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서른여섯 번 째 강해) 제목: 연보의 역설 본문: 고린도후서 9:10-15 서론) 이제 오늘 설교를 마지막으로 너무 부담스러운 고린도후서 8-9장의 강해를 마감하게 되어 너무나 기쁘고 홀가분합니다. 여러 교우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지 목사에게 있어서 물질 설교는 분명히 지뢰밭을 건너는 사역입니다. 해서 상당히 큰 부담감을 갖고 고린도후서 8-9장 연구를 진행했는데 오늘 그 막을 내리게 되어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오늘 한 번만 더 하는 헌금에 관한 설교인 것을 인지하고 지난주에 드렸던 권면처럼 수비 자세를 취하지 말고 도리어 긍정적인 마음으로 설교를 경청해 주기를 바랍니다. 영어 단어 중에 신조어로 많이 쓰이는 것이 있는데 ‘silver lining’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단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옷의 안쪽이 은이다.’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저렴한 옷을 구입했는데 그 옷의 안쪽의 질감을 보니 은으로 되어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수지맞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어떤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해서 낙망을 했는데 후에 이루어진 일의 결과를 놓고 보니 그 사람에게는 도저히 상상하거나 생각할 수 없었던 행운이 뒤 따르는 경우를 가리켜 ‘silver lining'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단어 중에도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한자 단어가 있습니다. 역설(逆說)이라는 단어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하면 우리는 물의 도시로 알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물의 도시답게 운하가 유명한데 운하로 관광하는 투어가 유명해서 연간 약 2,000만 명이 다녀가는 도시로 꽤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이 환경오염인데 베네치아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베네치아는 물이 심각하게 오염되어서 물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악취가 나는 오명을 얻게 된 도시로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베네치아의 이 더러운 물이 깨끗해졌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해 관광객이 급감하고,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은 6개월 만에 나타난 현상이 베네치아 운하에서 고기들이 뛰놀기 시작했다고 신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책으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라지자 자연이 나타났다.” 이럴 때 쓰는 단어가 역설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역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았습니다. “역설(逆說)이란, 의미가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을 말한다. 문학에서는 모순을 이용해 어떤 중요한 사실이나 진리를 담는 표현 방법을 말하기도 한다.”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를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입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 작은 거인, 미워하는 만큼 사랑해 등등” 그런데 이런 역설의 진리는 성경 안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어떤 경우입니까? 마태복음 23:12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린도후서 12:10절 후반절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런 종류의 역설적인 진리는 무궁무진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역설적인 은혜를 기록한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구제 연보를 독려한 뒤의 뒤따르는 격려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연보를 독려하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권면했던 연보의 실제적 방법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① 할 수만 있다면 많이 행하라 ② 연보의 액수를 정하기를 바란다. ③ 인색하지 않게 행해라 ④ 억지로 하지 말라 ⑤ 즐겁게 해라. 고향 교회를 섬기던 어렸을 때 교회건축을 위한 부흥회가 열렸는데 그 때 그 부흥회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경쟁적으로 건축헌금을 갹출 하는 장면입니다. 100만원부터 시작해서 200만원, 그리고 등등 그 날 단위에 선 사람은 목사가 아니라 경매사 그 자체였던 씁쓸함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바울은 5가지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요청했던 것을 보고 상업적인 부흥사들과 같은 인격으로 매도하면 정말로 곤란합니다. 바울은 야바위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조금은 부유했던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다른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보다 짐을 더 지라고 권했던 이유는 분명한 그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증언합니다. 본문 10절을 살펴보십시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베풀 수 있도록 무언가를 주셔서,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튼튼하고,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충만한 삶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바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연보를 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역설적인 은혜, 첫 단계를 만나게 됩니다. 1)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고 계신다는 확신입니다. 바울은 대단히 예리하고 세밀하게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강력한 은혜를 제시합니다. 연보의 역설이라는 은혜입니다. 바울은 내가 연보를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연보를 드린다는 한 가지 사실로 끝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연보를 명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 나하고 일하고 싶어 하신다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하나님께 연보를 하라고 명하시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강력한 증거라는 점을 제시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분명히 바울은 10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베풀 수 있도록 무언가를 주셔서,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튼튼하고,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충만한 삶으로 자라게 하신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연보를 하게 하시는 이유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요청이라는 점에서 너무 큰 감동이 임합니다. 중학교 시절, 저는 학교에서 3년 동안 서기를 맡아 봉사했습니다. 당시, 저는 칠판에 판서를 잘 하는 축에 있었던 학생이었습니다. 가장 예민한 사춘기 시절, 수업 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친구 앞에서 ‘이강덕’하고 부르셔서 오늘 공부할 내용을 칠판에 판서하라고 시키시면 이름을 부르실 때 너무 좋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60여 명 정도 되는 동기생들 중에 선생님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행복감, 그리고 내가 아이들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진해교회에서 시무할 때였습니다. 지금은 전라도 고향으로 내려가 계신 권사님께서 주일학교 사역에 남다른 관심이 있으셔서 그 권사님께 주일학교를 맡아 사역하도록 위임을 했습니다. 당시 권사님은 어린이전도협회를 지원하고 돕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기에 그 분이 전도협회에서 배웠던 어린이 전도에 대한 노하우들을 십분 활용할 수 있도록 옆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응원했습니다. 교회 학교가 질적, 양적으로 부흥하며 신나게 사역하던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목양실로 찾아온 권사님께서 제게 이런 말을 하나 던지시며 눈물을 글썽거리셨습니다. “목사님, 저를 뭘 믿고 주일학교 사역을 맡기셨어요. 전문적인 지식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경제적인 도움도 잘 주지 못하는데 도대체 저를 왜 일군으로 임명하셨어요.” 투정이 아닌 감사라는 것을 알았던 제가 그 권사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권사님은 아이들을 사랑하시잖아요.” 그 권사님은 저와의 관계가 20년이나 지났음에도 아직도 저와는 영적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동역의 위임을 받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연보를 잘 감당하라고 역설하며 이렇게 그들에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연보할 수 있는 그 무언가(영적 이끄심)를 주신다. 그것을 주심으로 너희들과 함께 일하고 싶어 하신다. 더불어 그것으로 인하여 너희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충만한 삶으로 이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설교의 첫 번째 은혜부터 감동의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연보 행함은 단순히 연보 행함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연보 행함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신다는 은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하고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계획입니까? 그러기에 이 은혜를 인정하는 자만이 이 찬송을 진솔히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일군 삼으신 주 크신 능력 주시고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찬송가 320장 후렴) 연보 행함의 역설적인 은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2) 연보 행함은 행하는 자와 받는 자에게 감사를 알게 해줍니다. 본문 11-1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이 구절 역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이 구제 활동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의 부족한 필요를 채워 주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릴 풍성하고 넉넉한 감사를 낳게 합니다.” 정말로 짜릿한 감동을 주는 바울의 단말마적인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부연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구제연보를 드리던, 여타 다른 헌금을 드렸을 때, 이후 감사가 나에게 없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보나 헌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내가 하나님께 연보를 진정성이 있게 드렸다면 반드시 그 결과물로 감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적시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위해 넉넉하게 구제 연보를 드린다면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그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고, 동시에 그 연보를 드린 자들 역시 풍성한 감사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들어갔던 유럽 선교의 첫 번째 관문이 빌립보 성이었습니다. 이 시기가 주후 50년 즈음으로 산정합니다. 이후 바울이 로마의 어느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쓴 시기를 학자들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주후 55-62년 사이로 개진합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기를 기점으로 볼 때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의 영적 인연을 가진 지 많이 잡으면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였고 아무리 짧게 잡아도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라는 산이 나옵니다. 5-1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지체들에게 무엇을 감사하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1:3-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바울의 심정이 전해지는 것 같아 울컥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형제들에게 전하는 감사는 물질적 지원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바울의 자비량 사역을 도운 이방 교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이 빌립보 교회는 규모가 그리 큰 교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전 생애 동안에 끝까지 그를 지원하고 선교하는 사역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의 이 물질적인 지원 사역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 그렇다면 이런 공식이 나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의 물질적인 지원으로 이방 선교에 큰 힘을 얻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음과 동시에 한 가지 확대하고 싶은 감동은 바로 이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의 동역자들을 위해 중보하고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연보의 위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2021년에 피선교지에 32구좌를 지원합니다. 이 지원은 미서녈 처치부에서 사역하는 지역 사회를 위한 대외 구제 사역과는 별도의 섬기기입니다. 1년에 순수하게 교회 내적 사역에만 1,920만원이라는 선교비를 지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산술적인 계산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선교의 감동이 있습니다. 피선교지가 우리 교회를 위해서 중보 해 주는 역설의 은혜 말입니다. 이번에 우리가 새로 돕는 해외 협력 선교사님 한 분이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코로나19로 모든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코로나로 인하여 언택트 시대를 겪으면서 여러 가지 재정적인 이유로 인해서 선교지에서 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선교헌금을 삭감하거나 지원을 종료하는 이 엄중한 상황 속에서, 도대체 제천세인교회와 성도님들, 목사님은 일본사역과 저희 가족을 위해서 재정적 후원을 결정하셨을까? 어제 저녁 목사님의 연락을 받고 사실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의 현실에 전혀 맞지 않는 당혹감과 함께 감사함이 교차하였고 우리 주님께 이런 상황에서 감사함으로 받아야하는지 혹시나 교회에 성도님들과 목사님께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인 아내와 지금 신세를 지고 있는 일본인,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이 소식을 알리니 함께 깜짝 놀라셨습니다. 일본말에는 ‘엔료시나꿋떼모 이이요’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 소천하신 저의 일본에서의 사역에 있어서 많은 영향력을 주신 호리우치 아키라 목사님께서도 저에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선의를 너무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선의를 은혜와 감사함으로 받고 그에 대한 보답을 성의껏 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일본 선교 사역과 저희 가정을 위해서 제천세인교회의 동역자로 섬길 수 있는 은혜와 기회를 주신 성도님들과 담임목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조만간 저희 가족 소개와 사진, 그리고 일본에서의 사역 소개와 기도편지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들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 29:11)” 2021년 새해 제천세인교회의 복음 선교의 사역 위에 미래와 희망이 가득 넘치는 한 해이기를 위해서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신옥철 선교사 드림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제, 선교 등등의 연보 사역은 결코 물질의 통용이 아니라 영적 교제를 통한 감사를 만들어내는 통로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연보 행위는 감사를 하게하고 감사를 낳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이 본문에 남긴 11-12절은 정답 중에 정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교훈을 삼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3) 연보 행함은 최고의 은혜로 이끄는 견인차임을 알려줍니다. 본문 13-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3절을 시작하면서 소개된 단어 ‘직무’는 헬라어 단어 ‘디아코니아’의 번역입니다. 디아코니아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종종 ‘섬김’이라고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해서 집사라는 직분의 단어를 영어로 디아코니아에서 파생된 Deacon이라고 합니다. 섬기는 자가 집사입니다. 물론 로마 가톨릭에서는 deacon이 성직자인 부제를 의미하기는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평신도 사역자인 집사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구제 연보 사역의 행하기는 직무다. 즉 섬김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직무를 행하는 것을 그리스도 공동체에 있는 자로서 합당한 자인가 그렇지 않은지를 가늠하는 증거로 삼겠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는 자라고 명시합니다. 동시에 그 연보행하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라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말한 바울은 결정적으로 연보행하기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연보 행함은 역설의 은혜입니다. 내 것을 드림으로 손해라고 느껴지는 것을 채우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라고 쐐기를 박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지극한’이러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에서 멈칫 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지극한’이라는 형용사로 번역되었지만 헬라어 원본에는 이 단어가 ‘휘페발로’ 라는 동사입니다. 이 단어의 원뜻은 궁사가 화살을 표적을 향해 쏟았는데 표적을 뛰어넘었을 때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exceed, surpass’ 라는 동사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초과했다. 뛰어넘었다는 말입니다. 가히 상상해 보십시다. 내가 예상했던 은혜가 아닌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은혜를 받았다면 그 때의 감격이 얼마나 큰지. 이 큰 은혜가 바로 연보 행하기를 실천할 때 일어난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공고히 한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점에 동의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예상했던 은혜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은혜가 나타나는 현장은 다름 아닌 물질 나눔의 현장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연보 행하기는 나를 최고의 은혜로 이끄는 견인차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요즈음 JTBC에서 방송하는 싱 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일종의 오디션 프로그램인데 아주 가끔 드문드문 식사시간과 맞물리면 시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 이승윤이라는 30호 가수가 나오는데 노래를 너무 잘해 핫 스타가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우연히 그에 대한 기사가 실렸는데 제 눈이 크게 떠졌습니다. 이승윤이라는 가수가 제가 멘토로 삼아 존경하는 이재철 목사의 막내아들이라는 기사였습니다. 이후 그 사실을 알고 30호 가수를 눈 여겨 보았더니 이재철 목사님과 정애주 사모님의 얼굴이 동시에 들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식은 부모의 DNA를 갖고 태어납니다.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작년 12월에 읽은 김기석 목사의 글 중에서 이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더욱 충만한 인간이 되어 간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 더 나아가 영적 감각들이 참여하고, 파트너가 되고 신적 생명을 함께 나누는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을 반영하는 형상으로 되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김기석, “모호한 삶 앞에서‘,비아토르,145.) 나는 우리 세인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DNA가 흘러넘치는 2021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DNA는 여러 가지에서 나타나겠지만 바울의 말대로 물질을 나누는 데에서 강력하게 나타남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연보의 역설은 하나님이 주시는 DNA가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일하고 싶어 하시는 동역의 마음,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최고의 은혜로 이끄시는 감동이라는 DNA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손 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길 주옵소서. 좁은 이길 진리의 길 주님 가신 그의 길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니다 성령이여 그 음성을 항상 들려주소서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하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주신 사명 이루소서 만왕의 왕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만 백성을 구속하는 참 구주가 되시네 순교자의 본을 받아 나의 믿음 지키고 순교자의 신앙 따라 이 복음을 전하세 불과 같은 성령이여 내 맘에 항상 계셔 천국 가는 그날까지 주여 지켜 주옵소서 |