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 부활주일 설교 제목: 누가복음 24:13-27 본문: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서론) 아주 빈번하게 서재에 있는 나를 정신 번쩍 나게 해 주는 차량 스피커가 내 귓가를 때리는 계절이 다시 도래했습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했는데 스피커를 타고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잠자고 있는 내 자아를 깨우게 해 주는 소리가 아니라, 내 영혼을 좀 먹게 하는 소음이라서 매우 유감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아직도 열흘 동안이나, 내 허락과 동의 없이 내게 들려오는 거의 폭력 수준의 소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지만, 이 땅에 살고 있으니 체념하고 또 열흘을 버텨야 할 것 같습니다. 거대한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자기가 걷고 있는 길과 방향이 옳다는 악다구니입니다.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걷고 있는 길이 옳다고 말하는 저들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미가 6:6-8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시대는 통상 주전 700년쯤 활동한 예언자로 이해합니다. 그의 활동 시기가 유다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하스 치세였기에 예언의 내용이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유다의 지도층들이 자행했던 범죄들을 퉁 치려는 아주 그릇된 행위와 방향들이 다반사로 횡행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 미가는 이런 본말이 전도된 그릇된 방향을 지적하는 예언의 소리를 주저하지 않고 선포합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죄를 덮으려고 하지 말고, 정의와 인자, 겸손으로 무장하여 윤리적인 삶으로 보이는 삶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설정한 방향과 길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설정하신 올바른 방향으로 돌이키라는 엄중한 메시지를 예언자 미가는 남겨 놓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내 신념과 이성의 방향성은 믿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미가는 독자들에게 알려준 셈입니다.
본론) 같은 맥락에서 오늘 2024년 부활주일에 주시는 본문은 우리 교우들이 잘 곱씹어야 하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본문 13절을 봅니다.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오늘 본문 이해와 관련하여 ‘그날’과 ‘그들 중’이라는 단어는 중요하기에 주석하겠습니다. 그날이 언제일까? 그리고 그들은 누구일까? 김호경 교수의 주석으로 답해 보겠습니다. “13절의 ‘그날’은 13〜35절의 이야기를 1절과 연결시킨다. 1〜49절의 이야기는 모두 제삼일, 즉 예수가 ‘일으킴’을 받은 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3절에 나오는 ‘그들’은 9절에 언급된 ‘다른 모든 이’에 속한 자들로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 즉 예수의 죽음과 빈 무덤을 들어 알고 있는 자들이다.”(김호경, 『연세신학백주년 기념 주석-누가복음』, 505-506) 무슨 말인지를 부연하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명의 인물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던 ‘그날’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 3일이 지난 때임을 알려 줍니다.(21절 참고) 또한 ‘그들’은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에 돌이 굴러져 있는 엄청난 일을 목격한 뒤에, 그 무덤을 지키고 있었던 두 천사들이 알려주었던 내용을 제자들에게 알릴 때 그 자리에 같이 있었기에 그 내용을 전해 들은 이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5〜7절을 만나 보십시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다시 말해 천사들이 전해준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약속하신 대로 갈릴리로 가셨다는 전언을 받고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천사들에게 들은 그대로 다시 전해줄 때, 그곳에 있었던 제1 제자군과 함께 있었던 제2 제자군에 속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곳에서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해 받았던 제2 제자군에 속해 있던 인물 중의 두 명이 13절에 소개된 ‘그들’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은 이들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또 한 사람의 이름을 익명으로 놔두었습니다. 이름이 밝혀진 한 명은 글로바입니다.(18절) 학자들은 또 한 명의 익명의 제자는 글로바의 아내 혹은 아들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중요하지 않기에 이 정도의 해석을 하는 것으로 ‘그들’ 대한 부연을 마치겠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불과 3일 전에 직접 목도 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은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고, 그분의 무덤은 비어 있었으며, 동시에 그분은 다시 살아나셔서 갈릴리로 가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예루살렘에 퍼진 지 3일이 되는 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두 명의 제자는 불과 3일 어간에 발생했던 예수님에 대한 일체 일을 경험했고 알고 있었다는 점을 누가복음 기자가 밝힌 것입니다. 이렇게 두 명의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사건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본문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음을 알려줍니다. 다만 이들의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 자기들 곁에 오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을 전제하며 본문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두 제자에게 오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근 3일간의 이야기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질문을 받은 두 사람 중에 이름이 밝혀진 글로바가 반색하여 예수를 나무라는 듯이 3일간의 일들을 설명합니다. 본문 18〜24절이 이것을 보고해 줍니다. 글로바가 예수께 설명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⓵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이다. ⓶ 그를 우리는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로 여겼다. ⓷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혔다. ⓸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라고 기대했다. ⓹ 그가 죽은 지 사흘이 되는 날이 오늘이다. ⓺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죽은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보고했다. ⓻ 여인들의 보고는 너무 충격적이고 놀라운 보고였기에 제자 중 몇이 무덤에 가서 예수를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했다. 글로바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다시 살았다는 일련의 보고가 얼마나 정확합니까? 어디 하나, 손 볼 때가 없는 완벽한 증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완벽한 보고를 했던 글로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본문 13절을 분명히 말합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다.” 글로바의 보고에 의하면 예수께서 약속하셨던 부활의 내용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듯 보입니다. 약속한 대로 살아나셨고, 약속한 대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제자가 해야 할 일은 예루살렘에서 머물다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그곳에서 약 10km 떨어진 엠마오로 낙향하고 있습니다. 왜 두 제자는 갈릴리로 가지 않고 엠마오로 내려갔습니까? 단순하게 답하겠습니다. 불과 3〜4일 어간에 두 제자에게 일어났던 예수의 사건, 곧 십자가에서 죽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 약속하신 대로 갈릴리로 가심이라는 역사적 내용을 두 제자는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하게 됩니다. 두 명의 제자들은 우리 세인교회 교우들이 살고 있는 21세기라는 시공간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동고동락하고 그분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던 주후 1세기라는 시공간에 같이 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을까요?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 부활의 믿음은 이론적인 경험이나 이해의 산물이 아니라, 내게 일인칭으로 적용될 때만 믿어지는 하나님의 신비적 사건임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부활 신앙은 백미는 내게 적용하기입니다. 정확한 이야기로 예수께 전언해 주는 글로바와 또 한 명의 제자에게 주님이 보이신 반응은 대단히 큰 울림과 동시에 착찹함으로 다가옵니다. 본문 25〜27절을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더디 믿는 제자들을 타박하신 예수님은 다시 당신이 고난을 받아야 하며, 그 고난의 끝에 역사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제자들에게 세밀하게 설명하셨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내가 다시 살아난 이유는 바로 ‘너’라는 개인의 객체를 완벽하게 구원해야 했기 때문임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당신의 부활 사건을 개인의 삶에 전인격적으로 적용할 때만 부활의 능력이 개인에게도 임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이론적 교리의 대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은혜와 감격이 내게 접목되는 것은 주님이 부활하신 그 능력의 수혜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 얻어지는 영적 감동의 사건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말할 때 언제나 빠지지 않고 단골 메뉴로 설교 텍스트 리스트에 올라오는 요한복음 11:21-22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의 고백 속에 담겨 있는 은밀한 복선이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내 오빠가 죽어서 벌써 4일이나 흘렀기 때문에 썩는 냄새가 납니다. 주님이 이 자리에 안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어떻게든 하시면 내 오빠가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 대단히 믿은 좋은 나사로의 첫째 여동생의 신앙고백처럼 들리는 메시지입니다. 헌데 이런 마르다의 고백을 들으신 주께서 그녀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반색하시며 성찰하게 하신 구절이 바로 그 유명한 11: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연합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보기에 좋은 신앙고백을 들으신 뒤에, 이렇게 되물으신 것입니다. “네 말대로 나는 다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런데 마르다야, 이 부활의 능력이 네 오빠에게 일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너에게 일어나는 능력인 것을 믿느냐?”라고 강력하게 다시 물으신 것입니다. 네 오빠가 아니라, 너에게 임하는 능력임을 질문하신 주님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부활의 신비로운 은혜와 능력이 믿어지는 것은 철저히 내게 적용할 때임을 시사한 것입니다. 매년 부활절을 우리 그리스도인을 만납니다. 하지만 매년 만나는 부활절에 1년 내내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인격적인 유리된 채로 보내다가 ‘너’의 부활절, ‘그’의 부활절 이야기를 들으며 대리만족하는 부활절을 만난다면 그 부활절이 도대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부활의 의미가 절기가 되겠습니까? 그런 무의미한 부활절을 보내는 자에게 항상 돌아오는 결과물이 있습니다. 엠마오라는 구태로 다시 돌아가는 아쉬움입니다. 엠마오를 향하여 걷고 있으면서 부활의 주님이 내게 다시 살게 해 주시는 능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엠마오행을 고집하며 걷고 있으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회복하게 하시는 은총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길을 걷되 엠마오가 아닌 갈릴리로 걸음의 방향을 바꾸어 걷는 자들입니다. 이 방향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생명의 주로 부활하신 주님의 그 놀라운 능력을 철저하게 내 부활의 사건으로 적용시켜야 합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4월 4일에 아들이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비아 돌로로사’의 길을 걸어야 하는 아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몇 자 적어 보았는데 읽어드리고 설교를 맺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길이기를 ‘아무개 목사’라는 레떼르가 이제 무거운 멍에가 된 시기에 아들이 이요한 목사로 그 직을 옮겨야 하는 것을 보니, 아버지의 마음은 만 가지 감정이 꿈틀거린다. 목사라는 직은 영광을 받는 사족을 남기는 자리가 아니라, 마치 끝이 없는 무저갱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삶을 시작해야 하는 직이기에 목사라는 출발점에 서 있는 아들을 보는 아버지는 떨리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는 것 말고는 지지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애잔하기 이를 데가 없단다. 아버지가 가장 어려웠을 때, 신학을 하겠다고 나선 네 모습을 보면서 한때의 객기라고 치부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단다. 하지만 주군의 생각이 아버지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는 것을 알고는 백기투항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두 손을 들었다. 더불어 그렇게 몰고 가신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 분이신 것을 믿기에 이제는 아들의 천로역정의 길을 그분께 철저히 맡기기로 했단다. 아버지가 오래전에, 감동의 파노라마를 느끼며 읽었던 유대 신학자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글을 하나 소개하고 싶구나. “그분의 존재에 대한 확신에 도달한다고 해서 신앙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신비를 넘어서 있는 그분과 합일하려는 격렬한 갈망의 시작이며,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힘과 영적으로 우리를 넘어서 있는 모든 힘을 하나 되게 하려는 열망의 시작이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한국기독교연구소, 206-207) 엄청난 성찰이다. 아들아, 섣불리 신앙을 정의하지 않기를 바란다. 신앙의 정의는 목사로 살아가는 동안, 아들이 삶의 체화를 통해 인격적으로 경험한 것만이 올바른 신앙의 내용물임을 알고 섬기는 교우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렇게 신중하게 섬기는 목사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어디 이뿐이겠나 싶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하고 싶구나. 아버지는 아들이 걷는 목사라는 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좌충우돌하고 또 이리저리로 흔들리기는 하겠지만 젊은 날에 불온함과 흔들림이 없이 승승장구하는 자에게 무슨 뿌리 깊은 영성을 기대할 수 있겠나 싶어 아들이 주군께 묻고 질문하는 목사가 되어 주기를 정말로 기대 한다. 아들, 너도 좋아하는 차준희 교수가 이번에 출간한 책 『구약 예언서』를 읽다가 정말로 예기치 않은 은혜를 받았단다. 김기석 목사의 글을 자기 책에 이렇게 인용했구나. “망설임은 ‘성실성의 증거’이고, 확신은 ‘사기의 증거’일 수도 있다. 너무 지나친 말일지 모르겠지만 회의 없는 강철같은 확신은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삶 자체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모호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 아닌가!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는다. 무릇 살아 있는 것들은 다 흔들리게 마련이다.”(차준희, 『구약 예언서』, 감은사, 407-408) 아버지도 동의한다. 이렇게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목사가 굳어지지 않는 새로움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말이다. 적어도 이런 길을 걷는 목사는 후회하지 않는 사역자가 되지 않겠니. 아버지는 아들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걷는 목사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너무 많은 회한을 남긴 못난 아버지라서 아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평생 아버지가 목사로 살면서 순간순간을 위기를 버티며 살아내도록 주군께서 힘을 주신 말씀을 선물로 남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목사라는 레떼르를 갖고 출발하는 이요한 목사에게 날마다 하나님이 세미한 소리로 다가오시기를 기도한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이 글이 어디 아들 목사에게만 전하는 글이겠습니까?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도 후회하지 않는 천로역정의 길을 걷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길을 걷기 위해서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오셔서 생명의 숨을 내뿜어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성도들 개인에게 적용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