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4일 주일 오전 설교 (느헤미야 강해 14) 본문: 느헤미야 5:14-19 제목: 느헤미야가 느헤미야 했다.(2) 서론) 전직 국가 고위 공무원을 일을 하다가 퇴임을 하면 민간 기업체에서 그 대상자를 선정하여 자회사의 이사 혹은 그 이상의 직책을 부여하고 높은 연봉을 주면서까지 고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컨대 그 사람을 고용한 기업이 국책사업이라는 굵직한 테마 경쟁에 뛰어들게 되면 전직 고위 관리라는 명함을 이용해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함으로서 손쉽게 경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특히 사법부에서 퇴직한 판검사 출신들의 경우가 좋은 실례일 수 있습니다. 전관예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편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의계약과도 같은 방법으로 사업권을 따냄으로 인해 불거진 법적인 문제가 생길 때, 전관예우로 채용한 기업 소속의 전직 판검사들은 이런 일을 인맥, 학맥 기타 등등의 여러 가지 관계를 통해 해결해주는 최고의 적임자들로 사용되기에 기업은 이들에게 높은 연봉을 주면서까지 기업의 임원으로 채용하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이고, 꿩 먹고 알 먹는 식의 관행으로 이런 일들은 그 동안 자행되어 왔습니다. 문제는 결국 이런 관행들의 피해가 고스란히 힘없는 중소기업이나 약한 국민에게 역 피해로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모든 영역에서 관행으로 굳어진 비상식적인 채용 구조는 모든 불법의 온상과도 같은 교집합입니다. 백번 천 번을 양보하여 국가 공동체라고 지칭하는 영역이 바울이 진단했던 그대로 공중 권세 잡은 자의 풍조를 따라가는 구조이다 보니 뭐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것 같이 침묵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불법이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신앙인들로 하여금 자행된다면 이것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일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원칙을 지켜가며 솔선수범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마땅히 존경받아야 대상이며 그런 지도자가 존재하는 공동체는 잘못 될 리 없습니다. 본론) 느헤미야 기자를 통하여 4장에서는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게셈으로 이어지는 느헤미야 적대 공동체가 유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는 느헤미야 공동체를 향하여 대단히 강력한 압박으로 공격한 외적 공격이 있었지만, 느헤미야의 탁월한 리더십을 통해 이 위기를 극복했음을 나누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주일에는 유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막힌 내적 공격이라고 할 수 있는 고리대금업의 성행으로 인해 피해자가 속출했고, 이로 인해 유다 공동체 안에 거하던 서민들이 경제적 곤비함에 내몰려 그들이 함께 사역하던 유다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했지만, 역시 느헤미야의 단호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유다 공동체의 상위 계층이 자행하던 불법적인 일들에 대한 자정 개혁을 선언하고 실시함으로 두 번째 위기를 극적으로 극복했음을 살폈습니다. 오늘은 그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는 유다 내부 공동체 개혁을 주도했고 선포했던 지도자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이라는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여지없이 보여주는 대단히 의미 있는 본문입니다. 본문 14-15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 삼십 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이 구절은 특히 주석적 작업이 필요한 부분이기에 복음주의 권에 있는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개진하는데 별 다른 이의가 없었던 보편타당한 해석을 집약해서 교우들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느헤미야가 유다 도의 총독으로 임명받은 시기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20-32년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즉 이것을 서력으로 표기한다면 BC 445-433년에 해당하는 12년 동안입니다. 이 말을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분명히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인 아닥사스다가 임명한 지명직 공무원인 셈입니다. 느헤미야 기자는 본문에서 이렇게 왕에 의해 지명된 고위 공직자였던 느헤미야의 직책을 ‘총독’이라고 명시했는데 총독의 직책으로 유다에 파견된 느헤미야는 자신이 재직하였던 12년 동안 자기는 물론, 자기의 형제들까지 총독이 주는 ‘녹’을 먹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레헴’은 ‘베들레헴’에서 알 수 있듯이 베들레헴이 ‘떡집’이라는 의미처럼 ‘떡, 빵, 음식’등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재산상의 이익들을 총칭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총독 느헤미야가 자기에게 합법적으로 주어지는 ‘녹’을 12년 동안 받지 않았다고 피력한 이유는 여러 가지 속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 속뜻의 제일 중요한 이유는 본문 15절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5절을 다시 한 번 복기하겠습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이 구절에 등장하는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이 누구일까요?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인 소형근 박사는 이들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느헤미야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 유다 지방을 담당하던 사마리아 출신의 지방 관리일 것이다. 유다 지방은 사마리아의 관리 지역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을 다스렸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르훔과 심새(스 4:8-16)는 물론 학개 예언서에 등장하는 세스바살(스 5:14)과 스룹바벨(학 1:1,14,2:2)도 총독으로 불렸기에 이들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소형근. “연세신학백주년 성경주석-느헤미야”, 86-87) 이 해석을 접하면서 조금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르흠과 심새는 에스라를 몹시 괴롭혔던 인물들이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제 1차 포로귀환공동체의 지도자들이었었던 세스바살과 스룹바벨까지 거론된 것은 의외였습니다. 본문에 보고된 전임 총독으로 인용된 자들의 행위는 대단히 부정적인 행위로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정이든 부정이든 느헤미야 기자가 표현한 이전 총독들의 행태를 살펴보십시다. 15절에 이들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고발되고 있습니다.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전임 총독들이 자행한 범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양식과 포도주를 빼앗았고 은 사십 세겔을 상납하도록 압박했다. 은 사십 세겔의 값어치는 2-3인 성인의 1년 연봉과 맞먹는 가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물질을 착취한 셈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렇게 고발한 느헤미야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스룹바벨과 세스바살까지 포함한 매도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방어 논리는 당시 유다 도의 상황이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기에 느헤미야가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자기의 리더십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기에 이런 강도 높은 발언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팩트는 이전 총독들 중에 상당수가 이렇게 권력을 이용해 서민들을 착취하고 핍박했다는 사실이 있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한 느헤미야는 이어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가장 중요한 느헤미야의 영성을 선명하고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낮은 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유다 도에서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불철주야 최선을 다하는 민초들과 함께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한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며, 기뻐하는 일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었기에 16-18절에서 대단히 주목할 만한 반응으로 내적 결속을 다집니다.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우리는 지난 주일에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불리던 사악한 자들이 돈을 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땅과 토지를 담보로 제공했던 서민들의 땅과 토지를 높은 이자를 대가로 착복했음을 고발했습니다. 아주 소위가 좋지 않은 질 나쁜 일이었습니다. 반면, 이것을 너무 잘 알았던 느헤미야는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권력을 이용하여 그 어떤 땅이나 토지를 착복하는 비열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천명합니다. 이 일은 지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일하던 측근에게까지 엄히 명하여 그들로 인한 피해도 일어나지 않게 하였음도 분명히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유다 성벽을 재건함에 있어서 많은 동역자들에게 가장 극적인 감동을 준 메시지는 17-18절입니다. 유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이름이 거명되지 않은 약 150명과 비록 유다 공동체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지만 성벽 재건에 동참해 준 이방인들까지 상당수 인원들의 식사를 제공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았지만. 이것도 페르시아의 녹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엄청난 양의 식사를 제공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마땅히 세금이나, 아니면 국가적인 지원 금액으로 충당해야 하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본문 정황을 보면 정확한 정보가 없어 확언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사비로 충당하였든지 아니면 5:1-13절에 등장한 유다 성읍 안에 있었던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였던 장본인들에게 부담을 지워 진행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어떤 선택이었든지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성벽을 직접적으로 재건하는 서민들 편에 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15절 후반절을 통해 그 답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제시한 레마를 가볍게 여기는 자는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에 하나 이 문장에 대해 과소평가하거나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성향이 내게 있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토로의 그 진정성을 단 한 번도 깊이 성찰해 본 경험이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고백이 진정성이 있으려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느헤미야의 신앙적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여기에 번역된 ‘경외함으로’는 히브리어 ‘이르아’의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이르아’는 문자적으로 ‘두려워하다, 경건하게 우러러보다’ 등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백성들은 하나님을 ‘이르아’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건하게 우러러 보는 자들이 어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정반대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건하게 우러러 보는 자들이 어찌 약한 자들을 짓누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건하게 우러러 보는 자들이 어찌 불의와 타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자들이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주간에 담임목사와 함께 하는 독서 여행 스케줄 중에 용문산 둘레길이 용문사까지 이어져 있었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용문사까지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4월 초파일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용문사 대웅전 앞에는 수많은 연등들이 빼곡하게 결려 있었습니다. 목사로 살고 있기에 아주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바로 이 때인데 도대체 연등에 달린 불교 신자들의 기도 내용들이 무엇인가 궁금해 연등에 달린 기도 제목들을 스캔하기 시작했습니다. 종합하서 요약하겠습니다. “아들 사업 대박”, “아들, 딸 SKY 대학에 진학”, “로또 1등 당첨 소원”, “공직에 있는 손자, 1급 승진 요망”, “의대 합격 기원”, “아파트 가격 따따블을 비나이다!”, “암 완치 기원”, 등등 수없이 많았습니다. 더 기막힌 것은 연등 접수처를 보니 이런 문구가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공직 진출 및 국가 벼슬 획득 소망자는 칠성등을 달아야 합니다. 칠성등 1년 가격은 독등(獨燈)은 100,000원입니다.” 불교계의 이판승으로 유명한 휴암 스님의 글을 인터넷 블로그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복에 환장한 한국의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렸는데 너희는 그 스승에게서 무엇을 구하느냐? 나는 오늘 불교인들의 생리에 저항하고 싶다. 설령 불교가 오늘의 병든 복 사상에 저항하다가 설사 신자가 1300만 명에서 130명으로 줄어들 지라도 여지없이 물질주의 복 사상을 철폐하는데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된다. 복에 환장한 불교신자들아!” 글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적어도 휴암과 같은 불교의 이판승이 있는 한, 불교신자는 1300 만 명이 아니라 더 많아질 수 있겠다는 묘한 놀람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진짜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역해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내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표적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되어 목사가 ‘어’ 하면 ‘아’ 할 수 있는 귀가 풍성해진 교우들에게 선포합니다. 귀만 풍성해지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심장이 뛰어 당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내는 증거를 보이십시오. 남들보다 이성적인 능력이 탁월하여 머리로 이해되는 것만을 추구하는 교우들에게 선포합니다. 이성 너머에 있는 심장이 뜨거워져 부담되고 거북하기 짝이 없는 복음의 메시지를 머리로만 받고 가슴으로 튕겨내는 괴물들 되지 말고 예수의 삶을 그리스도께서 직접 행하셨던 보혈의 피가 흘렀던 그 사랑으로 당신의 삶을 변역해 내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언젠가 이재철 목사께서 자신의 책에서 소개했던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수도자 샤를 드 푸코의 글을 소개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어느 날 푸코는 나무를 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무는 떨어지는 자신의 잎이나 부서져 나가는 가지에 대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기를 쓰거나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전혀 안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저 의연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이나 생명 때문에 염려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찮은 나무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뒤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푸코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정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진정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부족함 없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이재철, “요한과 더불어, 여덟 번 째 산책”, 홍성사, 84-85) 이 목사께서 인용한 크게 들리는 영적 공명에 할 말을 잃습니다. “신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설교 제목을 ‘느헤미야가 느헤미야 했다’로 정했습니다. 느헤미야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위로자이시다.’ 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만이 정말로 위로자임을 믿었던 느헤미야였기에 오늘 본문에서 행했던 위대한 삶을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는 나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교우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계십니까? 만에 하나, 이것에 동의한다면 여러분은 오늘부터 살아가는 시분초마다 하나님의 사람임을 말과 학습되어 있는 인지 능력이 아니라 삶으로 변역해 냄으로 증명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자가 되었다는 증거 판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