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5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열여덟 번째 강해) 제목: 누가 세상을 이깁니까? 본문: 요한일서 5:1-5 서론) 미국 듀크 신학대학교 교수 무디 스미스가 갈파한 문장 하나 읽으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세상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으며, 세상이 강요하는 기준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무디 스미스, 『현대성서주석-요한 일이삼서』, 한국장로교출판사, 169쪽) 스미스의 말을 이해하고 동의는 하지만, 2024년이라는 작금에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에 그 고민이 있습니다. 요즈음 너무 많이 사용되는 ‘알고리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네이버에 실린 ‘알고리즘’의 사전적인 의미가 이렇습니다.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입력된 자료를 토대로 하여 원하는 출력을 유도하여 내는 규칙의 집합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외없이 모두가 일주일을 살았습니다.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일주일을 사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어디에서 얻었는지 아십니까? 내가 직접 현장에 나가서 뛰고 걸으면서 취득한 정보가 아니라 컴퓨터 안의 세계와 SNS 세계에서 만난 정보에서 얻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서로 ‘알고리즘’으로 연계되어 우리가 찾는 정보의 단어나 사물을 입력하면 컴퓨터는 물론, 이제는 손안에 있는 좌의정 네이버와 우의정 구글과 영의정 유트브가 초마다 내게 그 정보를 눈앞에 대령해 놓는 기적을 창출해 줍니다. 얼마나 좋고 편리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이런 기적이 내게 날마다 일어나고 동시에 너무 손쉽게 다가오며 나를 유혹하는 시대가 바로 오늘입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이렇게 지난 한 주간의 삶을 설명해도 절대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컴퓨토피아 세상에서 그것에게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노예로 살았다.” 그러니 설교 서두에 소개한 무디 스미스 교수의 말이 얼마나 현실감각에서 동떨어진 꼰대적인 지적인지 알게 됩니다. 재독학자인 한병철 교수가 그의 걸작 『사물의 소멸』을 2022년에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가 책에서 예측하고 진단한 미래 사회의 근간과 골격은 싸늘한 비수처럼 내게 들렸습니다. “디지털 소통은 인간관계를 심각하게 저해한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나 연결망에 속해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 결합 되어 있지 않다. 디지털 소통은 외연적이다. 그 소통은 집약성을 결여하고 있다. 연결망에 접속하기는 관계 맺기와 다르다. ‘너’는 오늘날 어디에서나 ‘그것’으로 대체된다. 디지털 소통은 인간적인 상대, 얼굴, 바라봄, ‘지금 여기에 몸소 있음’을 없앤다. 그렇게 디지털 소통은 타자의 사라짐을 가속한다. 유령들은 같음의 지옥에서 거주한다.” (한병철, 『사물의 소멸』, 김영사, 84쪽) 이 난해한 문장을 알아듣기 쉽게 푼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컴퓨토피아라는 세속의 영역에 완전히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강조하지만, 무디 스미스 박사의 갈파가 얼마나 고루하고 지루한 꼰대의 소리인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세상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으며, 세상이 강요하는 기준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2024년의 언어로 말한다면 이 기준과 명제는 고루하기 짝이 없는 시대적 패션에 결코 어울리지않은 권고인데, 나는 이상하게도 무디 스미스 교수의 말에 전적인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게 속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의 강변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억하심정입니까? 아니면 억지춘향식으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산이기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적어도 그 정도의 자존심은 아직은 남아 있습니다. 억하심정도 아니고, 억지춘향도 아니면 저는 무엇 때문에 이런 배짱을 튕기고 있는 것일까요? 답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믿기 때문입니다. 본론) 저는 4절 본문 말씀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에 열광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서신 저자는 강력하게 선포하며 물러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들이 왜 이깁니까? 믿음 때문임을 분명히 요한서신 저자는 선포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렇다면 믿음을 갖게 된 자들인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누구일까요? 대단히 명징하게 그 답을 본문 1절이 제시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본문 저자는 분명히 답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이며 그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명시합니다. 누가 세상을 이깁니까?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이깁니다. 제가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는 그분을 우리에게 보낸 분을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변하지 않는 공식입니다. 이 공식을 갖고 있는 이들을 지칭하여 기독교에서는 믿음이 있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니 세상을 이기는 것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 이긴다는 정의가 적확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메시지 중에서 언제나 담임목사를 전율하게 하는 중요한 텍스트를 교우들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를 선택해서 이방의 사도로 세우겠다고 천명하신 그대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1〜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성공리에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바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순교 여행뿐이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것입니다. 그가 로마로 가서 로마의 황제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는 것이 바울이 행하여야 할 마지막 미션이었습니다. 그러려면 중간 경유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고 고소를 당해야 했고, 고소를 당해야만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바울은 아주 자연스럽게 로마로 압송되어 로마 황제 앞에 서게 될 것이기에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도 인간인지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그는 이제 선교지의 동역자들과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 배를 타야 하는 장소인 밀레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기별을 해서 만나게 됩니다. 밀레도 항구에서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바울과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뜨거운 포옹을 하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합니다. 이 자리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행을 재고할 것을 요청했음이 사도행전 20장의 정황 속에서 발견됩니다. 충분히 공감되는 일입니다. 바울을 아끼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예루살렘행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알듯이 바울은 이런 제안을 거부합니다. 거부의 뜻을 밝히는 자리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전했던 소위 ‘고별설교’라고 이름지은 사도행전 20:18-35절 설교는 시대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들어야 하며 새겨야 할 명설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에베소 교회 목회 사역을 회상하며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사도행전 20:18〜21절을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그랬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목회했던 방법은 겸손, 눈물, 시험을 참고 이긴 인내를 담보한 목회였습니다. 하지만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목회의 내용이었습니다. 바울이 감당했던 목회의 내용이 때론 저를 울컥하게 하며 전율하게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 사역을 감당하던 목회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거리낌 없이 전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①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증언했다고 했습니다. ② 헬라인들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한 믿음을 증언했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깊이 생각을 하면 말 그대로 목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지를 지금부터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에베소에서 3년을 체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다지고 다시 그리스 지역으로 사역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 지역을 복음으로 강하게 한 뒤에 이제 바울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작정한 뒤에 밀레도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행한 고별설교를 통해 바울은 3년간 체류하면서 에베소 교회를 세우고 섬겼던 추억을 반추합니다. 그것이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바울이 반추했던 에베소 사역의 알갱이는 전제하는 것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목을 걸어야 했던 메시지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였습니다. 더불어 배교자였습니다. 적어도 에베소에 거주하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본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잘 섬기고 있는 존재인지에 대하여 교만할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자들인데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하여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바울을 더욱 공격하게 만드는 메시지임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목을 걸어야 하는 다시 말해 증인으로 증언해야 하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음에 틀림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헬라인들에게는 주 예수가 그리스도인을 믿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이 또한 목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에베소 지역에서 주(큐리오스)는 딱 한 대상에게만 붙일 수 있는 단어였습니다. 그 대상은 로마의 황제 시저입니다. 로마의 황제 외 누구든지 주(큐리오스)를 붙이면 그 붙임을 하는 사람도, 그 붙임의 대상자도 반역의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살벌한 정치적 상황에서 바울은 혁명적인 발언을 선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목을 걸어야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도행전 20:20절에 기록된 단어 하나가 나를 목매게 합니다. “거리낌 없는” 현대 목회에 임하는 목사들에게 가장 힘든 일은 해야 할 메시지, 전해야 할 레마를 전하지 못하고 선포하지 못한다는 비극입니다. 사도행전 20:20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여기에 기록된 ‘꺼리다’라는 단어입니다. ‘꺼리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휘페스테이라멘’의 어원적인 의미는 ‘물러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오늘 교회의 비극은 전해야 할 복음의 본질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2024년, 한국 교회의 재앙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사회 현상적 상황에 따라 변형시켰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오늘, 성도들에게 임한 최고의 절망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 불편해하며 부담스러워한다는 점입니다.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엘륄이 일찍이 이렇게 프랑스 개신교회의 변질을 경고하며 통곡했습니다.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자크 엘륄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 된 기독교가 반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불신앙 때문에 현대 크리스천들은 이 사실을 쉽게 용납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기독교를 만들어서 인간이 쉽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용납할 수 있게 치장하였다. 교회는 스스로 자축하고 자랑하고 있으나 왜곡된 기독교를 만든 책임을 면할 길은 없을 것이다.”(자크 엘륄, 『뒤틀린 기독교』, 대장간, 263쪽)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없는 교회가 어찌 프랑스 개신교회만의 일이겠습니까? 우리 대한민국 교회는 안전합니까? 우리 대한민국 크리스천들은 이 변질됨과 왜곡됨에서 자유롭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면 목숨이 위태했던 시대적 정황에서 로마의 황제가 주가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선언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은 바울을 나누면서 나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이렇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들에게 오늘 성서 저자는 4〜5절에서 선언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지난 주간, 이런 제하의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국교회가 몰락한 것은 어제, 오늘의 현상이 아니라는 멘트로 시작한 영상은 펜데믹을 지나면서 더 급격하게 교회가 추락하고 있다고 운을 뗐습니다. 하지만 영상은 곧바로 반전의 메시지 영상으로 옮겨 갔습니다. 북아일랜드의 ‘HOPE CHURCH’를 담임하는 Craig coony 목사는 금년 초부터 불어닥친 성령의 움직이심과 역동하심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가 살아 움직이는 꿈틀거림을 체감하고 있고 실질적으로 모이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중보 기도(intercession)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그 부흥의 원인을 딱히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분명한 점은 영국교회가 쇠퇴가 아닌, 다시 일어서고 있는 역동이 있음을 보고하는 영상이었습니다. 곧이어 또 다른 부흥 보고를 간증하고 있는데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기도하는 일련의 기도자들이 3일 동안 중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주께서 창세기 28:13〜15절을 리더를 통해 읽게 하셨고 그 말씀 안에서 분명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고 간증합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곳 세인트 조지에서 이 말씀의 부흥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성령의 바람 같은 소리가 휘몰아쳤음을 기도회 리더인 Liz doyle 리더가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불어 스코틀랜드에서도 이런 부흥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음을 영상은 보고합니다. 영상을 보다가 내게 와 닿았던 클라이맥스가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를 부흥의 물결로 덮고 있는 집회에서 강사로 나선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가 던진 사자후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방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저는 이 필드에서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견고한 지지를 프랭클린 그래함에게 보내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는 쓰러질 대로 쓰러진 영적 흑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줄곧 외치고 있는 신 사사시대의 복판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사사시대 기브아 지역에서 벌어졌던 무시무시했던 사탄적 행태들이 그 어느 때보다 활개 치는 두렵고 또 두려운 망령됨의 시대 복판에 있기에 그 시대를 이긴다는 것은 평범한 잣대로 보면 거의 불가능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성서 본문에서 선포한 요한일서 저자의 사자후도 조금의 의심 없이 동의합니다. 다시 본문 4〜5절을 읽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누가 세상을 이깁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에서 단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대가 이 사람입니까?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세속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피와 땀과 눈물이 필요하다고 말한 가리발디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교회 부흥에는 한 푼의 돈도 들지 않고 ’피와 땀과 눈물‘이 필요하다. 엄밀히 말해 이런 것이 없는 자들은 부흥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레오나드 레이븐힐,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 231쪽)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이 세 가지의 액체를 흘리셨습니다. 바울도 이 액체로 목회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더 없이 부흥할 때, 수많은 주의 종과 교우들이 이 세가의 액체로 무장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한국 교회의 재부흥도 이 세 가지의 액체를 다시 갖출 때 다시 가져올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신 예수가 그대와 나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세상을 이깁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사랑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