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57번째 강해) 제목: 하나님의 식에 주목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12:28-30 서론) 우리는 2017년을 시작하면서 교회 표어를 ‘하나님의 식을 살아내는 교회’ 라고 정한 뒤 지난 1년을 달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식은 언제나 불편했지만 당연히 그 식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달려야 할 길인 줄로 알고 달려 왔습니다. 하나님의 식은 언제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이 식은 마땅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달려가야 할 길인 줄로 알고 달려 왔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식이 2017년에만 해당되는 슬로건이나 성도의 좌우명이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모토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식은 결국에는 성도가 살아내야 할 현재적 징표이자 목표이어야 합니다. 오늘 2017년 마지막 주일인 송구영신 주일을 보내면서 고린도전서 57번째 강해를 설교해야 하는 본문과 씨름하다가 공교롭게 오늘 본문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의 식에 주목하라’ 는 제목 설정으로 자꾸만 마음이 간 이유는 본문에서 바울이 제시한 텍스트에 함축되어 있는 메시지가 이 제목에 어울린 것도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한 해의 시작과 마무리의 연결고리로 이 제목이 주는 의미가 대단히 의미 있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식을 살아내기 위해 수고하신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 2017년 53번 째 주일을 맞이하여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 하나님의 식에 주목하는 도전으로 받는 오늘 송구영신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8-10절에서 바울이 제시한 9가지 은사의 종류에 더불어 또 다른 은사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8가지의 은사들은 앞서 제시한 은사들과 중복되는 은사인 능력 행함, 병 고치는 은사, 방언 말함 등의 은사가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5가지의 은사가 소개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28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본문에는 8가지의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 아미 우리들이 살핀 능력 행함, 병 고치는 은사, 방언 말함 외에 다른 은사를 열거하자면 이렇습니다. ① 사도 ② 선지자 ③ 교사 ④ 서로 돕는 것 ⑤ 다스리는 것 등입니다. 오늘 담임목사가 주목하려고 하는 본문 해석은 바울이 나열한 은사들의 서열입니다. 1-3순위에 링크되어 있는 사도, 선지자, 교사에 대한 이해를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자신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아주 의미 있는 설명을 내놓았습니다. “처음 나오는 세 가지 항목의 순서는(사도, 선지자, 교사) 권위의 위계질서를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이 은사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우는 데 있어서 했던 역할의 순서에 대하여 알려준다고 보는 것이 옳다.”(P,360) 그의 해석을 조금 이해하기 쉽게 부연하자면 이런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를 세운 뒤에 교회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우기 위해서 세워진 직분 중에 가장 먼저 나온 직분이 사도였다는 것입니다. 이어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을 교육하는 일을 계속하게 하기 위해서 선지자가 세워졌고, 그 다음에 교사들이 세워졌다는 설명입니다. 리처드 헤이스의 이런 해석은 이 구절에서도 은사에 대한 우열을 바울이 말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은사는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바울의 신학을 못 박으려는 헤이스 교수의 노력을 보입니다. 원칙적으로 헤이스의 이런 각고의 노력에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는 또 다른 바울의 의도를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1-3위에 링크되어 있는 은사들의 공통분모가 가르치는 은사라는 점입니다.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 데 방언의 은사를 맨 마지막 순위에 올렸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쓴 이 엄연한 사실은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은사의 심각한 오류를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시사해 줍니다. 14장 강해를 통해 재 강조하겠지만 방언을 최고의 은사로 고집하고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은사에 대하여 아주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인식 중에 하나가 방언에 대한 우월의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의도적으로 방언 말함을 오늘 본문에서 맨 마지막인 8번째에 소개한 것이고, 8-10절에서도 8번째로 소개한 것입니다. 헌데 더 중요한 바울의 시도가 보입니다. 이렇게 방언이 최고의 은사라고 고집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그릇된 영적 기상도를 바로 잡기 위해 선결되어야 할 전제가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본문의 은사 배열이라는 기법으로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어떤 방법이었습니까? 교회가 은사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는 가르치는 자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르치는 자들 세 부류를 앞 그룹에 위치해 놓고 열거한 것입니다. ① 사도들이었습니다. 데이빗 프라이어 목사는 아주 간결하지만 분명하게 사도를 정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세우고 교회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베풀도록 하기 위해 사도(문자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들을 세우셨다.” (고린도주석, p,293) 저는 데이빗 플라이어 목사의 이 해석에 대해 다른 어떤 것보다 가슴 저림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사를 훑어보면 주후 381년에 선언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교회론에 대한 신학이 완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보면 이 때 교회에 대하여 신학적 성격을 규정한 내용은 4가지였습니다.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우리는 믿노라” 이 신조에서 고백된 4번째의 교회의 성격은 사도적인 교회입니다. 사도적인 교회라는 말은 풀어 말한다면 에베소서 2:20절에 기록된 말씀을 기초로 한 교회론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렇다면 사도적인 교회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교회는 사도들이 전하여 준 말씀 위에 서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지난 성탄절 설교를 통해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목사는 주후 1세기에 예수께서 직접 임명하신 사도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이것까지 양보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목사들이 가져야 할 사도적인 정신 말입니다. 주후 1세기에 임명되었던 사도들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맛디아가 포함된 12명의 사도들이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었던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가 추가되었고, 더불어 이방 교회의 모 교회였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배출한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4:4, 14절에 이 두 사람을 사도로 호칭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시선을 집중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이 사도들이 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8:5절 후반절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예루살렘 교회의 12명의 제자가 전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5:29-32절을 읽겠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적어도 오늘날 지역교회에서 예수가 구주이심을 증거 하는 일이 목사들이 갖고 있는 정신이라면 그리고 이 정신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런 목사들은 사도는 아닐지라도 교회가 사도적인 정신으로 세워진 것임을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는 목회의 전문가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불어 이런 정신과 신학적 바탕을 갖고 나아가는 목회자가 있는 교회의 건강성을 폄훼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교회와 목사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식을 주목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드림교회를 시무하던 고 박재용 목사가 화마에 의해 생명을 잃었습니다. 후배가 유명을 달리한 뒤에 국민일보 신문에서 후배가 어떻게 사역을 해 왔는지를 조명하는 기사가 실려 많은 이들에게 아픈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유명을 달리하기 전 약 한 달 동안 이번에 화재가 일어난 사우나에서 저녁 10시부터 오전 3시까지 수건을 접는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박 목사가 이 일을 한 이유는 2018년 초에 실시할 교회학교 학생들의 비전 트립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단기비전 사역을 통해 아직은 복음에 대하여 불모지인 동남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기 위한 사역 때문에 잠을 줄이고 시간을 들여가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 자를 하나님이 부르셨습니까? 는 본질 오도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박 목사가 목숨 걸었던 본질입니다. 사도들이 전했던 십자가의 도라는 사도적인 전승입니다. 사도들의 전승은 다름 아닌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 말씀의 능력을 갖고 있는 자를 바울이 본문에 제일 첫 자리에 위치해 놓은 것은 대단히 중요한 바울의 신학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것임을 인지해야 합니다. ② 선지자들입니다. 헬라어 ‘프로페테스’의 번역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아주 신학적으로 의미 있게 번역할 성경이 킹 제임스 흠정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는데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대언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기적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선물들과 돕는 것들과 다스리는 것들과 여러 가지 타 언어들이니라”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두 번째로 언급한 ‘선지자’의 의미는 이미 우리들이 살펴본 代言者(대언자)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의 그룹에 속해 있는 이들 역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탁받은 복음을 대신 전하는 가르치는 자임은 당연합니다. ③ 교사입니다. 세 번째로 열거된 교사의 중요성은 야고보서의 한 구절만 보더라도 당시 얼마나 이들이 중요한 역할의 주인공들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3:1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오늘 본문에 기록된 ‘선생’(디다스칼루스)과 야고보가 말한 ‘선생’(디다스칼로이)은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의 구절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대로 해석해 보면 교사가 얼마나 위대하고 존경받는 직책이었는지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아볼로의 역할이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전서 3:6절에 의하면 그는 물을 주는 사람의 역할이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물론 아볼로는 교사였습니다. 교사는 물을 주어 자라게 하는 역할자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양육시키는 자입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된 공동체 구성원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 장성한 자가 먹는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도록 가이드 해주는 사람이 바로 교사인 것입니다. 교사 역시 성도들을 자라게 하는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열거한 세 부류들의 공통분모가 보이십니까? 가르치는 부류입니다. 이에 반하여 지금 소개한 이 세 그룹 뒤에 바울은 연이어 12:8-10절과 비슷한 방식으로 능력 행함, 병 고침,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은사를 중간에 위치해 놓았습니다. 중간다리의 역할을 하는 섬김과 리더십의 은사들입니다. 이제 민감하게 주목할 내용이 마지막에 위치시킨 방언입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방언을 홀대했을까요? 바울이 방언 기피자이거나 방언 때문에 무슨 피해를 입은 자이기 때문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는 이것입니다. ★ 언제나 하나님의 식은 말씀과 관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고린도교회 지체들은 방언에 대한 우월의식이 있었습니다. 방언에 대한 우월의식은 방언이 아마도 카리스마적인 모습을 보이는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언은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외적 현상이기에 일반적으로 숨겨져 있어 내면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은사(서로 돕는 일, 다스리는 일 등등)들에 비해 탁월한 은사라고 착각한 그 이유 때문에 고린도교회 지체들이 거기에 흠뻑 빠져 있어 다른 은사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은사 의식은 철저히 잘못된 인위적인 은사의식임을 고발합니다. 도리어 사도들의 가르침, 선지자들의 대언하는 권면, 그리고 교사들의 양육에 근거하지 않는 방언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며 심지어 그렇게 잘못된 은사 의식을 갖고 있는 자들의 은사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무용론까지 경고하고 있는 것이 본문의 해제입니다. 이것을 다시 역으로 살피는 은혜를 받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식은 교회의 일체 사역이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가 신비주의에 빠집니까? 왜 교회가 주지주의에 빠집니까? 왜 교회가 감성주의에 빠집니까? 왜 교회가 기복주의에 빠집니까? 왜 교회가 번영주의에 빠집니까? 사도적인 전승에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탁에 대한 대언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사들의 영적 양육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금요일 새벽 예배 강독 시간에 성경을 읽다가 안타깝게 받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의 가르침에 대해 경박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6:6-8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이 다 계획하신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전하라고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모세는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신 대로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서 받은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6:9절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너무 기막힌 반응이 아닙니까? 유감스럽게도 이미 애굽이라는 세상의 논리에 점령되어 있었던 저들은 다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계획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듣기 싫어했다는 점은 충격입니다. 왜 새벽에 읽은 이 말씀이 크게 다가왔는지 아십니까?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했던 그 경향이 오늘 우리에게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식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말씀듣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식은 언제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식은 언제나 말씀을 기초로 시작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20세기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아이든 토저는 ‘십자가에 못 박히라’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 지금처럼 재미에 몰두한 적이 없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재미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향해 전진하려면 재미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p,195) 하나님의 식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식은 재미가 아니라 언제나 정답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식은 언제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재미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나는 2017년도 그랬지만 2018년도 하나님의 식에 주목하는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소망하며 기대합니다. 찬양을 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 내 모든 것 나의 생명까지 다 주님 앞에 드립니다 주 임재 안에서 이제 내 영혼 자유 해 내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며 예배하리 어린양 찬양하리 내 평생 그 하나로 충분해요 어린양 찬양하리 내가 주의 임재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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