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35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10:31-39 제목: 약속합니다. (3)
서론)
아직 코로나 바이러스의 종말이 왔다고 보기에는 섣부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역시 지난 10월에 두 번째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고, 아직도 백주에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있기에 우리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말하기는 궁색해 보입니다. 다만 전 국민의 96%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갖고 있기에 초기보다 덜 심각하다는 정도이지, 엔데믹을 선포하는 것은 아직도 요원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난 3년 혹은 2023년에 이르는 4년까지 교회는 코로나 바이러스 공격으로 인해 그로기 상태에 직면했습니다. 각 리서치 결과물에 의하면 코로나 발생 이후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교세가 약 30%가 줄었다는 보고를 이구동성으로 내놓은 것을 보면 여타 다른 인간 공동체에 비해 교회 공동체가 코로나로 인해 받은 타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했고, 2023년도에도 그 후유증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심대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저 역시 지난 3년 간 우리 세인교회에 불어닥친 코로나 공격으로 인해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적지 않은 곤혹을 치르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어떻게 하든 코로나 이전의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를 고민하며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지금 맞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래,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라고 외쳐도 이 소망이 달성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고통이 엄습했지만 이런 고통의 터널에서 오래 머무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자위도 해 봅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떨어져 나간 이들은 코로나가 없었어도 그 수준에 딱 머물 자라고 자위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위 안으로 나를 강제적으로 이끌어 보아도 벗어날 수 없는 영적 멍에가 여전히 있다는 것 때문에 정말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교회가 이렇게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명목적인 신자들을 만든 공범이라는 고통입니다. 내가 목회를 하면서 섬기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밑힘이 있는 공동체로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이 목사인 제게 죽비가 되어 내리치고 있어 참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괴감으로 인해 계속해서 내 신앙과 목양의 그래프를 다운 그레이드만 하도록 내 버려둘 수 없는 일인 것을 알기에 이 무력하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지? 물으며 민감하게 투쟁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와중, 오늘 본문을 주어진 강해 스케줄에 맞추어 해석하고 교훈받는 일을 시도하다가 적지 않은 도전을 받게 되어 너무 감사했습니다. 지금부터 제게 임한 감사의 내용들을 교우들과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10장 강해에 들어서면서 귀환 공동체 지체들이 영적인 부흥을 경험한 뒤, 성전 혹은 성벽 봉헌에 앞서 야훼 하나님께 다시금 마음의 끈을 동여 매면서 약속한 내용들을 살폈고 또 살피고 있습니다. ⓵ 이방인들과의 혼합적인 타협을 결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드렸음을 살폈습니다. ⓶ 안식일과 인식년을 정당하고 바르게 지킬 것을 약속했음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포로 귀환 공동체가 하나님께 약속한 그 세 번째의 내용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본문 32-33절을 주석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⓵ 첫 번째(연이어 적용하면 세 번째) 약속은 성전세의 회복이었습니다. 포로 귀환 공동체가 야훼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성전세 납부를 다시 회복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성전세에 대한 해석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기에 주석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광야 공동체 시절부터 야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율례가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0:13-14절을 읽겠습니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소위 말하는 성전세 제정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 들어 있는 구성원들 중에 20세 이상의 성인들은 성전 관리를 위해 반 세겔을 의무적으로 드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통상 1세겔이라고 하면 20게라를 말합니다. 1게라는 0,6g를 지칭하는 단위이니까 1세겔이면 12g을 말합니다. 20세 이상 된 남자들이 성전을 관리하기 위해 반드시 내야 하는 성전세는 반 세겔이니까 약 6g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포로공동체에 속한 성인 남자가 내야하는 성전세가 원래보다 1/3세겔로 축소되었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4g의 세겔을 내겠다고 약속한 셈입니다. 왜 광야공동체가 약속했던 성전세보다 본문에 주인공들인 포로 공동체가 드린 성전세가 줄었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한데 보편적인 이해로 설명드린다면 느헤미야 시대에 살던 백성들의 경제적인 상황이 열악했기에 그렇게 공동체가 의견을 모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이론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액수의 증액이나 감액이 아니라 다시 성전세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복기한 정신입니다. 이렇게 드린 성전세의 용도는 33절에 기록된 대로 진설병 구입을 비롯하여 일체의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되는 성물들을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 다음의 약속은 본문 34절이 보고합니다. “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시기에 나무를 우리 하나님의 전에 바쳐 율법에 기록한 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에 사르게 하였고” ⓶ 두 번째(네 번째) 약속은 성전에서 사용하는 장작(나무)을 봉헌하기로 약속합니다. 성전에 사용되는 나무 봉헌은 제사장, 레위 사람들까지 다 포함된 명실상부한 포로 귀환 공동체 지체 전체에게 할당된 미션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이스라엘의 제사법은 화제가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동물들을 대속의 제물로 죽여 불태워 향기를 올리는 거룩한 제사에는 반드시 불로 태우는 화제의 형식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소비되는 장작은 성전의 구비물 중에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였는데 포로귀환 공동체가 이 일에 대한 복기를 통해 장작 헌물을 다시 약속한 것입니다. 단순히 장작을 댄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사 회복의 중대성을 깨달았다는 데에 중요한 방점을 찍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본문 35-39절을 조금 길지만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읽어보겠습니다.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이 시사하는 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⓷ 세 번째 (다섯번째) 약속은 첫 열매와 십일조 봉헌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소형근 박사의 주석을 소개하겠습니다. “35절 이하는 ‘맏물’, ‘첫 열매’, ‘십일조’에 관한 규정을 알려준다. 하나님 백성들이 바치는 제물들과 십일조는 일반적으로 성전 예배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하신 일읋 수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맏물’, ‘첫 열매’에 대한 봉헌은 오경에서 자주 언급되던 주제이다.(출 23:19, 신 26:1-5) 이 ‘맏물’과 ‘첫 열매’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드리던 성전 예물들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느헤미야 13:10절은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받지 못해 자신들의 직무를 버리고 밭일을 했음을 보고하고 있다. 이는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신앙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소형근, 『연세신학 백주년기념주석-느헤미야, 173쪽) 소 박사의 주석을 토대로 설명한다면 포로귀환 공동체가 첫 열매와 십일조를 다시 회복하여 온전하게 드리겠다고 선언하며 약속한 것은 단지 물질적인 직무유기를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선민 신앙공동체에게 선언하셨던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혁명적 선언이었기에 이 약속의 재 확인은 엄청난 회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포로 귀환 공동체가 약속한 내용들은 대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봉헌의 인색함을 회복하고 물질적인 헌신을 다시금 재 다짐한 내용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적시된 내용들을 오늘 내게 적용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선포하시는 레마를 단지 물질적인 헌신을 회복하라는 메시지로 받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물론 본문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 느헤미야 기자의 메시지는 물질적인 정직함의 회복이 없는 올바른 회복은 있을 수 없음을 피력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한정한다면 본문을 통해 야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의를 축소하는 누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오늘 본문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의 행위들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되찾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성경적인 내증 하나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사사기 17:7-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유다 베들레헴에서 주거하던 레위 청년 한 명이 고향을 떠나 에브라임 지파들이 우거하는 산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거주할 곳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거류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꾸르’는 ‘나그네, 객’이라는 단어로 번역되는 용어입니다. 레위 사람은 베들레헴에서도 ‘꾸르’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오래버티지 못하고 이번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주거지로 이동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레위 사람이 자꾸 이동했을까요? 레위 지파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업으로 얻은 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레위 지파에게 기업(땅)을 주지 않았습니까? 민수기 18:20-21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그랬습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의 지파공동체가 드리는 십일조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땅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문제는 가나안 초기 공동체시기부터 이스라엘 지파들이 하나님을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가나안의 이방신들을 섬겼고 동화되었습니다. 그러니 광야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셨던 율법 무시는 다반사였습니다. 십일조 생활의 상실,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사시대의 부끄러운 영적 민낯으로 퍼져나갔고, 그러니 십일조를 받아야 살 수 있었던 레위인들은 살 방법이 없어졌고, 이러니 레위인들은 먹고 살 방법을 찾아야 했고, 사사기 17장에 등장하는 레위 청년도 이런 맥락에서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 사설 제사장으로 들어가서라도 먹고 살아야 했던 비극적인 시대가 바로 사사시대였던 것입니다. 왜 이런 슬프고도 아픈 막장 드라마가 펼쳐졌습니까? 하나님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상실은 랜덤으로 사는 것을 용인합니다. 결국 이 랜덤은 민족 멸망이라는 화근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 쓰라림을 맛보고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포로 귀환공동체는 하나님 상실이라는 큰 원인을 제공한 것이 물질적인 타락임을 알고 회개와 회복을 본문에서 약속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면히 선포할 수 있습니다. 성전세의 회복, 제사에 필요한 땔감 나무의 공급, 맏물 즉 첫 열매와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은 단순히 물질의 회심만으로도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더 큰 그림으로 진면교사 삼아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상실했던 하나님 되찾기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원하셨던 일체의 신앙적 초심으로의 회귀를 약속한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2일)에 서울에서 진행된 DPA 포럼에 다녀왔습니다. 2일, 저와 관계된 사역이 세 개가 겹쳤습니다. 하나는 제가 속한 남부지방회 교역자회 가을 야유회가 속리산에서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공식적으로 제게 협조 요청이 온 것은 아니지만 봉양에 있는 축구장에서 한국성결교회 연합회 목회자 축구대회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고 정서적으로 제천 봉양에서 열리는 목회자 축구대회이다보니 제가 가서 얼굴을 비추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교단 사역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DPA 포럼이었습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을 격려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기에 엄습한 목양이 너무 힘든 것을 알기에 조금이라도 힘든 동역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부 지방회에는 전도사님을 보내 찬조금을 전달하게 했고 저는 서울 사역을 행했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아주 가끔은 이런 저런 일들이 겹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결정을 해야 하는 데 조금은 곤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모두가 이해타산이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이런 생각을 떠올립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리고 주님이라면 행하셨을 우선순위에 결정권을 놓습니다. 그때마다 제게 다가오는 소회는 살리는 일이 우선순위라는 소회입니다. 무슨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신자가, 목사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성도와 목사, 그리고 교회에게 찾아온 비극은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우선순위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마음을 잃어버린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습니까? 지난 포럼 주 강사였던 임채영 목사가 아주 의미 있는 예화를 하나 들려주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아빠에게 심각하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아빠, 우리나라는 12간지에 따른 띠가 있잖아요. 그래 있지. 근데 아빠, 우리나라 사람 중에 가장 많은 띠가 뭔지 알아요? 글쎄.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자 딸 아이가 반색하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빠, 아니예요.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은 띠는 쥐띠예요. 그래, 왜 그렇지? 아빠가 묻자 딸아이는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빠, 우리 반은 전부가 쥐띠예요.” 우리는 항상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는 것만을 전부로 생각하고 그것에 올인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 살기로 결단한 것은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마음대로 살겠다는 결단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성전을 세워갈 수 있는 일체의 하드웨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헌금은 맘몬이라는 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물질은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되찾겠다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오늘 귀환 공동체는 이 회복을 약속한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작가 유시민이 쓴 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아니다. 누구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다. 증명할 책임은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다.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었고 종교인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종교는 도덕을 제공하는가? 그렇다. 그렇지만 종교가 없다고 해서 도덕을 세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서로 교류하지 않았던 동서고금의 모든 문명에 비슷한 도덕 규범이 있다. 종교가 없었어도 인간은 도덕규범을 세웠을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인간은 왜 신을 창조했는가? 삶의 유한성을 넘어서려는 욕망을 채우고 싶어서였다. 그렇다면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믿는 자에게 진리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망상이며, 권력자들에게는 유용한 통치도구다.” (유시민,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130-131쪽) 참 많은 현대적 지성들은 작가의 이런 직설적인 표현에 열광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가 일갈한 글을 읽다가 서글퍼졌습니다. 문과 남자로 산 작가가 과학의 입문하면서 직설한 토로들은 오늘을 사는 이 시대에 참 많은 람들을 흥분하게 만드는 토설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타 다른 설교를 통해서 여러 차례 말했던 것처럼, 유 작가의 말대로 만에 하나 하나님이 증명되는 존재라면 나는 그때부터 유 작가가 가고 있는 길을 나도 걸을 것입니다. 왜? 증명되는 존재 정도의 대상은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의 얄팍한 존재론적인 존재를 어떻게 주군으로 모시고 섬깁니까? 아마도 유작가가 제 말을 들으면 궁색한 궤변이라고 또 공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그렇습니다. 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목사가 아닙니다. 해석할 수 없고, 존재를 증명해 낼 수 없는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인 것을 믿는 목사입니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수준과 어떤 대화가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인간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그럴듯한 방법으로 신을 만들어내는 참담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압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만들고 있다고 단언하는 자에 대해서는 유구무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무신론적인 인간관을 가진 유 작가를 비롯하여 수많은 자들은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호흡 자체까지도 하나님이 주시는 ‘루아흐’가 있기에 호흡하고 있는 피조물임에 감사하고 있고 그렇게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 한 가지, 이런 감사가 내게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 증명해 낼 수 없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기적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눈물을 담보한 감사가 내게 적용되고 있다는 신비에 그저 감흡할 따름입니다. 어제 교회 뒤마당에 떨어진 낙엽 하나를 주워보았습니다. 그리고 낙엽을 들고 하나님이 내 곁에서 호흡하고 계심에 감사했습니다. 국립 수목원장을 역임한 나무 박사로 잘 알려진 신준환 박사는 낙엽을 이렇게 설명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단풍이 빛나는 것은 빛이 없어지는 과정이다. 잡다한 고집을 버릴 때 지혜가 빛나듯이 없어지는 것을 알 때 빛이 나는 것이다. 열매도 없고, 할 일도 끝났으니, 광합성 담당자인 엽록소가 없어지고 그 동안 가려져 있었던 카로틴, 안토시아닌 같은 색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초록빛이 없어지고 뒤에 있는 노란색이 드러나며 마치 샘이 터진 것처럼 샛노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중략) 나무는 이렇게 초록빛 영광을 땅에게 돌려주고 추위와 결박 당한 채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성찰하며 생명 현상의 골계미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신준환, “다시, 나무를 보다”, 18-22쪽) 무신론자들은 단풍에 대한 과학적 메커니즘을 연구합니다. 무신론자들은 그것을 이론화시켜 학문적인 공헌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그들이 거기까지 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런 나무의 일생에 대한 창조적인 섭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상실했기에 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분이 들려주시는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낙엽 하나를 집어 들고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당신이 만드신 것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돌보고 있다는 사실에 영적 감동을 받으며 울컥했습니다. 다시 새싹을 돋게 하시기 위해 나무를 쉬게하는 은혜를 느낍니다. 무엇의 차이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려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과 그 분의 마음을 알아 느끼고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자는 다 가졌어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는 없어도 있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 우리도 약속하십시다. 하나님의 마음을 상기하겠다고,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되찾겠다고. 우리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약속의 덕목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있는 어두운 땅에/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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