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느헤미야 3:6-32
제목: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3)
서론)
탁구장에 나가 운동을 할 때, 하위 부수 회원들과 맞상대가 되어 랠리 연습을 해 주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운동을 처음 하는 회원들은 이모저모 서툰 상태라서 맞상대해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같은 부수나 상위부수에 있는 회원들과 경기를 하는 것에 비해 2배 정도는 더 힘이 든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위 부수 회원들과 함께 운동을 할 때, 제가 꼭 물어보는 것이 있고 더불어 답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질문하는 것: 운동하신 지 얼마나 됐죠?
답해주는 것: 제가 그만큼 운동했을 때에 비하며 훨씬 더 잘하시는 겁니다.
하위부수에 있는 분들은 상위부수에 있는 회원들이 경기를 해주거나 운동 파트너가 되어 주는 것에 대해 대단히 기뻐하고 만족해하지만, 반면 잘하려고 하다 보니 더 실수를 많이 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그때 도리어 그들을 격려해 주면 너무 고마워하며 감사해 하는 일을 경험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본론)
우리는 지난 2주에 걸쳐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본문 이해를 통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이 제목 설교의 마지막 시간을 갖겠습니다.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 프로젝트가 불과 52일이라는 아주 짧은 단기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첫 번 강해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승리는 결코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만한 당위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임도 살폈습니다.
⓵ 적지 않은 반대 세력이 있었지만 그 반대 세력의 저항을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믿음이 느헤미야에게 있었기에 성벽 재건 사역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나누었습니다.
⓶ 느헤미야의 가장 중요한 신앙적 바탕에는 양문 건축이 우선순위였음을 살폈습니다. 즉 예배가 다시 회복되는 것이 성벽 재건의 가장 중요한 기초임을 인식했던 느헤미야는 제일 먼저 양문 건축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를 했음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 성벽 재건의 승리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닌 또 다른 세 번째의 동기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메시지를 공유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으로 6-32절까지 읽었지만 더 세밀하게 추적하자면 2-32절까지의 텍스트를 분석해야 합니다.
본문 2-32절까지를 읽다보면 무려 75명의 이름과 그들이 갖고 있었던 15개 정도의 직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직업에 대해 느헤미야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세밀히 제공한 것입니다.
이 서비스는 다분히 의도적인 냄새가 납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75명의 이름 중에는 본문에 딱 한 번 기록된 것 외의 성경 다른 여백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이름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서 저자는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16절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 다음은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가 중수하여 다윗의 묘실과 마주 대한 곳에 이르고 또 파서 만든 못을 지나 용사의 집까지 이르렀고”
이 구절에 느헤미야가 등장합니다.
전 이해가 없는 자들은 이곳에 느헤미야가 자신의 이름을 포함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16절에 등장한 느헤미야는 “야훼 하나님은 위로자이십니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지금 성벽 재건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느헤미야와 동명이인인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이 의미는 3장 전체에 열거되어 있는 성벽 재건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함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위대한 성벽 재건 역사에 주인공들은 바로 이 사역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일부러 누락시킴으로 자기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범적인 리더의 모습을 보여준 셈이 됩니다.
결국 우리는 오늘 설교를 통해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승리가 결코 우연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요소가 전제되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세 번째로 발견하게 됩니다.
※ 성벽 재건은 격려하는 공동체가 가져온 승리의 결과물입니다.
저는 3장에서 이렇게 성벽 재건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함으로 누구 한 사람의 뛰어난 부담으로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된 것이 아니라, 모두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쾌거임을 보여준다고 역설하고 싶습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또 한 그룹은 부연해야 할 것 같아 소개합니다.
본문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한 부분을 중수한 주인공으로 살룸의 딸들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을 주석한 소형근 박사의 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고대 유다 사회에서 여성들이 외부적으로 큰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아주 낯선 장면이다. 그러나 이런 익숙하지 않은 관습을 깨고 예루살렘 변방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의 딸들이 느헤미야가 주도하는 성벽 사업에 지지를 보내며 참여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직업을 불문하고, 남녀 구분 없이 참여하였음을 시사하는 바다.” (소형근, “연세신학백주년 기념주석”, p,63)
결국, 느헤미야 기자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참여한 여성 사역자들을 격려한 것입니다.
한 부분만 더 부연하겠습니다.
1절, 4절, 20-22절, 28-30절을 연이어 읽어 보겠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1절)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4절)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야의 아들 므레못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엘리아십의 집 문에서부터 엘리아십의 집 모퉁이에 이르렀고 그 다음은 평지에 사는 제사장들이 중수하였고” (20-22절)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의 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28-30절)
느헤미야서 저자가 3장을 통하여 대단히 의도적으로 칭찬하며 격려한 그룹은 제사장 그룹이었습니다.
엘리아십을 비롯하여, 제사장 그룹에 속한 학고스의 손자 므레못과 임멜의 이들 사독이 연이어 두 번씩이나 언급됩니다.
그리고 3장의 마지막 부분에 소개되고 있는 제사장들까지 성벽 재건의 한 축을 중수하는데 그들이 맡은 지역은 성벽 중에 가장 광범위한 지역을 맡았음을 보고합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7-19절을 보면 레위 사람들도 성벽 재건에 동참했음을 잊지 않고 보고합니다.
“그 다음은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 르훔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하사뱌가 그 지방을 대표하여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헤나닷의 아들 바왜가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미스바를 다스리는 예수아의 아들 에셀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성 굽이에 있는 군기고 맞은편까지 이르렀고”
이 구절에 레위 지파에 속해 있는 제사장 그룹의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분담하여 중수한 장소가 열거되고 있습니다.
저는 본문에 있는 이 구절을 보면서 대단히 의미 있는 영적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주변에 소위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제 2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고 보호하는 것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마땅한 일이며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뭐 그리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까?
반문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기자는 제사장 그룹과 레위인들이 성벽 재건의 가장 많은 부분을 감당하며 성벽 재건에 솔선수범한 일에 대하여 격려하는 의도에서 자세히 그들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되는 집안은 가장이 하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집안이 아니라 가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체의 일에 감사하고 예의를 갖추는 집안입니다.
느헤미야는 평신도 사역자입니다.
그는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느헤미야 역사서는 느헤미야의 사역을 인정하고 따르며 그의 정신에 대하여 팔로잉 하는 일련의 평신도 그룹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느헤미야서를 기록하면서 제사장, 레위인 그룹의 수고로 인해 성벽 재건이 속히 이루어질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글을 남긴 것입니다.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교육전도사 시절, 구세군 교회에서 약 2년간 사역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섬기던 교회에 부교(집사)의 딸이 희귀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피가 멈추지 않는 혈루병과 같은 계절병이었습니다.
이 일이 교회에 알려지자 담임사관께서 전교인 금식을 선포하며 중보 기도를 선언했습니다.
그 중에 담임사관님의 사모님이 교우들이 알지 못하게 40일 금식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부교 딸 치유가 금식 기도의 목적이었습니다.
기도의 시간이 깊어지고 있는데 부교의 딸은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로 악화되었습니다.
이 위기의 시기에 훗날 알게 되었지만 사모님의 기도제목이 바뀌었습니다.
그 기도제목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맞는 기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위험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부교의 딸을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그 딸이 필요하다면 그 딸 대신에 제 딸이 셋이 있는데 그 중에 한명을 대신 드리겠으니 부교의 딸을 살려주십시오.”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생명을 건 사모님의 기도로 인해 부교의 딸이 기적적으로 소생했습니다.
저는 이 일을 눈으로 경험한 부교역자니까 그 때, 사모님이 드렸던 일사각오의 기도를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때의 일은 제게는 목양의 간증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직전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이 간증을 전했습니다.
한 지체가 제게 왔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때 그 사모님은 지금 건강하십니까? 그 사모님 같은 귀한 분이 계셔서 믿는 자들의 자존감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 사모님의 이름을 알려주시면 생면부지의 분이지만 중보기도 제목에 올려놓겠습니다.”
며칠 또 한 사람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대단히 똑똑하다고 자평하는 자입니다.
그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사모님의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기도 신학에 부합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양보하여 그 사모님의 기도가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모님은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저는 그 일이 뭐 그리 대단한 간증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한 것뿐입니다.”
유구무언입니다.
이 사람이 왜 그리 망가진 자가 되었는지 후에 알게 되었지만 정말로 유구무언입니다.
되는 교회는 작은 수고도 격려하는 교회이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52일 만에 완공된 예루살렘 성벽 재건 프로젝트는 우연으로 이루어진 산물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지지하는 프로젝트를 위해 서로 힘을 합쳐 솔선수범한 지체들의 합력작품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서로가 격려한 끝에 이루어낸 우연이 아닌 필연적 승리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한 구절이 씁쓸하지만 다시 한 번 복기해 보십시다.
느헤미야 3:5절입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언제나 드고아의 귀족 같은 카멜레온 신자들이 교회에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 역사에 동참하기를 거절한 자에 대한 역사가의 보고는 대단히 냉정합니다.
그에 대한 보고는 단 한 구절 중 그것도 반구절로 지나칩니다.
철저히 무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하나님의 프로젝트인 예루살렘 성벽 재건 프로젝트는 2-32절까지 무려 31절에 걸쳐 소상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저자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역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려고 했던 모든 이들의 산물임을 격려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목사들 사이에 회자되는 고전같이 유명한 유머 짤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와 공부를 못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성적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전 과목이 '가'였고 한 과목 만 '양'이었습니다. 웬만한 아버지라면 이렇게 말을 하며 노발대발해야 마땅합니다.
“이놈의 자식아, 너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머리가 돌대가리냐, 이걸 성적이라고 받아왔냐?”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이 성적표를 내밀었을 때 야단은 고사하고 이렇게 격려해 주었답니다.
“아들아, 너무 한 과목만 집중적으로 공부하지 말거라”
웃자고 만들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격려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격려하면 격려를 받는 사람도 행복하지만 격려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삶을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벽 공동체는 우연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 자들의 격려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 3장은 격려 보고서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안에 우린 하나 모습은 달라도/예수님 한 분만 바라네/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
따스함으로 보듬어 가리/주님 우리 안에 함께 하시니/형제자매의 기쁨과 슬픔 느끼네
내 안에 있는 주님 모습 보네/그 분 기뻐하시네/그 분 기뻐하시네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부족한 입술로 찬양하게 하신 일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너를 통해 하실 일 기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