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대림절 네 번째 주일: 느헤미야 41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12:44-47 제목: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서론)
도서출판 IVP에서 금년 초, 『목사가 목사에게』라는 제하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15명의 지명도 있는 목사들이 제자들이나 혹은 선배 목회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 모음인데 년초 책을 읽다가 베이직 교회 조정민 목사가 스승이자 영적 멘토였던 고 하용조 목사에게 보낸 글 마지막 부분에 밑줄을 그어놓았습니다. 오늘은 그 글의 원문 그대로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목사님! 편지를 이만 줄이기에 앞서 이 말씀만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갓 문턱을 넘어온 새신자의 질문에 솔직히 답해 주셨던 내용입니다. “목사님,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요… 교회는 제도되기 직전까지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목사요… 목사는…괴물입니다.” “목사님께서 가르쳐 주셨으니 결코 두 가지를 잊지 않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걷겠습니다. 베이직 교회는 제도가 되지 않을 겁니다. 제도가 되기 전에 다 흩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괴물이 되지 않을 겁니다. 괴물이 될 만하면 주님께서 바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 목사님께 감사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도 달리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 감사합니다. 곧 뵙겠습니다.” (『목사가 목사에게』, IVP, 24-25쪽)
아내가 이단에 빠진 줄 알고 조사하기 위해 염탐하러 온 조정민 기자(당시는 MBC 기자)가 이후에 하용조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였다는 사실을 그의 간증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글의 내용은 조정민 기자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하용조 목사에게 양육을 받으면서 주고 받은 대화로 여겨지는 글입니다. 조 목사의 이 까칠한 질문에 대답해 준 故 하용조 목사의 말은 당신의 목회철학이었기에 그분의 영향을 받고 목사까지 된 조정민 목사의 글은 그에게는 대단히 엄중한 신앙고백일 것입니다. 물론 독립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독립교회 연합회에 속해 있는 베이직 교회와 그 교회 담임목사이기에 이런 개방적인 사고와 목회를 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교단에 속해 있는 우리 교회와 같은 개교회와 목사가 그대로 조목사의 목회적 방향성을 따라한다는 것은 극히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라는 정체성은 제도가 되기까지만 교회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고 표현한 하 목사님의 가르침은 대단히 중요한 교회론의 핵심적인 기초라고 할 수 있기에 저 또한 밑줄을 그은 것입니다.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는 말은 대단히 큰 영적 여운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이지 조직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도 새겨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함의가 들어가 있는 명제입니다. 그러나 조 목사가 제시한 또 하나의 질문에 답한 하용조 목사께서 행하신 답변은 세인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현직 목사인 제게 참 많은 울림과 타격을 준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는 괴물이다.” 아마도 하용조 목사는 이 답을 말하면서 대단히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희 통합측에 속한 목사 중에 교회 규모나 예산으로 가늠할 때 전국교회에서 다섯 손가럭 안에 들어가는 대형교회에서 목회를 한 담임목사가 “목사는 괴물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기실,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편타당한 세속적 이론으로 접근할 때 대형교회 목사의 자화상과 이미지 평가는 대단히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목사는 괴물이다.”라고 언급한 것은 자책골을 넣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자살골을 넣는 듯한 발언을 한 하용조 목사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당신은 대형교회 목사로 살아왔던 내내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드웨어적이고, 소프트웨어적인 목회적 압박에 시달려왔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진단하는 것은 하용조 목사께서 대형교회 담임목사로서 당연성, 마땅함이라는 기득권적인 누림을 즐기며 산 자가 아니라는 예상을 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괴물로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대형교회 목사로 서 있지만 결코 괴물이 되지 않으려는 처절하고도 치열한 목회자로 몸부림쳤던 하용조 목사의 내공을 조정민 목사의 글에서 엿보게 됩니다. 상식을 존중하고 상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목사와 교회는 괴물로 되어가는 것에 맹렬히 투쟁합니다. 적어도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목회자의 기본적 사고이자 사유입니다. 오늘은 성탄절을 앞둔 대림절 마지막 네 번째 주입니다. 절기에 따라 절기 설교를 준비하려고 수요일까지 마음을 먹었다고 수요일 설교 사역을 마치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대로 느헤미야 강해를 연속적으로 진행하기로 말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 느헤미야 강해 텍스트는 원래대로 진행하면 순서에 따라 느헤미야 역사서의 마지막 장인 13장을 들어서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주일에 지난 주에 보았던 텍스트를 한 번 더 살피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본문에 기록된 오늘 설교 제목 구절때문이었습니다.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이 구절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구절로 주께서 조명해 주셨기 때문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더불어 성탄의 계절에 교우들과 이런 시즌에 한 번 즈음은 공유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본문을 한 번만 더 공부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론)
여러분은 세인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에 대한 진정한 즐거움과 감사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본문 여행을 다시 떠나봅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설교를 통해 성벽 봉헌예배를 드리는 날, 예루살렘 성읍을 비롯하여 유다 전 성읍에 거주하던 포로 귀환 공동체 지체들이 봉헌식에서 그 동안 고의적으로 혹은 무지해서 방관하고 있었던 율법에서 명령했던 거제물의 처음 익은 첫 열매와 십일조를 가지고 나와 성전 곳간에 드림으로서 텅비어 있었던 성전이 채워짐으로 말미암아 그 재정으로 제사장, 레위 사람들, 성전 예배의 찬양대원들의 삯을 주게 되었음을 살폈습니다. 먹고 살 것이 막막했던 성직 반열의 지도자들이 이것으로 인해 본인들의 고유한 사역에 집중할 수 있게 되자 성전 제사는 다시 활성화되고, 예루살렘 신앙공동체가 나름 든든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음도 나누었습니다. 이런 해석에 따른 본문 주해를 지난 주일에 나누었습니다. 지난주일 비정상적인 신앙의 궤도를 바로 잡아 정상적인 궤도로 진입하는 것이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에 집중하다보니 한 가지 곁가지로 묻어져 강조되지 못했던 또 하나의 교훈을 오늘 주일 설교를 통해 찾아보려고 합니다. 다시 44절을 읽겠습니다.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포로에서 돌아와 유다 성읍에 거하던 일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 속한 자들이 잃어버렸던 첫 열매와 십일조 회복이라는 영적 회복을 이루게 된 동기를 44절 후반절에 보고하고 있습니다.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이 구절을 몇 개의 한글 번역 성경 버전으로 살피겠습니다. 표준새번역입니다. “백성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준 몫] 그 날, 사람들은 헌납물과 처음 거둔 소산과 십일조 등을 보관하는 창고를 맡을 관리인을 세웠다. 유다 사람들은,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고마워서, 관리인들을 세우고, 율법에 정한 대로,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돌아갈 몫을 성읍에 딸린 밭에서 거두어들여서, 각 창고에 보관하는 일을 맡겼다.” 공동번역입니다. “그 날 헌납물과 맏물 곡식과 십분의 일세 보관 창고를 관리할 사람들이 임명되었다. 그들은 사제와 레위인들 몫을 법에 있는 대로 성읍들에 딸린 밭에서 거두어들여 각 방에 보관하는 일을 맡았다. 유다인들은 사제나 레위인들이 일을 보아주는 것이 고마웠던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또 그 날에 예물과 첫열매와 십일조를 보관하는 성전 창고를 맡을 사람들을 뽑아 각 성의 농가로 돌아다니며 율법에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몫으로 규정한 것을 거두어 창고에 들여놓도록 하였다. 이것은 모든 유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좋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같은 날, 그들은 제물과 첫 열매와 십일조를 보관할 창고를 맡을 사람들을 세웠다. 그들은 계시의 책에 명시된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몫을 각 성읍에 딸린 농지에서 들여오게 했다. 유다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섬김을 감사히 여겼다.”
4개의 버전을 보았는데 다시 복기하겠습니다. 고마웠다. 고마웠다. 좋게 생각했다. 감사히 여겼다. 저는 이 네 개의 동사에서 오늘 설교의 레마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 신앙의 회복은 당연하게 여김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소개한 한글성경 번역판 중에 네 번째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에 담긴 동사에 주목합니다. 포로공동체 유다 거민들이 다시금 율법에 기록된 물질적인 헌신을 다짐하고, 회복하겠다고 결심하여 첫열매와 십일조를 드린 이유는 주의 종들에 대한 감사때문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원초적인 이유는 레위 지파의 와해 때문이었습니다. 레위 지파의 와해는 유다 전 공동체의 공동의 죄로 시작되었습니다. 물질적인 부담을 짊어짐으로서 성전 공동체를 책임지는 지파를 세워가는 일을 무시하자 이스라엘 공동체는 제사를 방치하기 시작했고, 제사가 무너지자 하나님 신앙이 무너졌으며, 하나님 신앙이 무너지자 이방 공동체의 우상들을 섬기기 시작했고, 이런 망가짐은 곧바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레위 지파를 무시했던 이스라엘은 무너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벽 봉헌식 예배에서 이런 죄악을 직시했던 포로공동체는 레위 지파를 존중하기로 결심했고 그 결심은 율법에서 제정한 십일조 정신의 회복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이 회복은 유진 피터슨의 번역대로 레위 지파, 제사장 지파에 대한 감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건강한 개신교회의 정체성은 주의 종과 성도들과의 관계가 어떠냐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닙니다. 빌립보서 1:3-8절을 소개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바울이 빌립보 공동체에 있는 교우들에게 이 편지를 작성했을 때는 안락하고 편안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제 2차 선교 사역을 감당했을 때 결과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주목할 것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지속적인 선교 사역을 이어갈 때 끝까지 바울을 위해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그를 위해 중보하며 지속해서 도왔던 유일한 교회라는 점입니다. 이런 유대적인 친밀감과 신뢰 관계를 갖고 있었던 교회이다보니 빌립보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은 당연히 애틋했습니다. 로마에 감옥에 수감되어 자유롭지 못하고 앞날도 불투명한 바울이었지만, 자기를 위해 중보하는 공동체 지체들을 향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⓵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다. ⓶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 ⓷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사랑한다. 이 세 가지의 이유로 바울이 행한 실천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1:4절을 다시 복기합니다.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그렇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고, 마음에 두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했기에 기쁨을 갖고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왜?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주의 종이라면 섬기는 공동체를 위해 마땅히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지체들을 향한 감사입니다. 지난 주간, 제천 날씨는 제천 날씨를 했습니다. 평균 기온 영하 13도, 체감 온도 영하 23도였다는 기상청 글을 보았습니다. 가히 살인적인 추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권사님들은 중무장을 하고 새벽 예배당에 나와 기도의 불을 끄지 않는 동역자들로 서 주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은퇴하게 된 향후 6-7년 후에, 지난 주간에 새벽 예배를 사수한 노 권사님들이 이 땅에 계속 존재하리라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제천이라는 추운 도시에 살면서 세인 교회를 섬기는 노 권사님들의 면면을 보면, 주의 종은 이런 생각과 감사가 여울집니다. 저들을 섬길 수 있어서 감사하고, 저들의 남은 여생을 부족한 종이 책임져야 한다는 영적인 오기가 제게는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 감사가 오롯합니다. 이제 여러 교우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세인 교회를 섬기고 있는 주의 종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까? 예루살렘 성벽 봉헌 예배에 그동안 고의적으로 무시했던 십일조를 들고 나와 하나님께 봉헌한 그 이유가 성전과 성벽을 관리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를 맡은 레위인들에 대하여 감사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피력한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여러분은 세인 교회를 섬기고 있는 주의 종에 대한 감사가 정말로 있습니까? 어제 얼굴 책에 올린 글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목사로 산다는 것은?
2008년에 아버님이 소천하셨다. 직전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한지 만 3년이 지난 시기였다. 허나, 하나님께서 아버님을 부르신 날이 금요일이라 난감했다. 누님과 형님들은 목회자가 아니기에 목사가 얼마나 현장에서 긴장하며 사는지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해서 목사로 살고 있는 막내인 나로서 금요일에 소천하신 아버지의 장례 일정이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목사인 내가 양보할 수 있는 것은 마지노선이 있었기에 누님과 형님들에게 사일장(四日葬)을 조심스럽게 제안했고, 그러지 못할 경우, 상주로 불효를 범할 수밖에 없음을 표했다. 너무 감사하게도 누님과 형님들이 내 입장을 이해해 주어 상주들로서는 이래 저래 힘든 일이었지만, 4일장을 합의하고 월요일에 은혜롭게 아버님을 하나님 나라에 파송할 수 있었다. 금요일, 토요일에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인천 장례식장에서 상주 본연의 일을 감당했다. 장례식장에서 빈 시간에 최선을 다해 설교 준비를 했고, 토요일 늦은 밤에 제천으로 내려와 주일에 맡겨진 예배 인도를 최선을 다해 감당한 뒤, 다시 늦은 주일에 인천으로 올라가 아버님의 장례를 감당했다. 당시 섬기던 교회에서는 몇 몇 지체들이 뭐 그렇게까지 유별나게 하느냐고 핀잔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현직 목사로 살아가는 자만이 느끼고 체감할 수 있는 영적 무게감과 목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자존감을 그들이 알 리 만무다. 금요일 부교역자가 조부상을 당했다.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부교역자가 성장하면서 기대며 자라왔던 중심축은 조부, 조모였다는 느낌을 종종 느꼈기에, 할아버지의 소천이 주는 충격이 부교역자에게 느껴졌다. 마침 돌아가신 날이 금요일이었기에 내게 자문을 구하기 위해 장례예배와 일정에 관한 지시를 기다리는 부교역자에게 조금은 섭섭하게 들릴 것은 알았지만,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김 전도사, 금, 토요일 손자로서 효도하고 돌아와 주일 예배 섬김에 착오없도록 해라. 그게 목회자의 삶이다. 더더군다가 성탄주일, 성탄축하의 밤, 새벽송 그리고 익일에 드려지는 성탄절 예배까지 연어어 사역이 있는 기간이라 어쩔 수 없으니 주일 예배에 집중해라.” 맘 같아서야 모든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나 싶지만, 성탄주일이 겹쳐지는 시기의 막중함은 물론, 교역자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 자존감과 역할에 빈틈을 보이지 말라고 권했다. 이 상황이 조부가 아니라 친부라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오래 전, 언젠가 목사라는 직을 갖고 있기에 목을 걸고 헌신하다보니 영육이 매우 지쳐 있는 내게 그 일을 알고 있던 한 지체가 내가 대단히 냉정하게 말했다. “목사님, 그렇게 하는 건 너무 당연합니다. 목사님은 그게 직업이니까요?”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목사는 그렇게 상투를 잡는 이가 무서워 직업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 목을 거는 것이 아니다. 목사로 그렇게 하는 것은 주 예수께서 나를 위해 버리신 그 사랑이 목에 겨워 드리는 삶의 고백이자 반응 때문이다. 목사가 직업이라면 나는 벌써 목사의 직을 내려놨다. 적어도 내게는 이 자존감이 나를 목사로 살도록 잇대는 아딧줄이다. “나같은 것을 목사로 부르신 그 사랑이 나를 꼼짝 못하게 한다.” 내가 걸어야 했던 길을 똑같이 걸어가야 하는 부교역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화살기도 해 본다. 월급을 받는 직업인이 목사니까 지금 목회자가 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공동체에 감사와 기쁨은 없습니다. 거기에 영적인 회복과 감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가 교우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이 마땅히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교우들도 목사의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목사와 교우들이 함께 나누는 사랑의 언어와 행동들이 본문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포로공동체의 유다 백성들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사역에 감사했기에 즐거워했던 것처럼 그런 관계가 형성되는 내용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이자, 성탄주일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우리 위해 오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페루의 시성인 세사르 바예흐의 시구처럼 “나는 신이 아픈 날에 태어났다.‘는 정도의 깊은 성찰과 은혜에 감사를 할 줄 아는 자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담임목사는 세인 교회를 섬기게 된 것에 대하여 진정성을 갖고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당연하게 주어진 일이라고 1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강단에서 내려오는 날까지 바울의 심정을 갖고 세인교회를 섬길 것입니다. 세인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주의 종의 사역에 대해 즐거이 감사하고 있습니까? 이강덕 목사가 세인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해야 하는 일입니다.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는 자화자찬이라고 오늘 설교를 받는 이가 있다면 대단히 유감입니다. 이 관계를 다시 한 번 설정하는 것이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감사해야 하는 절기로 믿어야 하는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찬양을 감사절인 아닌 성탄절기에 드리는 것도 유의미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은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