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사랑이 없으면2024-02-26 15:43
작성자 Level 10

1월 1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58번째 강해)

 

제목사랑이 없으면

본문고린도전서 12:31-13:3

 

서론)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아베 피에르 신부는 엠마우스 공동체 운동을 벌여 빈민들을 위한 벗으로 평생 살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본인의 걸작인 단순한 기쁨에서 대단히 의미 있고 중요한 어록을 남겼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그분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며그것이 그분의 본질을 이룬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과 우리가 또는 비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간에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확신한다.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며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길 거부하는 사람 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pp,92-93)

정말로 엄청난 통찰입니다.

이런 사고와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었기에 피에르 신부는 자신의 집에서부터 시작한 엠마우스 운동을 통해 수많은 도시 빈민들의 잠자리와 먹거리를 제공하면서 그의 운동은 시너지를 가져와 오늘날에는 세계 44개국에서 350여 단체를 가진 세계적인 빈민 구호 공동체로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이타적 사역을 감당하는 운동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술했지만 아베 피에르 신부는 인간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는 점은 놀랍습니다.

신자와 비신자라는 구분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로 구분했다는 점은 너무나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제시한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피에르가 말한 사랑하는 것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았기에 저는 아베 피에르의 갈파와 바울의 일침을 통해 전해지는 은혜를 교우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본론)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한 사랑장의 시작을 이렇게 알립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조금 있다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겠지만 바울은 사랑하기를 고린도교회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세 가지의 중요성을 타진합니다.

그 전에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 볼 구절은 12:31절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우리는 이미 고린도전서 12장을 통해 14가지의 은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은사들을 교회 공동체에게 선물로 주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었음을 주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는 아주 이상하고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은사 앓이를 했는데 바로 방언하기와 예언하기였음을 공부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왜곡된 고린도교회의 은사주의에 대하여 바른 성경적 내용을 제시한 뒤에 정말로 중요하고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할 것을 종용하며 쐐기를 박습니다.

또한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들이 가야할 가장 좋은 길임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제일 좋은 은사가장 큰 은사는 다름 아닌 사랑하기라는 은사였습니다.

이 사랑하기라는 은사를 그래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비교하며 오늘 본문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정의한 사랑하기의 정체는 무엇이었습니까?

 

1) 사랑하기는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을 합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바울은 두 가지의 내용을 사랑하기와 비교합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입니다.

방언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방언과 비슷한 유비로 사용한 단어가 천사의 말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방언의 진정한 효력입니다.

방언의 영적 긍정성은 방언하기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 천사가 말을 하며 서로 교통하는 신비로운 은혜를 함께 나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지 머리에 그려집니다.

오늘 우리가 교제 찬양으로 부른 해같이 빛나리의 가사처럼 방언의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를 나눈 공동체의 그림은 이러지 않겠습니다.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천사도 흠모 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이 방언의 유익이 온전하게 교회 공동체에 전염될 때 가져오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러려면 반드시 전제 조건에 부합해야 합니다.

사랑하기가 전제된 방언하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본문 1절에서 만에 하나 사랑하기가 전제되지 않은 방언하기는 다음의 결론을 도출하기 때문이라고 선을 그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결론입니까?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1절 하반절은 성경적인 주석이 필요합니다.

구리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칼코스는 문자적으로 더 가까운 단어가 입니다.

또 다른 단어 꽹과리는 헬라어 단어 큄발론의 번역인데 이 악기는 한 가지 음만 내는 악기였습니다.

이 두 악기는 모두다 고린도라는 도시에 성행했던 신비종교와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악기들이었습니다.

데이빗 프라이어의 고린도주석을 보면 그는 이렇게 이 두 악기에 관한 신비종교에 대해 주해했습니다.

고린도는 자연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ysus)와 야생 동물의 여신인 퀴벨레(Cybele)를 섬겼다.(중략분명 고린도의 거리에는 그런 예배자들의 특징인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칼코스()’는 구리조각이었고 큄발론(꽹과리)’은 가락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한 가지 음만을 내는 악기였다신비 종교에는 이 두 가지가 필요했다신을 불러내기 위해서마귀들을 내쫓기 위해서아니면 숭배자들을 선동하기 위해서였다그것들은 선율이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화음을 내지도 못했다둘 다 강한 단조음을 울렸으며계속 짖어대는 개처럼 대단히 거슬렸다.”(pp,306-307)

우리는 바로 이 점에서 왜 바울이 칼코스()와 큄발론(꽹과리)이라는 단어를 동원하게 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방언이라는 은사를 사랑하기에 연관하여 쓰지 않으면 곧 그 은사는 독선이 되고전혀 교회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무익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게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방언의 은사가 교회의 유익한 은사로 사용되기 위해서많은 성도들에게 선한 도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분명히 전제해야 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으로의 방언하기라는 단서임을 바울은 강하게 역설합니다.

그래야 방언은 종국의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기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방언도 이런 강력한 은사로 탈바꿈 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은 단 한 가지의 단조로운 소리를 내는 칼코스와 큄발론과 같은 악기와는 달리 여러 소리를 내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는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는 합심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기는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9절을 읽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여기에 기록된 합심하여라는 헬라어 동사가 쉼포네쏘신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조화를 이루다’, ‘같은 마음으로 동의하다.’의 뜻입니다.

이 헬라어 단어에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관현악단들이 연주하는 교향곡을 의미하는 심포니(Symphony)라는 단어가 유래되었습니다.

사랑한다는 사람의 증거는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을 합하는 것입니다.

육비에 새기시기를바랍니다.

 

2) 사랑하기란 종교적인 능력이 아니라 신앙인의 당연한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바울은 2절에서 이번에는 예언의 은사와 관련하여 사랑하기라는 제일 좋은 은사를 대입시킵니다.

예언하는 능력을 받은 자가 발휘하는 영적 시너지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비밀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지식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 엄청난 예언하는 능력의 은사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사랑하기라는 은사와 유리되었다면 이 예언하는 능력의 은사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헛것이라는 점을 바울은 여지 없이 표현합니다.

바울의 역설을 지지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한 가지의 해석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예언하는 능력으로 임하는 또 다른 곁가지로 바울은 다른 은사와 당시 이단적인 상징이었던 지식(그노시스)까지 확산시켰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고린도전서 12:8-10절에서 예언의 은사와 더불어 나누었던 은사가 믿음이라는 은사도 있었음을 나누었습니다.

믿음에 관한 은사를 살펴보십시다.

지난 신념 감사주일에 설교를 통하여 주님께서 변화산상에서 거하시다가 산 밑으로 내려오자마자 경험하게 된 일이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들을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과 실랑이하며 항의하는 아버지의 기사였음을 살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주님께 제자들이 질문했습니다.

왜 우리는 이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까?

신년감사주일에 살핀 마가복음 9장의 기사로 국한하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님의 역설로 그 질문의 답을 말할 수 있겠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을 붙인 마태복음의 기사로 평가하면 또 하나 대단히 중요한 주님의 가르침을 만나게 되는데 소개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7:20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믿음의 부족이라는 진단이었습니다.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믿음이라는 은사를 사랑하기라는 은사를 통해 다시 조명합니다.

재론하지만 믿음은 대단히 중요한 성도가 가져야 할 요소이자 무기입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라도 엄청난 기적과 표적을 나타낸다는 주님의 일성만으로도 믿음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마 무시한 믿음의 은사를 갖고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사랑하기라는 최고의 은사와 유리되어 있다면 그 믿음의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바울의 비장함을 봅니다.

두 번째로 살펴야 하는 것은 지식입니다.

주후 1세기 고린도 시는 여타 다른 도시처럼 영지주의자들의 여파와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식은 고린도 교회의 밑힘이었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치하려는 무서운 이단적 요소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지식(그노시스)추종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는 자들에게 바울은 역시 쐐기를 박습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지식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사랑하기가 결여되었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예언하는 능력지식이라는 세 가지의 테마를 통해 배우는 도전이 있습니다.

사랑하기는 결코 종교적인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너무나도 당연한 신앙의 결과물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지 않으면 종교인성직자교회 안의 직분자의 삶은 거짓이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직격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기란 종교라는 것을 빌미로 그냥 해보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히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면 체화되어 저절로 나와야 하는 삶의 결정체입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 사도가 말한 것은 정답이자 해답입니다.

요한일서 4:7-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이렇게 기술했는데 제 심장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기생물들을 창조하셔서는기생물인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이용해 먹을 수 있게’ 하시는 숙주이십니다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이든 모든 사람의 발명자이시자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p,216)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이런 분이신데 사랑하기가 종교적인 능력이고 산물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떻게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사랑하기란 숙주 되어 주신 하나님을 믿는 자이기에 당연히 주님이 하신 대로 우리도 삶으로 나타내고 살아내야 하는 결과물인 것입니다.

방점을 찍으십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3) 사랑하기는 내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본문 3절을 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두 개의 문구가 3절에 담겨 있습니다.

인색하지 않은 구제입니다.

몸을 불사를 정도의 열정적인 헌신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다고 바울은 단정합니다.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하다가 아주 흔쾌한 해석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2%의 여운이 남아 있어 찝찝했습니다.

적당히 구제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으로 구제했다면 사랑이지 않을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면 그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이타적 사랑의 절정이 아닌가!

그런데 뭐가 문제지에 대한 선명한 답을 구할 수가 없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대 헬라어 번역본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후 헬라어 사본에 누락되어 있는 구절을 그대로 번역한 표준 새 번역 성경 해석을 접하면서 그 고민이 풀렸습니다.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 고린도전서 13:3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a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사랑이 없으면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a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내가 내 몸을 불사르기 위하여')”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직시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준 구제내 몸을 불사를 정도의 열정을 가진 자기희생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본문 3절에 기록된 전적인 구제전적인 자기희생의 목적이 주님이 행하신 것에 대한 주님 따르기가 아닌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행위였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거룩한 것처럼 보이는 전적인 구제와 자기희생의 구현이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포석이요 행위라면 그것은 주님이 행하신 사랑하기가 배제된 껍데기에 불과한 종교적인 요식행위이며 포장되어 있는 종교적 쇼맨십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과는 상관없는 종교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먼저 행하신 사랑을 사랑하기는 내가 주님께 속해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2000년 대 초반 쿠바 공산 혁명을 주도하여 오늘의 쿠바를 있게 한 쿠바인들의 영원한 우상인 체 게바라 평전을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근래어느 곳에 글을 하나 송고하기 위해 그 책을 거의 15년 만에 펼쳤더니 당시 밑줄을 긋고 퀘스천 마크를 해둔 서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예수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중략저는 힘이 닿는 한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겁니다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 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P,36)

체 게바라 평전이라는 책은 쿠바인들에게는 바이블과 같은 자존심의 책이고 쿠바인들에게 예수와 같은 존재로 추앙받으며 그들의 정신 속에 남아있는 체 게바라의 지난한 투쟁을 읽다가 당시 미국이 시도했던 남미 종속전쟁에 대해 반기를 들고 분연히 일어나 혁명의 전사로 싸웠던 그를 어느 정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이강덕 목사가 그에 대하여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조금 전에 읽어드린 문구 에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사랑하기란 명분 쌓기가 아닙니다.

사랑하기란 예수와 다른 길이 아닌 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란 주님이 나에게 십자가를 지고 그곳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할 때 나도 십자기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란 체 게바라의 어머니가 그토록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 주군 따르기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이며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며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을 합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른 자로서 마땅히 행하는 신앙의 결과물로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자들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함으로 내가 주님께 속해 있는 자임을 세상에 증언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 났도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우리를 살리게 하시려 화목제로 보내셨도다

화목제로 보내셨도다

사랑하는 자들아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서로 사랑하면 서로 사랑하면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