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2일 주일 오전 예배 (설 명절) 설교 본문: 룻기 1:19-22 제목: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서론) 얼마 전, 북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 중에 한 사람을 선정해서 최첨단 AI 시스템과 각종 컴퓨터 그래픽, 방송 기법, 북에서 촬영된 그의 마을에 관한 영상 편집까지 완전하게 이루어내 마치 실향민이 그의 고향을 직접 찾아간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는 실로 감동적인 다큐멘터리 방송을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충분했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첨단 기법이 총동원된 거의 완벽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제게 다가온 압권은 실향민의 울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방송 말미에 눈물을 흘리며 읊조렸습니다. “어머님이 계셨던 곳, 어머니의 품인 고향에서 죽고 싶습니다.” 도대체 고향이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많이 생각하게 해준 방송이었습니다. 실향민이 살고 있는 땅은 그가 평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 땅은 고향이 아닙니다. 그가 100년을 살아도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은 타향입니다. 본론) 베드로전서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자신이 보내는 편지의 수신자를 한정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라고 지칭했습니다. 이 지역은 지금 튀르키에를 지칭하는 지역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히브리 출신의 골수 유대인인 점을 감안할 때 이방의 지역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흩어진’으로 번역된 ‘디아스포라’입니다. ‘디아스포라’는 ‘씨를 뿌리기 위해 흩다.’는 의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해서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유리하는 유대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들은 비록 유리하는 유대인의 혈통으로 이방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들은 본인들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언제나 민감한 선민의식을 갖고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유대의 절기가 되면 먼 길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올라온 신실한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적 증거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5-6절입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아마도 이 장면은 추측하기로는 유대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올라온 경건한 유대인 무리 중에 일부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중에 120명 문도들이 성령을 기다리는 장소에 초청되었고, 그곳에 있었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하게 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경험한 상태를 누가는 ‘슁케오’라고 기록했습니다. 말 그대로 소동하는 것이었는데 의역하면 충격의 도가니 안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인 것을 보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성도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방언을 말하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거의 코마에 빠질 정도의 영적인 충격에 휩싸였음을 암시해 줍니다. 이렇게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자들이 절기를 마치고 자신들이 살고 있었던 이방의 땅으로 돌아가 그들이 직접 경험하고 목도했던 성령의 강력한 일하심을 증언하는 도구가 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들이 살고 있었던 지경은 철저히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던 이방의 땅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베드로가 이들을 향하여 ‘나그네’ (파라피메모스) 라고 지칭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룻기를 읽으면 이 파라피데모스의 향기가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사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나오미요 아들 둘이 있었는데 말론과 기룐이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유감스럽게 그가 살고 있었던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때가 사사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여 이방 나라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던 사사 시대만의 독특했던 시대 정황으로 인해 흉년의 고통을 당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도저히 엘레멜렉이 베들레헴에서 버틸 수 없었던 궁핍한 상황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단어 자체가 ‘떡집’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이스라엘 지역 중에서도 베들레헴은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이었기에 이런 지명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 살고 있었던 엘리멜렉이 도저히 버틸 여력이 안 되어 모압으로 임시방편 삶의 거처를 옮기려고 했을까를 짐작해보면 흉년의 강도가 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로 잠시만 모압이라는 이방 땅에서 살기 위해 엘리멜렉의 가정은 이주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옮긴 땅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을 이 가정이 살게 됩니다. 사는 동안에 두 아들이 장성했고, 장가를 가게 되어 큰 며느리는 오르바와 작은 며느리는 룻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방의 땅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을 산 동안 이 가정에 엄청난 재앙이 임했다는 점입니다. 엘리멜렉, 말론, 기룐이 죽은 것입니다. 모든 남자들이 죽어 졸지에 세 명의 과부가 생긴 것입니다. 추측건대 가장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여인은 아마도 졸지에 가장이 된 엘리멜렉의 아내였던 나오미였을 것입니다. 하늘과도 같은 남편이 죽었고, 생떼 같은 두 아들들도 죽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젊은 청상과부 며느리 두 명을 데리고 자신의 고향도 아닌 모압에서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나오미에게는 절망 그 자체가 그녀의 남은 삶일 수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매일이 지옥이었을 나오미에게 한 가닥의 희망의 소리를 들린 것입니다.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 유다 땅에 기근이 풀려서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룻기 1:6절입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이렇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을 한 나오미는 자신의 동선과 끝까지 길을 같이 하겠다는 둘째 며느리 룻과 베들레헴으로 귀향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본문 19절을 읽습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와 룻은 우여곡절 끝에 고향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를 기억하고 있었던 고향 사람들이 그녀의 귀향을 기쁨으로 받아주었음을 시사하는 단어를 19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떠들며’입니다. 이 단어를 해석한 구약학자의 주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떠들며’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훔’은 주로 전쟁 시에 사용하는 용어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 진영에 법궤가 들어오자 모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큰 소리를 지를 때(삼상 4:5), 왕의 즉위식에서 백성들이 큰 소리를 지를 때 사용하던 용어다. (왕상 1:45) 이는 엘리멜렉 가문이 베들레헴에서 유명한 집안이었다는 점과 나오미의 귀향 사실이 성읍 사람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의 귀향을 성읍 사람들이 기쁨으로 환영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사야,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성경주석-룻기”,79.) 10년 만에 돌아온 나오미를 냉대하지 않고 환영해 준 고향 사람들의 면면이 보이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나오미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20-21절에 나오미의 내적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고향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룻기의 저자는 나오미의 복잡한 심리적 혼돈의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나오미는 본인이 당한 고난의 주체가 엘 샤다이 즉 전능자이신 하나님이라고 자조 섞인 토로를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오미가 느꼈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대체적으로 긍정적이지 않은 데서 이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실례로 ‘괴롭게 하셨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더불어 ‘징벌하셨다’고 불만도 표현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환대하며 따뜻하게 맞아주는 고향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신을 정의합니다. 본문 20절을 다시 한 번 복기하십시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자신을 더 이상 ‘나오미’(기쁨)라고 지칭하지 말고 ‘괴로움’ (마라)이라고 부르라고 토설합니다. 본인의 괴롭고 힘든 상태를 에둘러 대변한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 자조 섞인 불만을 토로한 나오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야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구약학 교수인 캐서린 두웁 자켄펠트 교수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슬픔을 하나님의 행동 결과라고 전제하면서도 자기 귀환을 말할 때, 나오미는 무의식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비극에서 구해 주시기 위해 무대 뒤에서 계속 역사하고 계실 것임을 고대하고 있는 것 같다.”(현대성서주석- 룻기, 77.) 풀러 신학교의 프레드릭 부쉬 교수도 이를 지지해 줍니다. “여기에서 나오미는 믿음 없음을 증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돌리는 믿음이라는 자유를 가지고, 그녀는 자신의 불평을 단호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발설한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불평의 신학’은 진실성과 솔직성이라는 실례를 전제하고 있다.” (프레드릭 부쉬, “WBC 룻기 주석, 162.) 이런 신학적인 암시를 준 룻기 저자는 본문 마지막 22절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한 구절을 기록함으로 본문 단락을 마감합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이 구절에서 바로 잡아야 하는 부분을 먼저 바로잡겠습니다. 나오미가 둘째 며느리와 함께 고향 베들레헴에 돌아왔던 시기를 밝히고 있습니다.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라고 밝힙니다. ‘추수하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크찌르’는 수확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대체적으로 팔레스타인 땅에서 보리를 추수하는 시기는 4-5월입니다. 이것을 적용한다면 개역개정판 번역인 ‘보리 추수(秋收)’라는 번역은 잘못 된 번역입니다. 도리어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보리 수확’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보리를 수확하는 풍요로운 시기였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본문 주석을 진행했습니다. 오늘은 설 명절이기에 한 주 더 제목 설교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으며 본문을 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 21절 전반절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이 주는 신학적인 함의가 설 명절 주일에 제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나오미 일가가 베들레헴을 떠날 때의 상황이 흉년이었지만 풍족한(믈레아) 상태였음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모압에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의 상황은 비어(레이캄) 있는 상태로 돌아오게 했다고 보고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설 명절 주일에 주시는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 주 품 안과 주 품 밖의 영적 상태의 희비를 선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베들레헴은 주께서 내주하시는 품 안입니다. 흉년이라는 나름의 고통이 주 품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베들레헴을 떠날 때 엘리멜렉 가문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의 고백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그의 가족은 ‘믈레야’ 즉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부족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모압에서 살다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는 빈손(레이캄)이 되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우리가 나오미의 토로를 통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은혜는 영적인 시각에서도 똑같다는 점입니다. 주 품 안에 있는 것은 베들레헴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주의 품을 떠나 주 밖에 거하는 것은 모압에서 사는 것입니다. 실상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품 안에 있을 때는 영적으로 궁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 밖에 거할 때는 당연히 영적으로 굶주립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 22절 전반절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입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그렇습니다. 빈손이었던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보리 수확이 한참 일 때였습니다. 주님 품안으로 돌아와야 영적으로 다시 풍요로워집니다. 나오미의 선택이 천만 다행이고 탁월했던 이유는 그녀가 자부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에 나타난 구절 중에 압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끄는 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주저하지 않고 누가복음 15:18-20절 전반절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한국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18-19절을 합니다.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20절 전반절에서 실패한다는 점입니다. 깨닫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하지만 20절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위력 중에 하나인데 그 동안 한국교회는 이것을 소홀히 여겼던 것이 사실입니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깨달음이라기보다는 그 깨달음에 대한 실천함입니다. 주 밖에 있는 나의 자화상을 깨달아 알았다면 주 안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모압이라는 영적인 타향 즉 주 밖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았다면, 베들레헴이라는 주 안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하는 ‘탕자의 귀환’에 수록된 글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의 길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는 하지만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모릅니다. 제 힘으로는 사면초가에 부닥친 상황을 돌파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낯선 땅의 부랑자로 지내느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종 대접을 받겠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그 사랑을 의심하는 마음을 거두지 못합니다. (중략) 그러므로 돌이키는 순간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지혜롭게 그리고 스스로 훈련해 가며 여행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훈련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환, 포이에마. 89-90) 이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돌아가는 것도 영적인 투쟁이다. 왜 아니 그러겠습니까?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혔다가 하나님의 권세로 돌아가는 과정에 영적인 치열함이 있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주 품안이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테제라는 확신입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세속적 힘을 빼십시오. 그 힘을 갖고는 주 품안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유격 훈련 시에 훈련병들에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PT 체조로 체력을 소비시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여력이 있다고 믿고 유격 훈련을 받으면 반드시 사고가 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탁구장에 나가서 하위 부수의 회원들의 맞상대가 되어 준 뒤에 그들과 시합을 할 때 회원들에게 꼭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드라이브나 스매싱을 할 때 상대방이 상위 부수이기에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어깨에 힘을 주면 반드시 실수하니까 어깨에 힘을 빼고 공격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욕심을 버리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합을 하면 언제나 패합니다. 그리고 경기를 패하면 패할수록 씩씩대며 어깨에 힘을 줍니다. 그러면 결코 고수를 이길 수 없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고향 교회에 오신 교우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고향의 품에 계시니까 이론적인 행복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지는 행복과 감사가 있으시지요? 그게 고향입니다. 고향은 따뜻합니다. 푸근합니다. 영적인 고향도 똑같습니다. 영적인 모압일 수밖에 없는 주 밖에 있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영원한 고향인 주 품 안에 있으면 언제나 안전합니다. 은혜라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우리 세인의 모든 지체들은 주 품 안이라는 고향에서 떠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품에 주품에 품으소서 능력의 팔로 덮으소서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 보리라 주님 안에 나거하리 주 능력 잠잠히 나 믿네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 보리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