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8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열일곱 번째 강해) 제목: 먼저 본문: 요한일서 4:13-21 서론) 시인 나태주는 신실한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시를 쓰면서 종교적인 냄새가 나지 않도록 주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시집을 읽을 때마다 숨기려고 했지만, 그가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임을 은연중에 나타내 주는 많은 시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이런 시와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하나의 고백 (나태주,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열림원, 236〜237쪽) 내가 당신을 알기 전부터 당신은 이미 나를 알고 계셨군요 내가 당신을 바라보기 전부터 당신은 이미 나를 보고 계셨군요 내가 당신을 선택한 줄 알았는데 당신이 먼저 나를 선택해 주셨군요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멈추고 나와 함께 잠들고 나와 함께 아프고 나와 함께 달리고 숨이 가쁘고 드디어 나와 함께 어푸러진 당신 다만 내가 당신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입니다 나의 앞이 아닙니다, 멀찍이 뒤도 아닙니다 바로 옆자리, 아니 나의 안에 들어와 당신은 나와 함께 숨 쉬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나였고 내가 또 당신이었습니다 아 고마우셔라 앞으로도 당신 나와 함께 어려운 길 가고 벅찬 길 오르고 마지막 날까지 그러시겠지요 물론 그래 주실 줄 믿고 미리 감사드립니다. 적어도 이 정도라면 시가 아니라, 신앙고백서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아닌 듯합니다. 나태주의 이 시어를 읊조리다가 울컥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알기 전부터 당신은 이미 나를 알고 계셨군요/내가 당신을 바라보기 전부터 당신은 이미 나를 보고 계셨군요/내가 당신을 선택한 줄 알았는데 당신이 먼저 나를 선택해 주셨군요”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나 이렇게 느끼고 성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정도의 고백은 시인이 말한 그대로 “나의 안에 들어와 당신은 나와 함께 숨 쉬고 있었습니다.”라는 영적 사귐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토로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본론) 오늘 주일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태주 시인의 시를 소개한 이유는 시인이 신앙고백적으로 읊조린 시가 혹여 오늘 본문을 기초로 한 시작(詩作)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본문 메시지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전개해 나가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요한일서 저자는 이렇게 수신자를 향하여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을 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습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제일 중요한 단어는 ‘먼저’입니다. 이 한 구절에 목사인 저는 그냥 포로가 된 느낌입니다. 꼼짝할 수 없는 먼저 사랑하신 주님의 그 사랑에 완전히 포위되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사랑의 노예가 된 것 같은 강한 은혜를 느낍니다. 시편 34:20절을 만나 보십시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차준희 교수가 『시인의 영성 Ⅰ』에서 시편 34편 해제를 통해 이 구절을 이렇게 해제했습니다. 읽다가 울컥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 몸속에 있는 ‘뼈’까지도 구석구석 살피고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가까이하심과 구원하심은 정적인 행위나 추상적 개입이 아닌 적극적인 개입과 직접적인 활동을 의미한다.”(차준희, 『시인의 영성 Ⅰ』, 새물결플러스, 327쪽) 이 정도의 세밀함을 갖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인데 더 울컥하는 감동은 그런 사랑을 ‘먼저’(프로토스)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역설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바울은 로마에 주거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는 글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로마서 5:6〜8절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나는 미완성의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커트 라인에 미달하는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불합격자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항의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어디 하나 사랑할 만한 자격도 없고, 구석도 없는 존재인데 나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미, 그리고 먼저의 백골난망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철야기도회에 참석하면 담임목사님이 자주 부르셨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어린 저는 담임목사님이 아는 찬양이 저 찬양밖에는 없으신가 하고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복음성가를 지금 내가 부르면서 그때 그 시큰둥했던 것을 참 많이 반성하는 찬양곡이 있습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왜 날 사랑하나/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왜 날 사랑하나/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왜 날 사랑하나 첫 소절을 어렸을 때는 그냥 무감각하게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이 찬양의 첫 소절이 주는 가사의 은혜 때문에 무너지며 감격의 자리로 올라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죽게 한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랑이 너무 크고 크지만, 더 말할 수 없는 감동은 주님을 죽게 한 그 원동력이 사랑을 나는 받을 자격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나는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인격, 삶, 태도에 있어서 전혀 갖추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에 경악하며 놀랍니다. 하지만 그런 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 자격을 보시지 않고 나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어제 지인 장례식이 있어 잠시 다녀왔습니다. 젊은 아들을 잃고 먼저 보내야 하는 아픈 장례식이었습니다. 입관 예배에 기도를 부탁받고 절절한 마음을 갖고 애도하며 기도했습니다. 예배를 다 마쳤기에 장례를 맡은 인도자가 입관 하고 발인을 진행해야 하는데 그다음 후속 사역을 인도할 생각이 없어 조객들과 염습사들이 당황하자, 옆에 있었던 제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장례 인도를 맡은 인도자에게 질문하라고 했는데 별 다른 지시가 없어 다시 당황하는 것을 보고 나중에 욕을 먹더라도 장례 예식은 진행되어야 하기에 제가 나섰습니다. 입관 전에 고인의 얼굴을 보이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교회 예식에 따라 그 일을 인도했습니다. 아직은 젊은 나이인 아들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이론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아픈 일이었지만, 입관실에 들어와 있는 부모님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게 했습니다. 고인의 어머니는 기절할 직전이었습니다. 아들에게 다시 만나자고 통곡하며 인사를 마쳤습니다. 고인의 아버지가 아들의 얼굴 앞에 섰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 얼굴에 입을 갖다가 댔습니다. 냉동창고에서 3일을 보관했기에 시신은 몹시 차가운 상태입니다. 아버지는 가슴에 묻어야 하는 아들의 얼굴에 입술을 갖다 대며 마지막 키스를 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싸늘한 시신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대며 키스로 작별 인사를 하는 존재는 부모 말고는 없습니다. 부모가 왜 싸늘한 자식의 시신에 입을 갖다가 댈 수 있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이론적인 사랑이 아니며,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읽은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들이 폐암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숨이 막 넘어가는 고통스러운 임종의 순간, 엄마가 아들의 입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대고 인공 호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내가 아들의 폐에 공기를 넣으면 아들이 죽지 않을 거라고. 폐암으로 죽어가는 아들의 입에 입을 갖다 대는 이 땅의 유일한 존재는 어머니 외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부모의 사랑은 환경, 조건, 상황에 따라 변질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대만 출신의 뛰어난 신학자 송천성 박사는 단언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이 땅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대리자는 자식을 위해 파송된 어머니이다.” 부모님의 이 사랑에 대해 부인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더 한 발자국 나아가 선언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부모님을 먼저 사랑해 주신 주군이시라고 선포합니다. 기실, 사정이 이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사랑의 가치는 표현 불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일서 저자는 요한 공동체라는 수신자를 향하여 아주 강한 어조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절) ※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은 차선적 사랑이 아니라 우선적 사랑입니다. 이 레마가 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은 조건을 내세운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는 감동입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까? 간단합니다. 1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연구서를 펴낼 때, 참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민하며 성찰했던 텍스트가 사사기 6장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기드온 사사 선택 테스트입니다. 왜 고민했을까요? 정말, 사사로 택하기에는 전혀 깜도 안 되는 인간, 기드온을 선택하는 과정이 눈물겨웠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하나님께 범죄하자, 하나님은 미디안을 도구로 삼아 7년 동안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셨고,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고통이 힘들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부르짖자 하나님은 오브라에 거주하고 있던 기드온을 찾아가서 그를 사사로 부르십니다. 이 과정을 사사기 6장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정말로 가관이었습니다. 대단히 소심했던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부르며 용기를 주었건만 기드온은 사사로 나서 미디안에게 고통당하는 민족을 구원하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거부합니다. 맨 처음 부르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다고 거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두 번째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까지 기다리라고 다그칩니다. 하나님이 기다려주셨고. 예물을 받으신 퍼포먼스까지 행하시며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예물을 받으신 것을 본 기드온은 이번에는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기에 반드시 죽을 것이기에 나는 사사가 될 수 없는 자라고 억지춘향을 부리자, 사사기 6:23절에서 이렇게 달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도 기드온은 미적거리며 이번에는 세 번째는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하면서 양털 뭉치를 타작마당에 놓을 테니 이슬을 내리시되 양털에만 있게 하도 다른 주변은 마르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자 그가 다시 요구한 조건은 반대로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양털에만 이슬이 없고 다른 주변에는 이슬을 내려달라는 억지 요구였습니다. 이 요구에 하나님이 반응한 내용을 사사기 6:40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저는 기드온에 대한 해제를 하면서 이렇게 제 책에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자존자시다. 결코, 인간의 유익에 따라 만들어지거나 또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시다. 그러기에 그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존재하심 그 자체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한다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라고 이해했고 또 지금도 그렇게 이해한다. 정황이 이런데 기드온과의 만남을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실망스러울 정도다. 하나님이 조금 심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나님의 자존적 존재 권위를 내려놓는 것 같아 실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본문 정황 안으로 들어가면 이 충격은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면 전율하게 하는 하나님이 행하신 역발상의 은혜가 있다. 하나님이 집중하신 오직의 관심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 이스라엘의 구원이었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Ⅰ』, 동연, 169쪽)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왜 이렇게 기드온에게 소극적으로 일관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마치 기드온에게 무슨 약점을 잡힌 것처럼 왜 수동적이셨을까요? “하나님이 집중하신 관심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 이스라엘의 구원이었다.”라는 이 표현을 오늘 설교 제목, 그리고 레마와 연관하여 선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상황과 조건 그리고 태도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기드온의 태도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며 그를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이것을 내게 소급하여 적용하면 전율하는 감동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먼저 사랑하신 이유는 나의 부족한 조건, 상황, 여건, 자격을 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먼저 사랑하시면서 나를 오늘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본문 17〜18절을 읽겠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심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임하는 복을 저자는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⓵ 담대함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담대함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심판의 날에 우리를 책임지실 은혜를 믿기 때문입니다. ⓶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차선적 사랑이 아닌 우선적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자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고, 그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이라고 천명합니다. 지난 주간, 기도 부탁을 받았습니다. 지체 한 명이 교회에 다녀오면 두통이 너무 심하다는 보고였습니다. 이전에도 그런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기도 부탁을 받고 그 지체에게 요한복음 16:33절을 무기로 주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담대하기를 선포합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김영봉,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홍성사, 179쪽) 하나님께서 나와 그대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 땅위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 사하셨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우리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 영광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선포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 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 우리 고대하네 주님 오실 그날/다시 사신 왕의 영광 이 땅을 비추네 사단의 권세는 주 앞에 무너져/생명과 진리의 주 권세 가장 높도다 우리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 영광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선포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 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 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