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6일 주일 오전 설교 (느헤미야 강해 10) 본문: 느헤미야 4:1-6 제목: 악한 분노에 선하게 분노하라 서론)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산상수훈에 적시되어 있는 한 구절을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38-44절을 읽겠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구절을 마태복음 기자는 산상수훈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1세기에 이걸 하라는 말인가? 되 물을 수밖에 없는 선포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곤혹스럽습니다.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이라는 공간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간단히 치부해 버리면 별 어려움이 없겠지만, 문제는 이 구절이 기독교가 기독교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구절이기에 난처하고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해서 이런 정도로 해석하고 자위합니다. “100% 완벽하게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 수는 없지만, 마음에 부담을 갖고 그렇게 살려 노력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마태복음 5:38-44절에서 예수께서 산에서 행하셨던 가르침을 보면서 마음을 무겁게 타격하는 것이 보이십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상대를 향하여 분노하거나 혈기를 부리지 말라는 강한 권면입니다. 이런 차원으로 적용해 본다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느헤미야는 철저하게 말씀을 어긴 자가 됩니다. 정말로 그럴까? 오늘 설교를 통해 나누어 보십시다. 본론) 먼저 본문 4-5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점잖게 번역된 느헤미야의 기도문이기에 언뜻 보면 이 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명징하게 찾아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4-5절의 내용을 아주 단순하게 풀면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 산발랏과 도비야를 저주합니다. 벼락에 맞게 해 주십시오.” 학자들은 4-5절을 지칭하여 느헤미야가 대적들을 향해 하나님께 올린 저주시라고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의 기도는 예수님의 정신과 상반되는 딜레마에 빠지는 데 이 기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생깁니다. 이 질문을 던지면서 오늘 본문 해석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미 3장에서 살핀 것처럼 느헤미야의 탁월한 리더십을 근거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전제하여 시작됩니다. 1-3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여기에 다시 등장하는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는 느헤미야의 대적임을 2장에서 살폈습니다. 이미 이전 강해에서 살폈던 것처럼 산발랏의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Ⅰ세 치세 때에 유다의 북쪽이었던 사마리아를 관할하는 총독이었고, 도비야는 유다의 동쪽 지역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본인의 입지를 굳건히 했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분명히 본인들이 관할하는 지역을 뛰어넘어 군웅할거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유다까지 본인들의 입지를 행사하고 있었기에 음으로 양으로 유다로부터 적지 않은 부수익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유다로 들어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위대한 일을 감당하자, 본인들이 얻었던 기득권적인 수익들이 끊어질 것이 두려워 2-6장까지 집요하게 느헤미야의 사역을 반대하는 대적들로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시작 단계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다는 소식과 그 일이 진행된다는 것을 들은 산발랏은 2:19-20절에서처럼 단순히 말로 전하는 엄포의 수준을 넘어 그들이 갖고 있었던 물리적인 힘을 전제하여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에 대해 훼방꾼 노릇을 합니다. 산발랏이 느헤미야에게 전한 훼방의 내용을 살펴보십시다. 총 다섯 가지로 분석됩니다. ① 미약한 유다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인가? 나라를 잃어버린 유다는 나라의 주권이 없기에 언제나 그들의 자존감이 낮았습니다. 이 낮은 자존감을 건드림으로써 성벽 재건을 꿈도 꾸지 말라고 공격한 것입니다. ② 이 성벽을 다시 쌓는다고? 성벽 재건이라는 것은 전문적인 일인데 지금 성벽을 쌓고 있는 유다 포로귀환자들은 전혀 건축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③ 여기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이것은 영적인 비아냥입니다. 성벽 재건을 하려면 능력과 재력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성벽을 재건하는 느헤미야와 그의 사람들은 신앙심 말고는 이런 부류의 것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성벽을 재건할 수 있겠느냐고 사기를 꺾은 것입니다. ④ 하루 만에 이 일을 끝낸다는 것인가? 성벽재건은 수많은 물자들이 있어야 하고 시간도 있어야 하는데 이 일을 느헤미야가 시도한 군중심리에 넘어간 자들이 하려 한다고 비아냥대는 공격이었습니다. ⑤ 불에 타버린 흙무더기 속에 있는 돌을 다시 꺼내겠다는 것인가? 이 내용은 극단적인 심리적 공격이었습니다. 성벽은 무너졌지만 무너져 내린 돌들은 별 문제가 없이 견고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리적인 협박이자 위협이었다는 말입니다. 산발랏이 전한 이런 공격과 협박에 도비야는 숟갈 하나를 얹습니다. 이런 빈정댐이었습니다. “쌓으면 뭐해. 너무 허술해서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인데.” 성서고고학자들은 이미 발굴을 통해 느헤미야가 쌓은 성벽의 두께가 약 3m나 된다고 보고합니다. 도비야의 말은 거짓입니다. 결국 산발랏과 도비야의 공격은 성벽이 재건될 경우, 본인들에게 임할 불이익에 대해 심히 염려하여 겁박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이런 공격에 대해 느헤미야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느헤미야는 그들의 공격에 대해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습니다. 철저하게 그들의 여론전을 무시했습니다. 도리어 느헤미야는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4-5절을 음미합시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대다수의 구약학자들은 이 구절에 기록된 느헤미야의 기도를 저주 기도라고 정의했습니다. 느헤미야 자신은 물론, 하나님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가 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방해하는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징계해 달라는 신원의 기도이자 저주기도라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 저 역시 큰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큰 그림으로 볼 때 그렇다고 해석해도 오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조금은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먼저 느헤미야가 뭐라고 기도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다.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서 받는 조롱을 살펴보십시오. ⓑ 그들이 퍼붓는 조롱과 비방이 그들에게 거꾸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 이스라엘을 비방하는 자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고 다른 나라로 끌려가게 하소서. ⓓ 저들의 죄를 심판하소서. 분명히 저주의 톤이 있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저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이렇게 재해석하고 싶습니다. 악한 분노에 대하여 분노한 것이라고. 악한 분노라 함은 산발랏과 도비야의 분노입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1절에서 ‘분노하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카아쓰’는 대체적으로 신경질적으로 화를 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번역했는데 적절합니다. “산발랏은 우리가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며 유대인들을 비방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상담학을 교수하는 데이빗 폴리슨은 ‘카아쓰’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6가지 분노로 표현됨을 간접적으로 시사했습니다. (데이빗 폴리슨, “악한 분노, 선한 분노”, 토기장이, 76-77) Ⓐ 짜증(irritability) Ⓑ 다툼 (arguing) Ⓒ 원한 (bitterness) Ⓓ 폭력 (violence) Ⓔ 숨겨진 분노 (passive anger) Ⓕ 독선적인 분노 (self-righteous anger) 산발랏과 도비야가 노발대발한 것은 이 6가지의 부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폴리슨은 이렇게 분류를 한 뒤에 이런 악한 분노를 자행하고 있는 영역에서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선한 분노를 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선한 분노는 오히려 세상의 잘못된 것을 회복시키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좋은 분노의 ‘부재’(마땅히 분노해야 할 때 반응하지 않는 것) 역시 해결할 수 있다.” (위의 책, 78) 결국 이런 공식에 대입해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는 저주 기도라는 형식을 뛰어넘어 악한 분노를 궤멸시키기 위한 선한 분노(indignation)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주어진 본문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결코 주눅 들지 말고 감당해야 하는 미션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 악한 분노에 지지 말고 선하게 분노하는 것이 성도의 미션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그래, 이래서 나는 성경 말씀을 신뢰해! 라고 무릎을 친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5:10절을 소개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 구절이 교우들에게는 어떻게 읽혀질지 궁금합니다. 그냥 은혜로운 구절로만 여기시면 안 됩니다. 이 구절 안에는 하나님께서 대단히 고민하시고 또 고민하신 아픔의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설교 서론에서 산상수훈을 잠시 나누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원수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한 큰 울림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기억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사랑하라는 명령은 맹목적인 사랑함이거나 이유 없는 사랑함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지은 죄를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지은 죄로 인해 주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체감하신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그 분노를 풀 대상으로 아들을 지목하였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지목된 그 아들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삯을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은 아들에게서 등을 돌리셨습니다. 분노를 표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악한 분노에 대하여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대신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신 선한 분노로 반응하신 것입니다. 결코 악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악에 대하여 상응하는 선한 분노를 내셨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응하시 선한 분노로 로마서 5:10절을 읽으면 감동의 감동에 이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결국 페루의 시성이라고 불리는 세사르 바에흐의 갈파는 자신의 자전적인 고백이었지만 기실, 우리가 주군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토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아주 아픈 날” 결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잘 알려진 기독교 변증가인 오스 기니스 박사의 글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처음에 지상 공화국과 천상 왕국을 믿었던 기독교 공화주의자들은 ‘우리는 예수 외에 다른 왕을 모시지 않는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러나 공화주의의 의식이 강화되고 하나님 나라의 식이 축소되면서 이제는 ‘우리 자신 외에는 왕이 없다.’는 구호만이 난무하고 있다. 이는 건국의 시조들이 주문한 자유가 자유지상주의에 의해 굴복한 것과 흡사하다. 마치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처럼 왕이 없고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데로 행한다는 뜻이다. 무엇이나 허용되는 미국문화에서 중요한 이슈를 결정하는 기준은 개인적 이유와 관심사, 주관적 선택, 사적인 이익, 최신 유행이다. 때로 권위의 붕괴는 노골적인 도발조로 ‘권위를 의심하라’는 자동차 범퍼 스티커 글귀에도 나타난다.” (오스 기니스, “저항”,토기장이,p,144) 저 역시 제 졸고 4번째 책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밝혔던 적이 있습니다. “영원한 행복과 불멸을 추구하면서 인간들은 ‘실상 자신들의 신들(gods)로 향상시키고자 한다. 이를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되는 일로 표현한다. 결국 우리의 기술공학이 인간의 마음을 ’재-설계‘(re-engineer)하게 될 때, 지금까지 인간을 규정해 왔던 호모사피엔스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21세기는 인류의 기획은 ’신성을 달성하는 것(attaining Divinity)’이라고 할 수 있다.”(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pp,20-21, 재인용)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성을 달성하는 것’이 인류의 기획이자 마스터-플랜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이 무시무시한 악한 분노에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이 무시무시한 신흥 산발랏과 도비야가 퍼붓고 있는 악한 분노와 맞서야 하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포된 말씀과 선포되고 있는 말씀의 캐리그마를 붙들고 선한 분노를 표현하며 맞대응하며 살아가는 오늘의 느헤미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 발 앞에 무릎 꿇고 주 발 앞에 무릎 꿇고/그 사랑에 나 안기네 어떤 말도 그 어떤 소리도/그 발 앞에서 잠잠해지네 주 나의 사랑/그 발 앞에 앉아/내 모든 기도는/사랑의 노래가 되네 주의 옷자락 만지며/주의 두 발을 씻기며 주님 그 발에 입 맞추며/나의 왕관을 놓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