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6) 제목: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본문: 야고보서 1:19〜21 서론) 이임순 집사께서 지난 주간 은혜롭게 읽고 있는 책인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에 기록된 글감 하나를 제게 보내 주었습니다. “문득 의구심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고, 이해하며, 사랑하려고 애쓰시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요? 그것을 알고는 있었던 걸까요?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찾으시도록 나를 드러낼 것인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아실 수 있도록 나를 보여드릴까입니다.” (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향』, 포이에마, 166쪽) 이 문장을 받고 이 집사를 격려하고 싶었습니다. 이 문장이 눈에 들어와 제가 보내 준 이 집사의 선한 의도는 말하기보다는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은 그분이 내게 날마다 주시는 듣는 것 즉 ‘경청하는 일’이라고 내면에서 확신했기 때문일 텐데 그 만남은 충분히 격려할 내용이었습니다. 작가 이기주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당신의 입이 아니라 어쩌면 당신의 귀를 원하는지 모른다.” (이기주, 『말의 품격』, 황소북스, 39쪽) 나는 작가의 말이 성경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한 주간 오늘 설교 준비를 위해 주님께 귀를 내어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본론) 야고보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오늘 본문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권면을 남겼습니다. 본문 19〜20절을 나누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야고보서 기자의 이 가르침은 너무 큰 울림이어서 그 무게를 들기가 버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19〜20절의 말씀이 얼마나 귀하고 또 귀한 영적 시금석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렇게 해야 할 이유를 성냄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저자는 20절에서 정답까지 제시합니다. 야고보서 저자가 이렇게 말한 배경에 대해 김학철 교수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는데 귀에 담을 만합니다. “야고보서가 저작된 시기가 주후 60년 이전 시기라면 그때는 반로마적인 정서가 팽배하여 각 처에서 ‘무장봉기’와 ‘도적 떼’가 횡행하던 시기였다. ‘도적 떼’는 반로마적 정서를 가진 게릴라를 뜻한다. 과도한 세금과 낮은 수준의 생산력 때문에, 로마 제국 곳곳에서 로마에 대한 무장 투쟁이 빈번히 일어났다. 저작 시기가 주후 60년 이후 즉 1세기 말이라고 해도 이러한 정서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몰락과 성전 파괴 이후 유대인들에게 공공연한 무장봉기는 줄었을지 모르겠지만 반로마적 분위기는 여전했다. 이런 시기였기에 많은 이들의 성냄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야고보서 저자는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성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고 권면한 것이다.” (김학철, 『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야고보서』, 47쪽) 성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도들이 귀담아야 할 보석과도 같은 메시지입니다. 아마도 야고보서를 수신하는 주후 1세기 그리스-로마 지역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서적 공통점 중의 하나는 자신들이 로마에 속박된 상태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수신자들이 내뱉는 언어들도 아무리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언어는 매우 폭력적이고, 도발적인 것들이 다분히 있었을 것을 전제한 발언이 본문 19〜20절의 발언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이 권면이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야고보서 저자가 권한 격언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격언으로 존재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 중에서 『말의 형량』이라는 시가 있는데 음미해 보십시다. “한 알의 말이 썩는 아픔, 한 덩어리의 말의 불이 타는 아픔, 말씀이 살이 된 살이 타는 무두질의 아픔, 제가 하는 바를 모르고 하는 저 죽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말의 이별의 슬픔, 이별 슬픈 말, 완강한 어둠의 폭력에 상처 입은 한 줄기 빛의 예리한 아픔의 아름다움, 어둠 긁는 말의 마디마디에 흐르는 피의 아픔의 아름다움, 어둠 슬픈 말, 꽃도 피면 시드나니가 아니라 시들음의 향기화(香氣化), 죽음에 향기를 충전(充電)하는 삶의 필요성, 큰 죽음은 크게 반짝이고 작은 죽음은 작게 반짝임, 별 하나 나 하나, 두려움, 말의 두려움, 말 하나 나 하나의 두려움, 말을 사랑하는 두려움, 말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 말의 사랑을 모르는 자의 무신적(無神的) 폭력, 가엾음, 분노, 가엾음의 분노, 분노의 가엾음.......말이 머리 둘 곳 없음에 시대가 머리 둘 곳이 없다.” (정현종, 『정현종 시 전집 1』, 문학과 지성사, 84쪽) 맨 처음 이 시를 만났을 때의 충격은 너무 컸습니다. 특히 이 부분의 시어가 목사인 나를 타격했습니다. “말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 말의 사랑을 모르는 자의 무신적(無神的) 폭력, 가엾음, 분노, 가엾음의 분노, 분노의 가엾음.......말이 머리 둘 곳 없음에 시대가 머리 둘 곳이 없다.” 혹시 설교하면서 사는 내가 말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이건 정말 재앙이자 저주받은 인생인 게 분명해서 두려움으로 시인의 시어가 다가왔습니다. 어제 김기석 목사가 행한 『설교를 잘하는 법』이라는 제하의 강연을 ‘잘잘법’을 통해 시청했습니다. 김 목사께서 강연에서 이런 소회를 밝혔는데 절절하게 다가왔습니다. “설교하는 자들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것은 설교를 듣는 자들이 설교를 듣고 난 뒤에 그 말씀에 의해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일이 일어날 때입니다. 오랫동안 내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 중에서 주님과 만나는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성도들을 볼 때, 내 말에 파워가 없구나! 하는 자괴감으로 인해 절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삶이 변하지 않은 이들이 지천에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때마다 곱씹는 것은 내 말의 언어가 혹시 말속에 피가 흐르지 않는 무능한 말은 아닌지 수없이 되뇌고 또 되뇔 때가 너무 많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찰을 거듭하는 자는 반복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마치 잠언 기자의 권면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잠언 16:32절은 말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점입니다. 20절은 말합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사사기 20장을 보면 사사 초기 시대에 일어났던 가나안 입성 초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겪어야 했던 참담한 사건을 보고하는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사기 20장은 기브아에서 하루를 묵었던 레위 사람이 기브아의 깡패들에 의해 자기 아내가 윤간을 당한 끝에 사망하는 비극을 여지없이 공개합니다. 이런 치욕을 경험한 레위 사람이 자기의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것은 죽은 자기 아내의 시신을 12토막 내서 그 시신을 이스라엘의 12 지파 공동체로 보내는 엽기적인 범죄를 자행한 일입니다. 졸지에 동강 난 한 토막씩의 시신을 받은 이스라엘 12지파 두령들은 경악하며 미스바로 모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 시신에 얽힌 충격적인 연유를 보낸 이에게 듣게 됩니다. 사사기 20:4〜7절을 읽어 봅니다.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하니라” 오늘의 언어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첩과 하룻밤을 묵으러 기브아에 갔다. 기브아 성읍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내가 묵던 집으로 와서 포위했다. 그들이 윤간하여 내 아내가 죽었다.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알리고자 아내의 시체를 토막 내서 이스라엘로 보낸 것이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첩이 윤간당한 이 레위 사람은 자기 한 몸을 보신하기 위해 기브아 깡패들에게 첩을 내민 최악의 사람이었으니까 말입니다. 레위 사람이 밝힌 정직하지 않은 이 보고에 이스라엘 사람들 즉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총회는 그의 말만 액면 그대로 듣고 흥분하고 분노합니다. 쌍방의 상황을 경청하지 않은 일방적인 보고만을 들은 것입니다. 다 듣고 나서 이윽고 그들이 결의한 내용이 사사기 20:8〜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를 치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즉 베냐민과 전투를 치르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적어도 단기간에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을 위해서 각 지파에서 군인들을 위한 10%의 군수 물자를 내기로 합니다. 더불어 각 지파에서 총동원으로 모집 완료된 지파 공동체 군사의 수가 400,000명이라고 보고합니다. 이들이 맞서 싸울 베냐민 지파의 병력 숫자는 26,700명이었습니다. 이 싸움은 물리적으로 이미 승패가 결정이 난 싸움이었습니다. 결국 400,000:26,700의 내전이 벌어집니다. 사사기 20장은 사사기 후반부에 편집되어 열거되어 있지만, 기실 20장의 배경은 사사 초기 시대였습니다. 사사 초기 시대라는 말은 그토록 염원했던 약속된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힘을 합하여 가나안 거민을 내쫓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속한 이스라엘의 신앙공동체를 완수해야 하는 막중한 시기였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사태는 아주 이상한 쪽으로 발전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거민을 쳐야 하는 본(本)은 사라지고 엉뚱하게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신앙공동체 중에 한 지파를 궤멸시키는 말(末)이 무대 위에 올라선 본말전도의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사기 역사서 저자는 계속해서 보고합니다. 이 불행한 사건을 통해 베냐민 지파가 궤멸(潰滅)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자존심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가 몰락했다고 보고합니다. 어떻게 이 기막힌 일이 벌어졌을까요? 저는 제 다섯 번째 졸저인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제시했던 적이 있습니다. “악수(惡手)에게 악수(握手)했기 때문이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 동연, 231쪽) 이스라엘 총회는 영적 분별력을 갖고 레위인의 보고를 분별력을 갖고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확하지 않은 레위인의 거짓말만 듣고 분노했습니다. 거짓의 말이 분노를 촉발한 것입니다. 레위 사람의 정직하지 않은 거짓의 말이 하나님의 의에 무시하게 한 것입니다. 결국 이런 어처구니없는 거짓의 말과 성냄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40년 만에 기적적으로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비화되어 베냐민 지파가 멸절당하는 위기를 초래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저는 우리 교우들은 본문으로 다시 초대합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말을 먼저 하고 듣기를 경히 여김으로 분노하기를 즐기는 자들이 범할 수 있는 죄악은 사사기 예를 통해 살핀 것처럼 더러운 것 즉 악과의 교제입니다. 이것들과 단절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오늘 설교 본문 단락을 마무리하는 21절에서 분명하고 명징하게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능히 구원할 수 있는 무기인 말씀을 온유하게 받는 것이라고 적시합니다. 그렇습니다. 성 내기를 더디 하고 말하는 것을 절제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 Living Bible에서 ‘온유함으로’라는 단어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And humbly be glad for the wonderful message we have received.” (그리고 우리가 받은 놀라운 메시지에 대해 겸손하게 기뻐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말씀을 온유하게 받는다는 말은 내게 주어진 말씀을 겸손하게 받고 기뻐하는 일이라고 아주 의미 있게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상상의 나라를 펴 보십시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묵상하든지, 공중 예배를 통해 설교 말씀을 받든지, 아니면 매스 미디어를 통해 각종 영의 양식을 공급받든지 어떤 것이 되든지 상관없이 내게 주어진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내게 주어졌을 때, 그 말씀이 내 영혼에 스며들어 내 영혼을 적신다면 우리는 예외 없이 두 가지 반응에 놓이게 됩니다. ① 겸손해집니다. 저는 이 경험을 이야기하곤 할 때 언제나 故 옥한흠 목사의 유고집에 나오는 옥 목사께서 사랑의 교회 부교역자들에게 남긴 절절한 문장을 되뇝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울진 못할지언정, 가슴을 치진 못할지언정 말씀을 갖고 장난쳐서야 되겠습니까? 말씀 묵상하며 엉엉 우는 평신도만큼은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말씀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옥한흠, 『문득, 당신이 그리워질 때』, 필로, 205쪽) ② 내게 임한 말씀 때문에 내 심령이 기뻐합니다. 영어 성경은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라는 온유함을 ‘기뻐하다(GLAD)’라는 단어로 분명히 재해석했습니다. 내가 성냄을 더디 하는 이유는 말씀으로 인한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듣기를 더 사모하는 이유는 내게 임하는 말씀의 오묘함이 너무 크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이 놀라운 말씀 받기에 내 생명을 다합니다. 찬송가 438장은 대단히 미안하지만, 누구나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아닙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중한 죄 짐 벗고 보니/슬픔 많은 이 세상도/천국으로 화하도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멀리 뵈던 하늘나라/내 맘속에 이뤄지니/날로 날로 가깝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초막이나 궁궐이나/내 주 예수 모신 곳이/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내 모든 죄 사함 받고/주 예수와 동행하니/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찬양입니다. 결론) 지난 주간, 모 교우가 주중 예배에 둔감했습니다. 영적 긴장감이 조금 해이해진 느낌이 들어 권면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지고 있다가 어제 권사회 위로회에 나온 그 교우에게 한 마디 일침을 놓았습니다. “아무개 성도님, 주중에 얼굴 보기가 어려워요. 주중 예배에 집중하세요.” 그러자 그 성도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지난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를 유트브로 듣다가 찔려서 죽을 뻔했습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나를 반추해 보았습니다. 혹시 우리 교회에 이강덕 목사의 설교를 듣고 지성적으로 만족하며 즐기는 자들이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설교하는 사람이지. 만에 하나, 세인 지체들이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고 삶에 적용하는 치열함에서 둔해진다면 나는 도대체 허공을 치는 설교 꾼에 지나지 않는 무익한 종은 아닌가! 등등을 반성했습니다. 설교는 찔리라고 하는 목적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설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고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천세인교회 지체 중에, 말씀으로 인해 엉엉 울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교우들 때문에 담임목사도 함께 울고, 이강덕 목사를 몸부림치게 만들고 움직일 수 있는 사명자들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깨달음의 자리에서 사는 자리로 이동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곳에서 배출되기를 기대합니다. 주님은 이것 때문에 오늘 설교를 통해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