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약속합니다. (4)2024-03-07 17:18
작성자 Level 10

2023년 11월 1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36번째 강해)

 

본문느헤미야 10:39

제목약속합니다. (4)

 

서론)

 

수문 앞 광장에서 영적 부흥을 경험한 예루살렘 귀환공동체는 야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신앙의 회복을 상기했고 선조들처럼 이것들을 다시는 망각하지 않고 반드시 지키겠다는 약속에 서명했는데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그 약속한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나누었습니다.

⓵ 이방인들과 통혼을 금지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⓶ 안식일과 안식년을 철저히 지킬 것을 약속했습니다.

⓷ 성전세의 성실한 납부첫 열매를 드리는 것제사에 필요한 나무가 끊어지지 않도록 공급할 것더불어 십일조 생활도 다시 철저히 회복하겠다고 약속함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을 다시 되찾을 것을 엄숙히 약속했음도 살폈습니다.

오늘 주일 설교는 이렇게 하나님께 약속했던 포로 귀환공동체의 내용을 마지막으로 살핌으로써 10장 강해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오늘 10장 마지막 설교가 교우들에게 또 다른 영적 도전과 감동으로 접목되기를 기대합니다.

 

본론)

 

본문을 읽겠습니다.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귀환공동체가 다짐하며 약속한 마지막 내용은 대단히 결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떤 약속이었습니까?

구절을 문자적으로 설명한 소형근 박사의 해석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은 성전에 있는 방들창고들을 아무 쓸모 없이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현이면서희생 제물십일조와 첫 열매와 곡식과 새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으로 가득 채울 것이라는 다짐이기도 하다.” (소형근, “연세신학백주년 기념주석-느헤미야”, 174)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는 결연함이 엿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들의 상실이 민족 멸망이라는 비극의 단초가 되었음을 귀환공동체가 절절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약속의 기초로 삼고 또 다른 접근을 하나 하겠습니다.

39절 본문의 신학적 의미입니다.

“10장에서 다룬 혼합 결혼안식일 준수성전에 드린 나무성전에 바친 첫 열매레위인의 십일조성전에 대한 소홀함의 문제 등등의 주제는 13장에도 다시 등장합니다그래서 13장을 읽으면 왜 이 같은 서약을 공동체가 다짐하며 맹세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자신들의 삶이 분주하고 자신들의 욕망이 우선 사항이 되다 보니성전 제사는 자주 소홀해지곤 합니다그러나 성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민족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입니다그렇기에 우리가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는 마지막 선언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확고히 하겠다는 다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근주,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 119)

저는 김근주 박사가 풀어놓은 본문 39절의 해제가 아주 의미 있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성전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은 단지 성전을 청소하고정돈하고 깨끗하게 하는 차원의 선언이 아니라 우리들(포로 귀환공동체)의 정체성을 열방에 선포하는 신학적 행위라는 해석이 명쾌하게 다가왔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모세와 맺은 언약다윗과 맺은 언약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한 분이신 하나님이며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언약의 파기를 이스라엘이 먼저 자행했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멸망 당했습니다.

하지만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공동체는 광장에서 부흥을 경험한 뒤에 언약을 상기했고이 언약의 상기와 다시 지키기로 결심한 내용이 바로 느헤미야 10장 메시지들이었습니다.

결국 다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며잃어버린 이스라엘 정체성 되찾기 선언이 본문 39절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이 길로 회복하기 위해 포로 귀환공동체가 결심한 내용이 바로 성전 사랑이었습니다.

성전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약속했던 내용 그대로 물질적인 것을 정직하게 회복함으로써 레위 자손들제사장들그리고 노래하는 성가대원들의 삶이 어렵지 않도록 할 것을 다짐합니다.

하나님의 전을 지극한 마음으로 돌볼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설교를 듣고 있는 지체들에게 영적인 부담감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불편한 메시지를 전할 것입니다.

말씀을 뱉거나 토해내지 말고 쓴 말씀이라도 능히 삼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전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폐쇄적인 공간이었던 성전을 섬기는 시대가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이루셨던 성전 휘장이 찢어진 이후 시대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가시적 건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시대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되는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들이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고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미를 배우며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고 체휼하도록 하나님께 한시적으로 허락하신 믿는 자들이 함께 교제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이 공간을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교회 예배당입니다.

세인 교회 예배당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세인 교회를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이 윤허하신 세인 예배 공동체를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우리들이 함께 영적인 은혜를 나누고 있는 공간인 세인 교회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입니다.

책에서 이 글을 읽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인 키프리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삼지 않는 한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삼을 수 없다.”(최영식, “기도가 먼저다”, 홍성사, 245)

너무 적확한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머니에게 효도하지 않는 인간이 아버지에게 효도할 리 없습니다.

너무나 선명한 명제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성입니다.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MA(신학석사과정을 이수할 때 목회현장론이라는 세미나를 수강했습니다.

당시 이 과목을 강의하던 교수님은 직전 총회장을 역임한 선배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날 선배께서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전해주셨던 일화를 또렷이 기억합니다.

선배가 섬기는 교회에서 전국에 있는 미자립 교회를 선정해서 50개 교회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전라남도 목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모 섬 교회도 50개 교회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선배 목사님은 단순히 선교비를 지원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그 교회에 신자들을 데리고 방문해서 격려하고 기도해 주는 사역도 병행하셨는데 어느 날 전라도에 있는 교회를 예고 없이 방문했습니다.

방문한 날은 평일이었는데 선배께서 교회에 도착한 그 시간교회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담임목사 사택도 비어 있었습니다.

교회는 잡풀로 우거져 있었고 금방이라고 허물어질 것 같은 교회 예배당은 눅눅하고 습기가 차 곰팡이들 천지였습니다.

아픈 마음을 갖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더니 곱사등을 한 노파 한 명이 예배당에서 절규하며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우리 교회를 정말로 사랑하는 목회자를 보내주십시오교회를 사랑하는 목사님을

노파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선배께서 노파에게 인사를 하고 질문했습니다.

할머니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 안 계신가요?”

그러자 노파가 노기 어린 톤으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있으면 뭐 합니까육지에 있다가 토요일에 한 번 들어오는 목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담임목사는 자녀 교육섬 생활의 열악함 등을 핑계로 목포에 살림집을 따로 만들어 놓고 토요일에 들어와 간신히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다시 도시로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배는 강의 중에 이렇게 표하며 통탄했습니다.

왜 그 자는 목사가 되었지교회 예배당은 완전히 폐허처럼 버려두고 자신의 가족들만을 위하여 안락하게 살아가려면 차라리 목사 가운을 벗어야지 왜 아직도 목사로 살고 있단 말인가!”

다른 예도 있습니다.

같은 전라도 목포에서 배를 2시간 정도를 타고 들어가야 도착하는 섬에서 목회하는 동기 목사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원하는 말도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멤버십은 평균 연령이 80세가 된 노인이 채 10명이 안 되는 전형적인 섬 교회입니다.

친구 목사는 그 교회에 부임하여 머슴으로 살고 있습니다.

친구가 그렇게 목양하는 이유는 말도 교회를 섬기는 노령의 권사님들의 삶을 보아서입니다.

이대로라면 적어 10년 안에 말도 교회는 신자가 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말도 교회를 지키는 권사님들은 100% 예배에 출석하는 신자들입니다.

거의 구십이 된 권사님은 고관절이 탈이 난 권사님입니다.

해서 어딘가를 가려면 앉아서 이동하고 생활하는 권사님입니다.

말도 교회는 섬에서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런데도 권사님은 예배 출석 100%입니다.

교회까지 기어 나오시면 친구 목사가 권사님을 부축하고 안고 예배당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감격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 권사님의 마지막 소망이 하나 있습니다.

말도 교회 예배당 안에서 기도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 권사님의 영원한 기도 제목변하지 않는 기도 제목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우리 말도 교회를 부흥시켜 주세요.”

전라남도에 소재하고 있는 두 교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 차이는 오늘 본문 마지막 39절에서 엿볼 수 있는 영적인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 끝까지 교회 사랑하기라는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시편 122:1-6절을 소개합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이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가세할 때내 마음 기뻐 뛰었네마침내 당도했네예루살렘,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왔도다예루살렘견고한 성예배를 위해 지어진 도성 모든 지파들이 올라오는 도시하나님의 지파들이 모두 올라와 예배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드리는 곳이스라엘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바로 이곳에 의로운 판결을 내리는 보좌가 놓였네저 유명한 다윗의 보좌가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여라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이여모두 흥하여라

메시지’ 번역을 읽다 보면 예루살렘으로 표현된 공간적인 장소를 이렇게 패러디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예루살렘이 바로 교회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모두가 흥하여라

무당들이 행하는 푸닥거리가 결코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선포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이여복되기를 바란다.”

2024년도 우리 교회 표어를 이렇게 정했습니다.

사랑하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교회

성서적 근거는 요한복음 13:1절로 정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이 이렇게 우리들을 사랑하셨다면 우리들도 마땅히 이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교회 사랑은 상황에 따라 변경되거나 변질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말라기 1:6-10절을 조금 길지만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읽어보겠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주전 5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포로귀환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선민공동체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전 사랑을 결연하게 약속했던 이들의 약속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예언서 말라기의 저술 연대를 주전 450-430년 사이로 보는 데 큰 이견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성전 봉헌 직전이라고 전제할 때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 완공이 주전 515년이었으니까 말라기 예언서에서 직격하고 있는 포로 공동체의 신앙적 와해는 오늘 본문을 기점으로 볼 때 불과 짧게는 65길게는 85년 정도가 지난 시기입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실망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눈먼 희생제물들이었습니다.

저는 것을 드렸고병든 것을 드리는 악행을 자행했습니다.

그러고도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냐고 따집니다.

하나님은 기가 막혀 이렇게 예언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명심하십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그분의 아들을 통해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한시적인 활동이나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나는 끝까지 세인 교회를 사랑하는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토요일 새벽예배를 마치고 계단을 물걸레로 닦는 노 권사님들을 볼 때마다 고개를 숙입니다.

반면젊은 층의 지체들이 버젓이 그 봉사의 사랑을 받고만 있는 것을 보면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는 가슴이 아프며 분노스럽습니다.

세인 교회사랑은 누가 하는 누구의 몫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같이 해야 하는 몫입니다.

오늘 주보에 실린 목양터 이야기 마당의 감동은 매번 하는 사람만 주는 감동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함께 해야 하는 감동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본문 39절 하반절의 약속이 끝까지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 가슴에 새긴 주의 십자가 사랑/나의 교회를 사랑케 하네

주의 교회를 향한 우리 마음/희생과 포기와 섬김과 고난

하물며 죽음조차 우릴 막을 수 없네/우리 교회는 이 땅의 희망

교회를 교회 되게 예배를 예배 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성령 안에 예배하리라 자유의 마음으로/사랑으로 사역하리라 교회는 생명이니

교회를 교회 되게 예배를 예배 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우릴 사용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