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무서우리만큼 치열하게(1)2024-03-07 17:26
작성자 Level 10

2023년 12월 3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송년주일: 느헤미야 42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13:1-14
제목: 무서우리만큼 치열하게 (1)

서론)

탁구장에 나가 운동을 할 때면 제가 해야 할 의무조항 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위 부수 회원들과 운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위 부수라 함은 4부 이하의 회원들을 말합니다.
상위 부수의 회원들은 탁구장 경영에 그런 도움을 음으로 양으로 주어야 합니다.
해서 구장에 나갈 때마다 몇 몇 회원들은 제가 맞 상대를 해주는 단골 손님들입니다.
랠리 연습을 하다가 어느 정도 몸에 땀이 나면 시합에 들어갑니다. 
그럴 때마다 뭐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하위 부수에 있는 회원들은 승부욕이 발동하여 결기 충만함으로 게임에 임합니다. 
경기를 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당부합니다.
경기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거니까 경기 결과는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듣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이기기 위해 땀을 뻘뻘흘리고, 때로는 핏대도 올리고, 때론 제대로 되지 않아서 감정을 폭발하는 회원들도 가끔 보입니다.
하위 부수가 상위 부수와 경기를 부수에 맞는 핸디를 갖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위 부수는 상위 부수를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실력의 차이겠지만,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상위 부수가 하위 부수의 수를 읽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이 갖고 있는 단점을 읽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하위 부수들은 너무 많은 틈새가 있는데 그 빈틈을 상위부수가 공략하기에 하위 부수들은 상위 부수들을 웬만해서는 이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듯 빈틈은 승부를 결정하는 치명적 약점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에 담겨 있는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에베소서 4:27절을 읽습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토포스’는 문자적으로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이 단어를 ‘place’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특정한 장소’라는 의미를 대단히 적절하게 표현한 NRSV 영어성경의 표현은 의미 심장합니다.
“Do not make room for the devil.”
“악마를 위한 자리를 만들지 말라”
결국 악마에게 조금의 여백이라도 빈틈을 보이지 말라는 강력한 권고입니다.
거대한 둑이나 댐이 무너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조그마한 틈으로부터 야기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은 오늘 설교 제목으로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서우리만큼 치열하게” 영성이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전 이해가 필요한 텍스트입니다.
6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아닥사스다 32년이라면 주전 432년을 지칭합니다.
느헤미야 5:14절을 읽어 봅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구절을 통해 살펴보면 느헤미야가 유다의 총독을 임명을 받은 해가 아닥사스다 왕 재위 20년때였습니다.
서기력을 계산하면 주전 444년입니다.
이 계산법을 토대로 접근할 때 느헤미야 사역에 대한 이런 정리가 가능해 집니다.
느헤미야는 주전 445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했고, 그 해 성벽 재건을 52일 만에 이루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아닥사스다 왕으로 유다 지역 총독으로 정식 임명된 느헤미야는 주전 444년부터 주전 432년까지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예루살렘의 치안을 담당하는 총독직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단지 예루살렘의 치안을 담당한 지배국의 정치인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사명감을 갖고 무너진 포로귀환 공동체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세우는 영적 개혁에 부분적 승리를 이루었던 결정적인 주인공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느헤미야는 본인이 고국인 예루살렘에 돌아와 계획했던 영적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아닥사스다 재위 32년인 주전 432년에 바사로 돌아갑니다.
성경은 이후 분명한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있어 본문에 설정된 그대로 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본문 정황은 어느 정도의 시기가 지났음을 알려줍니다.
주전 407년에 작성된 기록 문서인 ‘엘리판틴 파피루스’가 있는데 그 기록을 보면 ‘바고히’라는 사람이 예루살렘 총독으로 그해에 부임하였다는 서술이 있는 것을 보면 느헤미야는 분명히 주전 407년 이전에 은퇴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조심스럽게 접근한다면 본문의 시기적 배경은 아무리 넓게 잡아도 주전 432-407년 사이의 어느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사이 어느 해에 느헤미야는 바사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습니다.
돌아와 와보니 기가 막힌 일들이 이미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형편임을 알게 됩니다.
느헤미야 역사서의 마지막 장인 13장 본문 안에는 느헤미야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참담한 사건 네 가지를 보고하는데 오늘은 14절까지를 본문으로 삼고 먼저 두 가지 사건을 나누려고 합니다. 
느헤미야의 시각으로 볼 때 어처구니 없이 하나님 백성들이라고 불렸던 예루살렘 거민들이 보였던 빈틈이 이러했습니다. 

1) 세속주의로 회귀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4-9절을 보면 다음의 일들을 고발합니다.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도비야를 기억하십니까?
느헤미야 정경 안에 보고된 내증만 갖고 도비야가 누구인지를 추적해도 도비야의 정체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느헤니야 전문가인 김 사무엘 목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도비야의 정체를 이렇게 밝힙니다.
“그는 느헤미야의 대적자로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방해하는 자였고, 느헤미야 개혁의 반대 세력이었다. 혼합 결혼을 통해 유대 여인과 결혼하여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아들 여호하난도 유대 여인인 베레가의 아들 무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유다에서 동맹한 자가 많았다. 그러나 도비야는 여호와의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이교도였다.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와는 다른 낯선 자였다. 낯선 자 도비야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성전의 거룩함을 깨는 자였다.” (김 사무엘, 『에스라-느헤미야의 혼합 결혼 파기에 관한 연구』, 토브북스, 231쪽) 
이런 자를 제사장 중에 한 명이었던 엘리아십이 뒷배경이 되어 주며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기간을 이용하여 성전에서 가장 큰 방 하나를 내어주면서 그가 거처하도록 배려한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고 본문은 보고합니다.
도비야가 차지한 방은 이스라엘 자손들과 레위 자손들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보관하는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 9:38-10:39절에서 살폈듯이 이 장소는 거룩한 성물들을 채워놓던 방이었습니다.
이런 거룩한 방을 느헤미야의 대적자이자. 성벽 건축을 그토록 집요하게 방해한 위험인물에게 내어 주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던 주전 586년 즈음에 횡행하던 세속주의로 다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런 기가 막힌 참담한 일을 목도한 느헤미야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8-9절을 복기하겠습니다.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말 그대로 단호한 척결이었습니다.
눈치 보지 않는 결단력으로 도비야가 갖고 있었던 일체 것들을 단호하게 잘라버리는 리더십을 발휘한 것입니다.
20세기가 선정한 10대 신학자 반열에 이름을 올린 하비 콕스가 자신의 걸작 중의 걸작인 『세속 도시』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을 너무 보수적으로 행한 세 가지 내용을 소개하면서 교회가 이런 폐쇄성에서 벗어나야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생각해 볼 가치가 있어 콕스의 갈파를 소개합니다. (하비콕스, 『세속도시』, 문예출판사, 182쪽)
⓵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만의 일인 데 반해서, 세속도시는 인간의 성취물이다.
⓶ 하나님 나라는 극기와 회개를 요구하는 데 반해서, 세속도시는 기술과 노하우만을 필요로 한다. 
⓷ 하나님 나라는 역사 위에 그리고 역사를 넘어서 존재하는 데 반하여, 세속 도시는 완전히 이 세계 안에 있다. 
듣고보니 어떻습니까?
뭐 하나, 틀린 해석이 아닌 것으로 보여지지 않습니까?
보수적인 성향의 교단에서 초지일관으로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세속도시에 대한 갈파로 특별히 비평할 내용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비 콕스는 이렇게 교회가 행하는 이분법적인 갈라치기야말로 품어야 할 세속의 영역과 영구적으로 결별하게 만드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속도시에 대해 관대히 포용할 것을 강력하게 역설합니다.
하비 콕스의 갈파에 대해 부분 동의합니다.
세속 도시를 품고 세속의 영역을 섬겨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자, 교회가 외면하면 안 되는 미션이라고 저도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속의 영역을 품고 그 영역이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중보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허덕이고 있는 그리고 빨려 들어가고 있는 세속주의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동성애와 같은 이슈입니다.
동성애를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동성애에 대한 반대 의견을 개진하면 그렇게 하는 자들을 배타주의와 독선주의라고 피를 토하며 공격하는 시대입니다.
해서 동성애에 대한 목사들의 해석조차도 대단히 조심해야하는 시대가 이 시대입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을 품는 것과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은 결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또 말장난이라고 공격하겠지만,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왕따를 당하고, 권리를 박탈당한 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가 무슨 교회인가라고 독설을 받아도 교회는 갈 데 없다고 소리치는 동성애자들을 내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품어야 합니다
안아야 합니다.
하지만 동성애 자체를 인정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서야 합니다.
세속주의와 세속성은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도비야에게 성전 안에 있는 방을 제공한 제사장 엘리아십의 행위는 세속주의를 성전 안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성전의 처소 중에 성물들을 보관하는 방을 도비야에게 내어준 것은 우여곡절 끝에 이룬 예루살렘 성전 및 성벽 중심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이 갖고 있었던 영적 정체성을 송두리째 내팽개친 행위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다시 또 무너지는 하나님 중심적 신앙을 다시 곧추 세우며 영적으로 다잡이하기 위해 도비야가 갖고 있었던 모든 세간 살이들을 방 밖으로 내어 던져버리고 그 방을 다시 성물들로 채웠음을 본문 8-9절에서 보고합니다.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느헤미야의 영적 행동은 무섭도록 치열한 결단력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행위를 따라하는 것에 머뭇거리면 안 됩니다.
20세기의 예언자라고 지칭되는 아이든 토저 목사는 그의 뛰어난 작품은 『믿음에는 타협이 없다』에서 이렇게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들 중에 하나는 기독교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분께 온전히 복종하는 것뿐이 없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토저, 『믿음에는 타협이 없다』, 규장, 263쪽)
재 강조하거니와 하비 콕스의 말대로 세속주의의 영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품고 기도해야 할 여백이지, 타협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 구습으로 회귀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1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이 구절을 보니 또 다시 쓴뿌리가 되살아납니다.
에스라가 인솔하는 제 2차 포로 귀환 때 약 5,000명 정도의 귀환 인원 중에 레위 지파 사람들은 빈약하게 그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레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먹고 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전 관리를 해야 하는 레위 사람들이 없는 귀환은 의미 없다는 것을 안 에스라는 간신히 가시뱌 지방의 두목인 잇도에게 하소연을 한 끝에 38명의 레위인들을 극적으로 모집했고, 그들을 설득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음을 지난 강해를 통해 살폈습니다.
더불어 이들 일행은 성벽 봉헌식때에 하나님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은 물론, 유다 전역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다시 십일조와 첫 열매를 드림으로 성전 제사와 관리라는 본연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으로 여기고 바사에 돌아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느헤미야는 그토록 성전 관리와 제사 섬기기에 최선을 다했던 자들이 성전에서 보이지 않고 모두가 지역으로 도망가 이전의 망가졌던 상태로 급 후퇴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서 읽은 본문 10절에 기록된 한 구절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레위 사람들은 기업으로 밭을 받지 못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들이 도망간 밭은 어디일까?
소형근 박사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여호수아 21장에는 가나안 땅의 모든 분배가 끝나고, 레위 지파 사람들을 위한 몫이 지불되는 데, 하나님은 레위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주셨다. 하나는 그들이 거주할 성읍과 다른 하나는 농사할 수 있는 목초지였다. (수 21:3) 목초지라는 단어 히브리어 ‘미그라쉬’는 도시 변두리에 있는 풀을 뜯을 만한 땅을 의미한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지파에서 제공한 성읍들에 거주하면서 성소 예배를 담당했고, 목초지는 소작농들을 활용하여 농사하게 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부재를 틈타 유다 백성들이 레위 사람들에게 주던 십일조를 끊어버리자, 결국 자신들의 목초지 즉 ‘밭’으로 가버린 것이다.” (소형근,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주석- 느헤미야』, 214쪽)
우리가 이미 살폈던 느헤미야 10:37절을 보면 회심의 은혜를 받고 성벽 봉헌을 앞둔 유다 공동체가 하나님과 느헤미야에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에게 산물의 십일조를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바사로 잠시 귀환을 한 그 틈을 타 도비야와 엘리아십 일당이 다시 하나님 신앙을 무너뜨리고 세속주의를 창궐하게 하는 악을 행하자 예루살렘에 거하는 거민은 물론, 다른 성읍에 거하던 이스라엘 무리들도 무너져 다시 십일조를 끊고 옛 구습으로 회귀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 중심의 성전 종교는 다시 무너져 내렸음을 10-11절이 보고합니다.
돌아와보니 이렇게 참담하게 무너진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상태를 보고 무서우리만큼 치열하게 느헤미야가 다시 반응한 일을 본문 11-1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느헤미야는 대단히 단호했습니다.
무섭도록 치열했습니다.
11절에 기록된 대로 민장(지도자)들을 불러 ‘꾸짖었다’고 보고한 히브리어 ‘루브’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멱살을 붙잡고 뒤흔들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느헤미야가 분노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다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무너진 십일조 사역을 다시 세웁니다.
십일조 사역을 다시 회복한 느헤미야는 밭으로 도망갔던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서 성전 관리와 제사의 자리로 원상회복시킵니다.
그런 뒤에 다시는 직업적인 제사장들이나 그들의 패거리였던 도비야 일당들이 성전을 넘보지 못하도록 성전 곳간을 관리하고 경계할 제사장을 다시 세우고, 청지기들을 다시 임명합니다.
느헤미야가 발휘한 일련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무너져 내린 하나님 중심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다시 원래의 하나님 중심의 신앙체계를 회복한 느헤미야의 마지막 행동을 살펴보십시다.
본문 마지막절 14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일사천리로 진행된 영적 회복 사역을 마치고 느헤미야는 하나님 전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하니님께 이렇게 아룁니다.
‘메시지’ 번역으로 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이 일로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성전과 예배를 위해 헌신적으로 행한 이 일을 잊지 마십시오”
느헤미야가 얼마나 무서우리만큼 두렵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집중했는지를 보여주는 압권의 장면입니다.
사역을 위해 기도했던 느헤미야 사역을 감당하고 난 뒤에 다시 하나님께 엎드리는 모습은 감동의 감동을 줍니다.
무서우리만큼 치열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신앙적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틈새를 주지 않는 느헤미야의 영성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송년주일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유명 연예인이 선택한 극단적 선택은 내내 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짓눌렀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어떤 물리적 압박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공인의 죽음 앞에서 목사로 살고 있는 저는 왠지 모를 도의적 책임이 있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쓰리고 쓰렸습니다. 
어떤 지성인이 이런 말을 남긴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픔을 남기고 죽은 자보다 더 불행한 자는 그 죽은 자를 보내야했고, 또 그의 남은 삶까지 짊어져야 하는 살아 있는 자다. 그가 진짜 죽은 자이기에.”
이 갈파가 이번 사건을 보면서 더 실감나는 이유는 무엇일까도 성찰해 보았습니다.
진정성을 갖고 남게 된 유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마음을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현직 목사로 살고 있는 저는 목사이기에 어쩔 수 없이 목사의 멘트를 남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소개했던 하비 콕스를 다시 소환해 적용한다면 우리들이 발을 딛고 있는 이 땅 즉 세속은 아프더라도 우리가 품고 가야 하는 애증의 대상입니다. 
이번에 유명을 달리한 고인이 발을 딛고 있었던 그 세속은 고인이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은 그가 딛고 있었던 땅 즉 세속은 이미 세속주의로 진하게 물들어 있는 땅이었기에 무자비했습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미쳐가고 있는 무자비한 세속주의의 동굴 안에서 고인이 뛰쳐 나왔다면 이렇게 가슴 아픈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목사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자괴감이 제게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때늦은 후회를 수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도록 분투하는 세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보루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탄의 세력인 세속주의가 교회를 그냥 놔둘 리 없습니다.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고 또 공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면 안 됩니다.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성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2023년 송년 주일에 예배에 참석한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무서우리만큼 치열해야 합니다.
조금의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주일은 10여 년전에 읽다가 말문을 새겨 놓았던 아이든 토저의 또 다른 불의 사자후가 나를 때리고도 남아 전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대충대충 넘어가는 이 시대에 내가 미쳐야 한다면, 나는 올바른 방향으로 미치고 싶다.”(아이든 토저, 『세상과 충돌하라』, 규장, 119-120)
올바른 방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말씀의 방향 말고는 없습니다.
이 영적 자존감에 붙들려 무서우리만큼 치열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랜덤의 시대를 살아내는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