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21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느헤미야 15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6:1-9 제목: 엎드림이 답입니다. 서론) 일전에 교우들에게 잠시 언급했듯이 제가 운동하는 탁구장에 제천시 1부에 해당하는 회원이 두 명이 있습니다. 저는 3부에 링크되어 있기에 1부 회원들과 매치를 하면 3점의 핸디를 갖고 경기에 임합니다. 다시 운동을 나간 후, 1부 회원들과 경기를 하면 언제나 최종 결과는 거의 패배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들 결혼을 마치고 난 뒤부터 1부 회원과 경기를 하면 거의 대부분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점입니다. 3점의 핸디를 갖고 경기를 하지만 핸디 3점보다 훨씬 압도적인 점수 차로 1부 회원들과의 경기에서 승리를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이런 결과는 지속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1부 회원들과 경기를 할 때 매 번 패배하였던 이유를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서브를 갖고 있을 때 항상 저는 2구를 받으면 수비 모드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부 회원들은 제가 수비 모드로 넘긴 제 2구를 받으면 저를 여지 없이 강타했고 결국 저는 지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아들 결혼이 끝난 뒤부터 패배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 결과, 경기를 하면서 2구를 받을 때 공격형 모드로 전환을 하고 나니 상대방이 3구를 당황하며 받을 수밖에 없어 실수를 연발하고 또 저는 그들의 허점을 이용해 4구 공격을 효과적으로 행함으로 경기 결과를 승리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1부 회원이 제게 농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아드님 결혼식 이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며느리가 탁구 선수 아닙니까?” 조만간 2부 승격의 기쁜 소식을 교우들에게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부 회원의 질문에 제가 이렇게 웃으며 답했습니다. “요새는 탁구공이 크게 보여요. 본론)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은 갖은 음모를 통해서 방해 공작을 폈지만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적인 위기감을 느낀 산발랏 일당들은 이제 공격의 수위를 느헤미야 개인에게 돌려 초점을 맞춥니다. 본문 1-2절을 나눕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이제 유다 예루살렘 성벽 공사는 거의 막바지에 접어 들었음을 저자가 알려줍니다. 두 가지가 보도됩니다. 첫째, 성벽 건축이 거의 완벽하게 진행되어 빈틈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둘째, 성벽 완공의 피날레인 문짝을 다는 일만 마치면 성벽 재건 공사가 마무리된다는 것을 보고합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느헤미야의 대적들인 산발랏, 도비야, 게셈은 더 긴박해 졌습니다. 이러다가는 유다 성읍에 대한 본인들의 영향력이 완전히 물 건너가게 될 것임을 파악한 이들은 최후의 일전을 계획합니다. 이들은 이제 물리적, 심리적 공격으로는 느헤미야의 계획을 막을 길이 없음을 간파하고 유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지도자인 느헤미야를 살해하기로 마음먹고 원점을 타격하기로 결심합니다.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느헤미야의 대적들이 취한 액션은 느헤미야의 살해를 감춘 평화 회담 제안이었습니다. 협상을 하자고 느헤미야에게 스텝들을 보낸 것입니다. 협상 장소는 오노 평지였습니다. 오노는 느헤미야가 거주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더불어 이곳은 산발랏이 통치하던 사마리아 근처였기에 산발랏의 물리력을 동원하기 쉬운 장소였기에 느헤미야를 제거하는 데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표면적인 의제는 평화협상이었지만 그것은 껍데기 명목이었고, 진의는 느헤미야를 살해함으로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무의로 돌아가게 함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챈 느헤미야는 당연히 제안을 거부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소개합니다.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큰 역사는 말할 것도 성벽 재건 사역입니다. 단호한 거부 의사를 밝힌 느헤미야에 대해 산발랏 일당들은 집요했습니다. 본문 4절에 의하면 평화 협상 요청을 네 번이나 지속했음을 보고합니다. “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 나는 꼭 같이 대답하였더니” 하지만 느헤미야는 요지부동, 단호하게 저들의 저의를 알고 거절합니다.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산발랏 일당은 다섯 번째 행동에 나섭니다. 네 번에 걸친 검은 저의가 무산 되자 5번째로 저들이 택한 방법은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여론을 조성하는 검은 공격이었습니다. 5-7절입니다.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지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산발랏 일당은 오노 회담을 느헤미야가 거부하고 임하지 않자 인편으로 인봉하지 않은 편지를 그에게 보냅니다. 그 편지 안에 있는 내용은 날조된 유언비어가 담겨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대 근동에는 두 종류의 법률 문서 작성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문서나 편지를 담은 봉투를 봉하지 않는 법과 또 다른 하나는 반대로 봉하는 방법입니다. 전자는 현장에서 바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고, 후자는 논쟁이 발생했을 때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 보관해 두었던 자료용입니다. 그렇다면 산발랏 일당이 느헤미야에게 보낸 편지의 특성은 현장용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같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 안에 기록된 내용들은 모두가 거짓이며 유언비어였다는 점입니다. 느헤미야가 유다 성벽을 재건하는 목적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와 맞서서 독립을 선포하고 유다의 왕이 되기 위해 성벽을 건축하고 있다는 악의적 유언비어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인 아닥사스다가 임명한 유다 총독이라면 페르시아에 충성해야 하는 고위관리인데 반역을 꾀한다는 역적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유언비어 유포였습니다. 하지만 봉인되지 않은 편지 안에 담겨 있는 유언비어가 날조되었다는 것은 느헤미야가 다윗의 가문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인물이기에 그는 왕족이 아니었기에 전혀 신빙성이 없는 유언비어였습니다. 단지 산발랏 일당이 유다 성벽 재건을 방해하기 위한 또 다른 종류의 공격으로 치부한 느헤미야는 이렇게 반격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말한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빈틈이 없는 일격을 가한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방어적 논리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반대급부를 노린 반격과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요소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마지막 9절에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느헤미야는 적들의 공격이 어떤 공격이든 모든 공격에 대하여 무섭도록 영적으로 통찰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토록 무서운 통찰력을 갖고 유다 공동체를 이끌었을까요? 저는 오늘 느헤미야가 갖고 있는 영적 통찰의 두 가지 내용을 오늘 설교의 레마로 삼고자 합니다. 1) 무서울 정도로 신중한 영적 집중력입니다. 사탄적인 대명사인 산발랏 일당들의 공격은 치열했고 집요했습니다. 포장된 평화른 내세워 느헤미야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펼쳤습니다. 저들의 검고 사악한 음모는 치열했고 집요했습니다. 본문은 강조합니다. 오노에서 평화회담을 갖자고 회유하는 사람을 느헤미야에게 네 번씩이나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합니다. 이 검은 음모가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대적들이 다섯 번째로 자기들의 계획을 실행하는데 유언비어가 담겨 있는 인봉되지 않은 편지를 느헤미야에게 보내 페르시아 당국으로부터 빨간 딱지가 붙게 하여 느헤미야를 공포로 몰아넣음과 동시에 성벽을 재건하는 유다 백성들을 와해시켜 하나님의 일을 무산시키려는 집요한 공격으로 이어졌음을 느헤미야 기자는 보고합니다. 하지만 이런 5번에 걸친 집요한 공격을 느헤미야는 단 한 가지의 방법으로 분쇄합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무서운 영적 집중력입니다. 3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보다 중요한 이슈 혹은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내가 성벽재건이라는 이 사역에 집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유언비어 유포에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9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대적들의 공격은 결코 성벽 재건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집요하게 공격하며 사기를 꺽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공격에 느헤미야는 쫄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라는 하나님이 하명하신 미션에 대한 분명한 집중력으로 대적들의 집요한 공격을 일거에 물리쳤습니다. 느헤미야가 갖고 있었던 분명한 한 가지는 영적 집중력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이라는 화두에 대해 영적 집중력이 흔들렸다면 느헤미야는 본인의 신병은 물론, 공동체가 추진하고 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전 역사를 이루는 일은 온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산발랏 일당이 노렸던 것은 성벽 재건의 역사 중단이었지만,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라는 하나님의 전 역사 말고는 다른 아무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무서운 영적 집중력을 갖고 있었던 지도자였습니다. 지금부터 열왕기하 역사서에 기록된 한 사건을 교우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갈멜에서 거주하던 엘리사는 순회 설교자였기에 이스르엘 지역도 다반사로 다닌 것 같습니다. 특히 엘리사는 그곳의 중심 요충지였던 수넴에 도착을 하면 거기에 거주하던 한 부유했던 여인의 섬김을 받곤 했습니다. 수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협조를 얻어 예언자 엘리사가 수넴에 오면 거처할 처소까지 만들어 제공할 정도였으니 수넴 여인의 섬김은 엘리사에게는 대단히 감사한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때마침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그 섬김에 감사하며 사례를 하고 싶었던 차에 그녀에게 아들이 없다는 게하시의 이야기를 듣고 여인에게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축복하였습니다. 그렇게 예언자의 강복 하에서 이듬해에 수넴 여인은 귀하고 귀한 아들을 정말 얻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소중했던 수넴 여인의 아들은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 수넴 여인에게는 기쁨 그 자체로 성장했습니다. 문제는 어느 날 그 아이가 일사병으로 추론되는 질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는 점입니다. 이 기막힌 일을 만난 수넴 여인은 남편에게 나귀 한 마리를 요청하고 갈멜에 있는 엘리사를 만나고 오겠다고 통보합니다. 월삭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24KM 나 되는 거리를 다녀오겠다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살롬의 인사만 남편에게 남기고 사환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명령을 내립니다. 열왕기하 4:24절입니다.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하고” 오직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목적 하나를 위해 갈멜산으로 가는 과정에서 머뭇거리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렇게 집중하여 갈멜 산에 도착한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만나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합니다. 열왕기하 4:27절입니다.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갑자기 수넴 여인이 엘리사의 발을 붙든 것입니다. 이 행동은 고대 사회에서 대단히 예의에서 벗어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넴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아들의 죽음을 에둘러 말했고 당신이 나에게 예언을 통해 준 아들이 죽었으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압박성 발언까지 하며 본인의 애 타는 심정을 토로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자기의 지팡이를 건네며 수넴으로 가서 아들을 살리라고 명하자, 수넴 여인이 반색하며 선지자가 직접 수넴까지 갈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이어지는 열왕기하 4:30절을 봅니다. “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우리는 이 기사의 결론이 해피엔딩으로 마쳐짐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와 같아 보이는 에피소드의 교훈은 단 한 가지입니다. 아들을 살린 기적은 수넴 여인의 영적 집중력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수넴 여인의 집중력이 아들을 살린 것입니다.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겠다는 의지 하나를 갖고 영적 집중력이 흔들리지 않았던 수넴 여인의 행동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귀감이 됩니다. 지금 나에게 영적 집중력은 존재하는가? 곱씹어야 합니다. 2. 엎드림이라는 집중력이었습니다. 9절 하반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며 엎드렸습니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아무리 대적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격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내 손을 힘 있게 만들어주시면 나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느헤미야는 엎드렸습니다. 성벽 재건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문짝만 달면 성벽 재건의 대업이 완성되는 바로 그 시점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대적들의 공격도 막강한 화력을 동원하여 최대의 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긴박한 위기의 때에 느헤미야가 선택한 것은 엎드림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참 작은 존재입니다. 나는 얼마든지 쓰러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작은 나에게 힘을 주시면 나는 이길 수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9절 하반절의 기도 분석입니다. 느헤미야 1장은 하나니의 비극적인 보고를 받은 느헤미야가 유다 예루살렘을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느헤미야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느헤미야 1:11 전반절을 복기하십시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느헤미야의 마지막 장인 13장은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의 완성과 이후 바사로 회귀했다가 다시 돌아온 유다 예루살렘 성안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처참히 무너져 있었던 것을 보고 다시 영적 개혁을 완성한 뒤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느헤미야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인 13:31절을 미리 봅니다.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참 많은 신학자들은 느헤미야를 지칭하여 개혁적인 리더라고 정의합니다. 틀리지 않는 정의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았던 학자의 정의 중에 이 정의를 가슴에 담아 놓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시작과 마지막이 기도였던 리더였다.” 시대의 위기는 교회 공동체가 엎드림이 사라질 때 시작됩니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불이 꺼질 때 시작됩니다. 개인의 위기는 무릎 꿇음을 잊을 때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찬송가 369장 1절 가사는 정답입니다. 죄 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영적 집중력의 최고의 산실은 주께 엎드리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기도의 성자라 불리는 E. M. 바운즈가 이렇게 선포했던 글을 읽다가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역을 맡고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교회를 죽이는 장의사나 마찬가지다.” (E. M. 바운즈, “기도의 능력”, 평단 간, p,184.) 심장을 뛰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20세기 불의 사자라고 부르는 레오나드 레이븐힐의 사자후를 들어보십시다. “바빠서 울 시간이 없는가? ‘시간’의 먼지가 너무 많아 눈에 너무 많이 끼어서 ‘영원’의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라도 ‘제대로 된 기도’의 씨를 뿌린다면 우리의 눈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눈물이 흐르게 될 것이다.”(레오나드 레이븐힐, “무릎부흥”,규장,p.82.) 지금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의 통치 하에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사탄의 집요한 공격을 오늘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 집중력을 상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최고의 랜덤 시기를 보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 집중력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집중력 중에 가장 중요하고 원색적인 것이 바로 엎드림이라는 영적 집중력입니다. 이 집중력을 기억하고 순간순간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엎드림의 영성으로 무장하는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회퍼 목사의 자작곡인 ‘선한능력으로’ 함께 부르고 기도합니다. 주 선한 능력으로 안으시네/그 크신 팔로 날 붙드시네 절망 속에도 흔들리지 않고/사랑하는 주 얼굴 구하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주 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 하네 주 오실 그날/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