 

저는 본문 설교를 이어가면서 자기만족이라는 종교 생활의 정체를 밝혀보려고 합니다.

경청의 은혜에 이어 삶으로 연계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22절은 어마어마한 메시지이며 큰 울림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나는 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충격을 받곤 합니다.

Living Bible 버전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And remember, it is a message to obey, not just to listen to. So don’t fool yourselves.” (그런데 명심하십시오. 단지 듣는 것만이 아니라, 복종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십시오.)

실로 파격이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강해를 시작하는 첫 번째 시간에 저는 교우들에게 야고보서라는 이 편지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가 썼을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그 시간이 이런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형 예수가 부활한 팩트를 보기 전까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믿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형 예수를 귀신에 붙들려 미친 상태라고 생각할 정도로 형을 적대시한 동생이 야고보였습니다.

마가복음 3:21절과 3:31-32절을 소개합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2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3132)

마가는 당시 정황을 분명히 보고합니다.

형 예수가 미쳤기에 그를 붙들러 왔다고 보고합니다.

또 하나의 정보는 3132절에 연이어 기록된 밖에라는 단어에서 찾게 되는 정보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그에 관한 소문을 듣고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왔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예수를 붙들어 자신들의 보호 아래 두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미친 상태로 간주되었기에 아마도 가족도 예수를 미친 상태인 귀신 들린 것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중략) 특히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있다는 표현은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밖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 집단에 들지 못한 자들을 지칭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 육신의 가족들은 예수의 진정한 제자 군에서 배제된다고 할 수 있다.”(양용의, 마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9091)

여기에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던 야고보가 어떻게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었을까요?

그 답을 사도행전 1:13-14절이 제시합니다.

사도행전 1:1314절을 주목하십시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불신자 야고보가 신실한 제자로 변화된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이곳에서 내가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마가 다락방에 올라가 성령 강림을 기대하며 전심으로 기도했다고 보고한 보고를 참고한다면 야고보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체험한 뒤에 신실한 제자로 서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야고보를 순교자의 반열에 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서도록 견인한 사건은 오순절 성령 체험 사건일 것입니다.

이렇게 든든히 예수의 제자로 선 야고보는 전승에 의하면 주후 62년 대제사장 안나스(아나누스)에 의해 투석형으로 사형당했다고 보고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아름다운 피날레를 장식한 위대한 동역자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그가 남긴 야고보서는 이후 2,000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후배인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전제할 때 본문 22절은 실로 엄청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 편지를 받는 흩어진 12지파 공동체의 형제들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흩어져 있는 12지파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후 1세기 상황을 미루어 보아, 이국의 땅에 살고 있었기에 적지 않은 불이익을 당했을 것이며, 이교도들에 의해 신앙적 핍박도 많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들은 살고 있는 땅에서 시민권이 없었기에 대단히 척박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유대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 비해 당하는 고난이 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삶에 지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교훈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한다거나, 영적 삶의 깊이에 대해 성찰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겨우, 그들에게 전승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이 이방 땅에서 살아가는 자로서 최선이라는 마음에 자위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동기 목사가 뉴욕에서 목회를 합니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 이민 교회에서 금기시하는 단어가 있다. ‘헌신이라는 단어야.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헌신을 말하는 목회자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목사님, 헌신은 목사님이 하십시오. 우리 이민자들은 살기가 너무 바빠서 헌신이라는 단어가 들어오지 않아요. 헌신은 여유가 있는 자들이나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십시오.”

저는 친구의 말이 이민 교회에 해당하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교회를 보면 이 말은 이민 교회에서나 볼 수 있는 항목이 아님을 절절하게 느낍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도 신앙 생활하는 신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무릎을 꿇은 교회들이 비일비재합니다.

헌신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와서 말씀을 들어만 주어도 황송합니다. 그러니 일주일에 한 번이라고 좋으니, 교회에서 출석해 말씀만 들어주시기를 앙망합니다.”

지난 주간, 김기석 목사의 기도문만을 엮은 책을 손에 들고 읽다가 내 마음을 훔친 글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세월의 더께가 앉은 우리 영혼은 죄에 대해 아주 둔감해졌습니다. 영적 민감함을 잃어 버렸기에 세상에 만연한 아픔을 보면서도 아파하지 않습니다. 욕망 둘레를 맴돌며 근근이 살아가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함께 병든 세상,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자고 부르십니다. 주님, 그 부름에 응답하고 싶습니다.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일체 군더더기를 걷어내 주시고, 주님의 마음과 꿈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당신은 바다에 많은 길을 내시어도, 꽃자리, 76)

저는 이런 영적 오기를 갖습니다.

세인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덕지덕지한 세속적 가치에 함몰된 욕망의 테두리 안에서 명목적 그리스도인으로 혹은 교회 안의 불신자로 살아가는 갑각류 크리스천들이 들끓고 있지만, 오늘 본문의 저자인 야고보처럼 온전히 변화되어 신실한 주의 제자로 단 한 명이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변화를 기대하며 존재하는 것이 교회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거룩한 오기입니다.

그 영혼이 한 명이면 어떻고 두 명이면 또 어떻습니까? 절망이기는 하지만 또 없으면 어떻습니까?

교회는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다시 22절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듣기만 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될 가능성 100%입니다.

너무 무섭고 두려운 것은 들은 게 너무 많아 말씀의 풍월을 읊을 정도의 사람이 변질될 때 임하는 재앙입니다.

말씀을 자기 성장의 무기로 삼는 것이 아니라, 헌신하지 않는 자기변호와 자기만족의 무기로 삼는 재앙입니다.

왜 이런 재앙이 임합니까?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자기만족을 삼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이 참담한 세속의 가치가 휘어잡고 있는 오늘날, 하나님 말씀을 정기적으로 듣고 있는 나는 참 괜찮은 그리스도인이야.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도 대단히 훌륭한 일이고 신자야.”

무서운 괴물 중의 괴물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본문에서 이렇게 연이어 불을 토합니다.

2325절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에 취해 있는 자는 영적 나르시시즘에 함몰된 자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이런 자가당착이나 자기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성도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저자는 복기합니다.

 

받은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돼라.”(22)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다.”(23)

행하는 사람은 행하는 일로 복을 받으리라” (232f)

너무 중요한 팩트입니다.

승리의 관건은 듣는 것이 아니라, 들을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식상하셨습니까?

너무 많이 들으셨습니까?

또 그 소리냐고 항변하실 생각입니까?

뭐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미국에 있는 이민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족에 겨워 기뻐하도록 만드는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영희 목사께서 우리 교회에 등록하고 저와 교제할 때, 했던 말이 절절합니다.

목사님, 제천세인교회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목사이기에 느끼는 여러 아쉬움이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세인교회를 만났는데 제게 이상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한 주, 두 주를 예배로 섬기면서 든 묘한 영적 감정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안정적이지?. 왜 나는 세인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행복하지? 묘한 감동이었습니다.”

여러 교우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지 이강덕 목사의 설교는 자기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설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대단히 강하게 자기 부인을 강조하고 압박하며 역설하는 설교가 대부분입니다.

감히 상상해 보지만, 자기만족을 선포하여 귀를 달콤하게 만드는 메시지를 들었다면 안 목사님 내외에게 그런 영적 소회가 임했겠습니까?

새벽에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하나님, 종이 무능합니다. 무지합니다. 그래서 적절한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누구나를 다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천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 중에 혼탁한 말씀의 홍수에 어지러워하며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심령들이 참 많이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워 사무치는 안타까움을 갖고 있는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는 동역자를 보내 주십시오.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 동역자를 보내 주십시오.”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이들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여 그 말씀을 무기 삼아 자기를 방어하고 변호하는 영적 괴물들이 아닙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이들은 말씀을 듣고 난 뒤에, 그 말씀이 이해가 되든지 이해가 되지 않든지, 유익이 되든지 유익이 되지 않든지 말씀을 재단하지 않고 받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주, 수요예배 혁명보다 위대한 것이라는 제하의 설교를 영상으로 받은 지인 권사님이 제게 이런 피드백을 보내 주셨습니다.

목사님 수요예배 말씀 잘 받았습니다. 모태 신앙은 아니지만. 근 칠십 평생을 교회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다가 삼십 대 중반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지하지만 기쁨으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힘없고 연약한 노인의 길을 걷고 있지만.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생각에 많이 잠깁니다. 그래도 말씀 앞에 서서 자랑거리 없는 나의 이력 앞에서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자랑거리가 되는 내 삶의 여정에서 기쁨이요, 은혜요, 감사임을 간증하며 살고 싶어요. 주신 말씀 감사하며. 그 은혜로 남은 시간 살아내겠습니다. 목사님 감사드리며 샬롬을 전합니다.”

저는 답글을 보내주신 권사님과 5년을 같은 교회에서 사역하며 섬겼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젊은 날, 교회학교 맡아 부장으로 섬기던 권사님이 아픔을 당한 주일 학교 어린이를 위해 금식하며 그 어린 심령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중보했던 기억을 오롯이 갖고 있습니다.

당시 울며 토로하던 그 권사님의 동역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수요예배 설교를 받고 권사님이 제게 보내준 이 피드백이 설교 사역을 감당하는 목사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위로가 되었든지 가슴에 담아 교우들에게 공지하고 있습니다.

주신 말씀 감사하며. 그 은혜로 남은 시간 살아내겠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듣고 귀가 커진 괴물이 아닙니다.

들은 말씀은 살아내는 자입니다.

뼈를 붙이고 살을 붙일 이유가 없습니다.

내게 전해진 말씀을 귀로 들었으면, 반드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만족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살아냄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

여호와는 나의 힘이여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여호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주의 이름으로 내 손 들리라

 

연이어

 

성령의 새 바람 이 땅에 불어오소서/주의 영 그 생기로/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땅에 하나님 영광 거하는/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열방에 하나님 영광 비추는/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