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9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본문: 느헤미야 6:15-16 제목: 왜 느헤미야서를 읽어야 하는가? 서론) 매우 젊었던 시절, 섬겼던 교회에서 느헤미야 강해를 실시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청년 공동체를 목회하는 특수성으로 인해 저 역시 젊었고 대다수의 교회 구성원들도 청년들이 중심이다 보니 느헤미야의 메시지를 매우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쪽으로 끌고 갔던 철없던 시절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느헤미야 강해를 처음으로 시작했던 파주 법원 동산 교회에서의 느헤미야 강해는 젊은이들에게 불을 지피는 동기로 작용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가 철없던 시절이라고 당시 강해 사역을 못 박은 이유는 느헤미야 안에 담겨져 있는 대단히 깊은 영적인 성찰은 배제하고 표면적으로 눈에 크게 보이는 REVIVAL 즉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부흥의 부흥, 그리고 또 부흥의 부흥만을 외치는 도구로 느헤미야 강해 사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깊이가 없었던 강해였음을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물론, 이런 사역에 긍정의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느헤미야를 통해 함께 여행했던 청년들 중에서 오늘 한국교회를 위해 사역하는 주의 종들이 배출된 것을 보면 젊은 목회자 시절, 진행했던 느헤미야 강해 사역이 어느 정도의 좋은 결과물도 주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2023년, 저는 교우들과 느헤미야를 다시 여행하려고 합니다. 이번 여행은 제게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사역하는 임기 내에 아마도 마지막 느헤미야 여행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오늘 목양터 이야기마당에서 언급했듯이 이번 느헤미야 강해 여행은 ‘Revival’이 아니라 ‘to reflect’ 즉 ‘성찰하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강해를 통해 펜데믹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너진 내 영적 자아를 다시 성찰하고 일어서는 기회로 삼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성령이 앞서 가시도록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떠나는 느헤미야 여행이 우리 모두의 신앙의 여정을 빛나게 하는 귀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본문 6:15-16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해서 성벽을 재건하는데 걸린 총 소요 시간을 저자는 52일이라고 보고합니다. 엄청난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놀라운 보고를 이해하기 위한 장정에 돌입하겠습니다. 주전 586년에 남 유다 공동체가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점령됨으로 인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남 유다의 멸망으로 인해 유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자들은 강제로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남 유다가 멸망함으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남 유다 백성들의 비극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남 유다 멸망을 직접 눈으로 목도했고, 본인 스스로도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 예언자의 보고를 참고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52:28-30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사로잡아 간 백성은 이러하니라 제 칠년에 유다인이 삼천이십삼 명이요 느부갓네살의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간 자가 팔백삼십이 명이요 느부갓네살의 제이십 삼년에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 간 유다 사람이 칠백사십오 명이니 그 총수가 사천육백 명이더라” 이 구절을 참고한다면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간 것은 멸망을 당하던 주전 586년에 한꺼번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무려 세 번에 걸쳐 지속적인 치욕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주전 6세기 신흥강국이었던 바벨론은 약소 국가였던 팔레스타인의 소국 남 유다를 지속적으로 압박하며 괴롭혔습니다. 이로 인해 주전 597년에 첫 번째로 유다를 침략하여 3,023명을 포로로 끌고 갔고, 멸망을 시킨 당해 년 도인 주전 586년에 두 번째로 832명을 바벨론으로 이거 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로부터 4년 뒤인 주전 582년에 745명을 포로로 끌고 갔으니까 총 20,000명 정도를 포로로 끌고 가 볼모로 삼은 셈입니다. 20,000명이라는 숫자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인구가 약 80,000명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이렇게 끌려간 약 20,000여 명들은 무엇보다도 왕족들과 지배 계층에 있었던 인텔리 그룹들이었기에 패망한 유다의 사회 전반은 완전히 무정부 상태가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휘황찬란한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은 완전히 황무지가 된 돌무더기 같은 성읍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렇게 버려진 황무했던 땅에 조금씩 서광이 비친 것은 무섭도록 잔인했던 바벨론이 바사에 의해 멸망을 당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고레스 대왕은 기원 전 538년 10월에 바빌로니아를 정복하였다. 이 연대는 페르시아(바사) 제국의 공식적인 설립 연대이며, 이 제국은 두 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레스터, 그래비, “제 2 성전기 유대 종교”, 컨콜디아사, 18) 우리들이 주전 538년을 주목하는 이유는 바벨론을 접수한 바사의 초대 왕인 고레스가 발표한 칙령 때문입니다. 에스라 1:1-3절을 소개합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유대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초토화 되어 약 20,000명 정도가 타국으로 끌려와 수모와 치욕의 세월을 보낸 지 약 50-120년 만에 아이러니하게 점령국을 점령한 또 다른 점령국의 수장에 의해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라는 미션이 주어진 역사의 흐름에 숙연해집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바벨론으로부터 시작하여 바사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백성들이었던 유다 백성들은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유다 백성들의 포로 귀환이라는 담론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이론들을 주장하며 각기 다른 시기들을 저울질합니다. 하지만 느헤미야 강해를 시작하는 오늘 제가 제시하는 포로 귀환의 연대기적인 내용은 복음주의 권 학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주장들을 저도 동의하며 교우들에게 소개할 것이며, 이 이론에 따라 느헤미야/에스라 강해를 진행할 것입니다. ⓵ 제 1차 포로귀환은 주전 538년에 세스바살, 스룹바벨, 예수아라는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약 49,697명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고레스의 지원을 받아 고국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는 사역을 합니다. 물론 재건 중에 지역에 살고 있었던 사마리아 출신의 거민들에 의해 방해를 받고 16년(520년까지) 동안 성전 재건 사역이 중단되었지만 학개, 스가랴 예언자들의 독려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성전 재건이 다시 진행되어 4년 만인 주전 516년에 제 2 성전을 봉헌하게 됩니다. ⓶ 제 2차 포로귀환은 주전 458년에 학사 에스라가 중심이 되어 아닥사스다 왕 재위 시절, 1,758명이 귀환합니다. 에스라는 귀환하여 성전 재건 이후 흐트러져 있는 유다 공동체를 하나님 신앙과 율법 회복이라는 대 명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역에 임합니다. ⓷ 제 3차 포로귀환은 주전 444년에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경호실장) 역할을 맡았던 제 3세대 바사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추측되는 느헤미야의 인솔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유감스럽게 3차 포로귀환은 몇 명의 인원이 돌아왔는지를 보고하고 있지 않지만, 귀환한 자들의 목적이 성벽 재건이라는 대명제였음을 감안할 때 3차 포로귀환자들의 대부분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귀환한 자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예언자들이 예언서에서 언급한 남은 자 그룹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기에 동시대 인물이었던 이미 2차에 귀환했던 에스라와 함께 3차 포로귀환공동체의 지체들은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를 다시 회복시키는 강력한 영적 개혁 운동의 모티브가 된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상으로 세 번에 걸친 포로귀환의 흐름을 교우들에게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주일 오전 예배를 통해 집중하게 될 은혜는 세 번째 항목이겠지만 기실,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별개로 해석할 수 없으며, 같은 맥락에서 에스라는 느헤미야를 배제하고 설명될 수 없는 이유는 포로귀환이라는 역사적 배경은 이렇게 하나의 묶음으로 접근할 때만 이해는 물론,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우리 세인교회가 주일 오전 예배 강해를 통해 나눌 느헤미야 강해는 에스라 이해와 병행하는 방법을 고수할 것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구도를 전제하면서 이제 오늘 설교의 제목에 답하려고 합니다. 왜 느헤미야서를 읽어야 합니까? 저는 3주에 걸쳐 이 질문에 대해 답하려고 합니다. 오늘 주일은 그 첫 번째 답을 제시합니다. ※ 남은 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철저한 일하심을 보기 위함입니다. 저는 앞서 1-3차에 걸친 포로귀환의 인원수를 소개했습니다. 3차 귀환자를 뺀 인원으로 접근하면 51,455명입니다. 이들은 소수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자의 수가 약 20,000명 정도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후 1-3세대에 걸친 약 5만 여명이 50-120년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누가 보더라도 작은 숫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나라를 잃은 국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수 있는 중요한 팩트를 하나 나누어야 합니다. “에스라 2:64절과 느헤미야 7:66절을 통해 볼 때 에스라의 인도 아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자들은 모두 42,360명(특정한 가문 누락, 여자의 총수 제외 등등으로 앞에서 언급했던 49,697명과 차이가 있음)이었다.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었던 유대인들은 유대로 돌아오지 않고 바벨론에 남았던 것으로 보이며, 귀환한 사람들 가운데 제사장 가문이 불과 10%에 지나지 않은 것을 보아 바벨론에 남은 자들은 바벨론에 계속 살면서 번영을 누렸을 것이다. 결국 돌아온 자들은 바벨론에 누릴 수 있었던 부유함을 포기했던 다분히 신앙적으로 유대 신앙의 정신을 지키려 했던 남은 자들이었다.” (김 사무엘, “에스라-느헤미야의 혼합 결혼 파기에 관한 연구”, 토브북스, 53-54.) 앞으로 살피겠지만, 김 사무엘 목사의 정론은 적절한 지적입니다. 유대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은 유대의 신앙적 선택에서 물러서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다윗 왕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영적 결단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남 유다의 멸망을 예고한 예언자 중에 특히 이사야는 본인의 예언서에서 남은 자 사상을 강력하게 시사했습니다. 이사야 6:13절을 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남은 자를 통해 그루터기 역할을 감당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신탁은 대단히 중요한 유대 신앙의 핵심이었고 뼈대였습니다. 유대 신앙의 밑힘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도 이사야와 뜻을 같이 하며 남은 자의 귀환에 대해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 31:7-8절을 나누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이외에도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남은 자들을 통하여 일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표명은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저는 이 남은 자 사상에 대한 하나님의 표명이 때론 얼마나 위로와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합동신학대학원의 현창학 교수가 일설한 포로 귀환공동체가 만나게 될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를 읽다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절절함을 느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그들은 왜소하기 짝이 없는 무리였다. 많아야 수만 명이었고 그들이 주변에 동화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어느 학자의 말처럼 그들의 처지는 ‘이방이라는 대양에 둘러싸인 작은 섬’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온 세상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신앙의 유산을 길이 보존하여 구속사의 허리를 다시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담아내야 하는 토목 공사에 필요한 자원도 절대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주변의 위협은 끊이지 않아 생존 자체부터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현창학. 에스라-느헤미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목회와 신학 편집부, 14-15.)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던 황폐 그 자체였던 예루살렘임을 포로귀환자들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국가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의 무력에 짓밟힘을 당한 후 무려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방치된 땅에 돌아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모험인지 귀환자들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루살렘이라는 조국 땅으로 세 번에 걸쳐 돌아왔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을 남은 자(the Remnant)라고 정의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는 적확한 정의였습니다. 눈물 나게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구속사의 성취를 위해 이들을 세울 것을 계획하셨고, 때가 되자 이들을 세워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으며, 또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사의 시나리오대로 실천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점입니다. 느헤미야 역사서 강해는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그 일하심을 21세기 현장에서 목도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시도입니다. 그러기에 이번 강해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시대의 남은 자로 세우실 것이며, 더불어 포로귀환자들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 일하실 것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펜데믹 4년 차에 접어든 우리들의 지경이 황무할 대로 황무한 땅, 예루살렘의 형편과 다름이 없습니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21세기의 이 땅입니다. 주전 5세기에 그렇게 황폐했던 땅 예루살렘으로 남은 자들을 하나님이 다시 돌려보내셨습니다. 더불어 그들을 영적으로 불러 일으키셔서 제 2성전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고, 성벽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무기력했던 포로공동체의 영적 기상도를 일신하시기 위해 에스라를 사용하셨고, 학개와 스가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와 양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익명과 기명의 남은 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펜데믹 4년 차를 시작한 2023년, 우리 교회의 형편과 처지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필드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부터 시작하는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민감하게 성찰하여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는 남은 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 땅 제천에 세워진 세인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을 이루는 위대한 신앙적 역사의 그루터기가 바로 세인교회가 될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던 지난 2000년에 부흥 2000년 찬양 사역에 참석했습니다. 그날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한 김동호 목사께서 부산 KBS 홀에서 열린 집회 강사였습니다. 김 목사께서 그 집회에서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부산 KBS 홀에 모인 5000여명의 교우 여러분! 지금 찬양의 열기가 뜨겁습니다. 여러분이 이 공간에서 느끼고 있는 영적 감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오늘 찬양 집회가 끝나고 이 홀에서 나가면 그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이 우리를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부흥 2000년의 찬양곡들은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싸늘한 곳이 세상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이겨야 하며, 살아내야 하는 장소가 KBS 홀 안이 아니라, 밖이라는 절박한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부흥을 이루려면 KBS 홀 밖에서 이길 때 가능합니다. 여러분의 현장은 교회 안이 아니라 밖입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리떼가 우글거리는 장소는 세인 교회 안이 아닙니다. 세인 교회 밖입니다. 세인 교회 밖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20년이 지난 오늘이 더 살벌하고 척박합니다. 그래서 녹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다. 20년 전에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20년이 지난 오늘은 펜데믹이라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불행 중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어중이떠중이들이 분명히 보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2023년은 남은 자가 더 또렷이 보이는 시대라는 역발상의 은혜가 더 선명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은 주전 6세기 때나, 지금을 살고 있는 21세기나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더불어 남은 자를 예루살렘에 보내셔서 당신의 일을 행하셨던 하나님은 오늘은 세인교회를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느헤미야를 읽으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십시다. 더 선명하게 느끼십시다. 하나님이 오늘 나를 남은 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이번 사역을 통해 코로나로 인해 무너진 영적인 필드를 다시 세워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루터기가 되십시다. 빼앗기지 마십시다. 부흥 2000을 찬양합니다.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사 타오르게 하소서 주 영광 위해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 땅 가득 불어와 흰옷 입은 주의 순결한 백성 주의 영광위에 이제 일어나 열방을 치유하며 행진하는 영광의 그 날을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