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동통(同痛)하고 있습니까?2024-04-19 11:49
작성자 Level 10

2024년 3월 24일 고난주일 설교

 

제목동통(同痛)하고 있습니까?

본문누가복음 7:11-17

 

서론)

 

지난 금요일에 아주 예쁜 안수 집사 부부가 제천에 방문했습니다.

제가 진해에서 사역할 때단어 자체가 어떨지 모르겠지만정말 무조건으로 종을 도우며 사역했던 권사님의 아들 부부입니다.

몇 년 전에 권사님 부부가 6개월 간격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지인을 통해 들었을 때제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돌이켜 보면 39세라는 젊고 젊은 담임목사가 진해교회에 부임했을 때연소함으로 인해 가볍게 여길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젊은 담임목사가 힘들까 봐 노심초사하며 정말 최선을 다해 세심하게 중보하며 사역을 도왔던 진해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던 부부였기에 소천 소식을 들었을 때적지 않은 동통으로 가슴앓이를 했던 기억이 떠올라 권사님의 아들 부부를 보고 내심 기뻤고반갑기 그지없었습니다.

진해에서 사역하고 있던 어느 날평일 저녁에 기도하기 위해 예배당에 나갔는데 권사님이 엎드려 흐느끼며 기도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날 권사님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아들이 척추 측만 교정을 위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난이도가 큰 수술이라고 합니다나약한 어미가 기도합니다아들에게 후유증이 없는 수술 과정이 되게 하옵소서.”

어느 부모이든 자식이 난이도가 높은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 처절하지 않은 부모는 없습니다.

상식이 있는 부모는 누구나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기도가 들려 저 역시 조용히 뒷좌석에 앉아 중보로 응원했습니다.

하나님○○이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게 하옵소서.”

그 기도의 대상자였던 아들을 20년 만에 해후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목사님부모님이 제게 물려주신 최고의 유산은 믿음입니다아마도 제게 믿음이 없었다면 저는 벌써 빗나간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금요일에 안수집사로 충성하고 있는 권사님의 아들 내외와 사랑하는 딸을 만나 원없이 축복해 주고 배웅했습니다.

저는 20년이 훨씬 지난 시기의 기억이지만당시 권사님의 목에서 흘러나온 그날의 기도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권사님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중보의 소리는 핏소리였습니다.

 

본론)

 

본문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서 한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고백을 들으신 뒤에 그 하인의 병을 고쳐 주신 유명한 기사가 오늘 본문 직전의 메시지입니다.

이후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나사렛에서 약 남동쪽으로 7.2km 떨어진 나인성이라는 동네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문 가까이에서 사람들이 한 죽은 청년의 관을 메고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셨습니다.

죽은 청년의 어미는 과부였고 죽은 아들 역시 독자였기 때문에 이 나인성 과부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고 절망이었다는 것을 아시고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셨습니다.

본문 13절을 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슴이 미어지셨다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유진 피터슨 메시지’ 누가복음 7:13절 번역)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예수께서 공생애를 감당하시는 동안그분의 사역 대상은 갈릴리 민중들이었습니다.

갈릴리 민중의 대명사는 고아와 과부와 객(나그네)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들을 잃은 여인의 정체성은 바로 그 과부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가 잃은 아들은 외아들이었으니 과부가 느껴야 할 심리적 고통의 강도는 이론적으로 해석 불가입니다.

바로 그때 그 지경을 지나시던 주께서 우연히 그 광경을 보시고느끼셨던 소회를 유진 피터슨은 본인의 독특한 필체로 이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가슴이 미어지셨다.’

여러 차례 설교를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불쌍히 여기사라고 번역한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의 원뜻은 창자가 끊어지다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가슴이 미어진다라는 의미가 설득력이 있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스플랑크니조마이의 심정을 갖고 사람들이 메고 나오는 죽은 아들의 관 앞으로 다가서셨습니다.

이윽고 관에 손을 대자 사람들이 잠시 멈춥니다.

관에 손을 대신 주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본문 14절 후반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이렇게 선포하자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누가복음 기자가 보고하는데 15절이 증언합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과부가 느껴야 했던 고통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제거해 주신 것입니다.

공관복음 중에 유일하게 누가복음에만 기록하고 있는 이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려주신 기사는 여러 가지 함축적인 은혜를 독자인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을 보여준 기사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기적은 일어난다는 은혜 등등입니다.

하지만 고난주일 아침에제가 교우들과 나누고 싶은 본문의 교훈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 동통(同痛)의 마음을 나누면 기적을 이룬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아픔을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으로 동통(同痛)하셨습니다.

이렇게 같이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신 주님은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기적으로 과부를 위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신성을 갖고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다시 살리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고난받는 자와 함께 고난의 동통을 나누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아픔을 당하는 자가 다시 소망을 갖고 일어설 수 있는 기적을 창출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2024고난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합당한 메시지를 오늘 설교를 통해 나누어야 하지만내일부터 진행되는 저녁 집회 말씀으로 이 메시지는 함께 나누고 오늘 주일 설교는 다른 각도에서 은혜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2024년 고난주일에 우리들이 같이 동통(同痛)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주변에 아파하는 자들을 살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바울이 던진 화두가 2024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줍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

바울이 로마서 12:15절을 말한 이유는 로마 교회 밖의 사람 중에 아픔을 당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라는 권면 때문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이성복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없는 것이 없었다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 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새 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 지성사, 2023, 66-67)

1980년에 발표한 이성복 시인의 시어 중에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시리게 한 표현이 마지막 행에 있습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1980년대를 지칭하여 저는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한국 근현대사 중에 가장 치욕적이며 절망의 시대였다고 말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윗 시의 제목인 그 날에서 당시의 시대적 절망을 시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아프지 않다고 역설한 시대실상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눈과 귀를 멀게 한 시대는 가장 큰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진짜 아픈 시대였는데 정치 역학적 구도나 사회적 풍토는 그 아픔을 입 밖으로 토로하지 말라고 강제하던 시대였음을 시인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고 있고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일에 앞장서서 함께 울어주었던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갖고 있는 신성의 능력으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어떻게 살리셨습니까?

주님이 갖고 계셨던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성은 부차적인 능력입니다.

주님이 제일 먼저 가지셨던 능력은 함께 아파하는 동통의 은혜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수많은 내 지인들이 절망이라는 관에 옮겨져 사망의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나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치부하기에 일어나고 있는 비극입니다.

이런 영역에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리 만무입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 시대에는 하나님의 긍휼함이 자리를 잡을 여백은 없습니다.

하지만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의 옆에서 같이 아파하고 동통을 느낄 때거기에 새 생명이 싹트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아픔을 외면하셨다면 그분은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매 맞음을 당하셨고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며물과 피를 다 흘리며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습니다.

?

저와 여러분이 사탄의 권세에 짓밟혀 사망의 그늘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매우 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주님이 동통(同痛)하셨기 때문입니다.

혹자가 이런 글을 써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있다.”

 

100% 동의하면서 오늘 설교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만에 하나어떤 이가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극도의 고통과 통증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외면한다면 그것 자체가 아프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군이신 예수께서 아프게 하는 것들과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먼저 아파하셨고스플랑클니조마이의 심정으로 나인 성 과부를 바라보셨으며그 결과물로 기적을 일으키신 뒤에 다시 살아난 아들을 극도의 슬픔에 빠진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는 은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40-4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갈릴리 가버나움 지역에서 사역하던 주님이 한센병 환자의 방문을 받습니다.

이 환자의 고백은 주님이 원하시면 내 병을 고침받을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상황의 구도가 놀랍게도 주님께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점이었습니다.

마가복음 기자의 눈썰미는 대단했습니다.

주님이 한센 병자에게 선포하셨던 메시지에 집중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4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주님의 선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도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원하심이 그대로 나타난 구절이 무엇입니까?

스플랑클니조마이” 즉 불쌍히 여기심이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항상 갖고 계셨던 전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통(同痛)이었습니다.

동통의 아픔을 느끼셨던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마가복음 1;42절이 증언합니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더불어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기독교 절기 중에 가장 엄숙하고도 경건하게 나를 제어하고 절제하며 달려가야 하는 기간이 펼쳐집니다.

새벽에 하나님을 바라볼 때항암치료 중에 있는 지체가 내 자아 안에 있습니다.

그 지체가 느껴야 하는 고통의 심연이 담임목사를 옥죕니다.

그래서 동통으로 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새벽에 엎드릴 때마다 경제적인 고통으로 절뚝거리는 지체가 나를 흔듭니다.

해서 동통으로 같이 웁니다.

경영하는 터에 대한 속 시원한 복이 임하지 않아 아파하는 교우가 새벽에 나를 흔들어 깨웁니다.

나는 영락없이 지체의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씨름합니다.

자라지 않는 지체들의 미성숙을 보면서 하나님께 절규하며 아파합니다.

그리고 역시 엎드려 웁니다.

극단적 이기성으로 무장하여 그것이 하나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지체들을 보며 어떤 때는 거룩한 의기로 분노하지만또 한편으로는 그런 무감각한 이들 때문에 소리죽인 울음을 터뜨립니다.

동통 때문입니다.

동통의 공감이 없이 목회는 불가능합니다.

때로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지만 동통은 목회의 자양분입니다.

그래서 동통의 느낌을 거부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치열하게 싸우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이유는 동통을 느끼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나도 아파하는 자와 같이 아파하는 동통의 나눔을 감당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 아픔을 같이 짊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소설가이자 목회자인 이정일 목사의 글에 이런 문장이 담겨 있습니다.

성숙함은 성경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자신을 읽을 때 비로소 얻어지는 은총이다,” (이정일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예책, 268)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지체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어떤 영적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대단히 냉철하게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에 하나내가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는 동통의 은총을 경험하고 있다면 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서가고 있음을 확신해도 괜찮습니다.

더불어 주님이 나를 위해 우신 것처럼나도 아파하는 자들을 위해 울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되는 것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과부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동통(同痛)하신 분이십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흘린 눈물은 십자가의 무거움이 아니라오

우리의 무지함으로 아파하시며 흘리신 눈물이었소

골고다 그 언덕길을 우리 위해 걸어야 했던 그는

비난과 손가락질에 물과 피를 흘려야 했건만

험난한 주님의 십자가 몹시나 무거웠건만

우리의 비난과 채찍에 재물되야 했던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나 구원 얻었으니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이 한 몸 받치리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죽음으로 사랑을 하신 것을

우리의 주님께서 자기 몸 다하여 죄인을 사랑하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